[100자평] 행복한 그림자의 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아니, 이 말은 긍정적으로 들린다. 다시. 사랑은 사람의 못난 면을 들춰낸다. 그래, 이게 맞는 말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사랑은-어쩌면 사랑이라는 착각은- 내가 미처 나에게 있는지 알지 못했던 추한 면을 깨닫게 해주는데, 그래서 이 사랑을 후회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고, 그래서 그 추한 면에 대해서는 후회하느냐 하면 그건 맞다.
사람에겐 모두 저마다의 철칙이 있을것이다. 타인에게까지 강요하진 않아도 스스로는 이것을 반드시 지켜야 해, 라는 룰 같은 것. 내가 생각하는 이별은 그랬다. 아프지 않을 것, 심각하지 않을 것, 그것은 그저 그런대로 보내버릴 것. 그러나 세상의 모든 룰은 깨지라고 있는 것. 나는 어떤 이별에는 죽음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 맙소사, 나 결국 이정도였어? 한강 다리 위를 걷다가 멈추어서서 빠져 죽어버릴까, 생각할만큼, 그렇게 약한 사람이었어? 도도하고 강한 사람..아니었어? 왜이래, 아마추어같이.
여자를 안는 남자,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 여자의 어머니에게도 농담을 잘 건네는 남자, 여자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가는 남자,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하는 남자를, 여자도 받아들이려고 했다. 언젠가는 그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는 알아주는 가문 출신이었으니까. 자신을 무시하는 직장상사에게, 나 이 남자랑 결혼했어, 라고 말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동생네 부부와 여행을 다녀오겠다던 그가, 여행지에서 그림엽서까지 보냈던 그가, 돌아올 때는 유부남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는 여행을 간 게 아니라 결혼을 하러 간 것이었다. 그동안 여자는 그가 자신에게 매달린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더럽지만) 그의 가문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안쓰러운 듯 쳐다보고 자신의 반응이 궁금해 자신이 근무하는 곳으로 자신을 구경오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그래, 그까짓 것. 그가 결혼을 하고,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산다고 해도, 그래, 그녀는 괜찮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데, 새벽 0시 20분. 그녀는 차를 몰고 그의 집 앞으로 간다. 모두가 잠든 시간. 그녀는 그의 집 앞에 차를 대고 (오, 그 차는 그가 사준 것!) 경적을 울린다.
나는 차를 세우고 차창을 내렸다. 그런 뒤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숙이고 내가 참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길고 크게 경적을 울렸다.
그 소리에 나는 마음이 푹 놓여 한껏 소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이봐, 클레어 맥쿼리. 할 얘기가 있어!"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클레어 맥쿼리! 클레어 나와!" 나는 깜깜한 집에다 대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나는 또다시 경적을 울렸다. 한 번, 두 번...... 몇 번인지 모르게 수도 없이. 경적을 울리는 사이사이에 고함도 계속 질러댔다. 나 자신이 저쪽에 몇 발짝 비켜서서, 주먹으로 꽝꽝 내리치는지, 고함을 질러대는지, 경적을 눌러대는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리굿을 벌이는지, 무엇이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째깍째깍 하는지, 보기에 따라서는 신 나는 놀이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러고 있는지도 거의 잊었다. 나는 리듬을 살려 경적을 울리는 동시에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pp. 262-263)
경찰은 그녀에게 진정하라 일렀고 아마 다음날 마을 사람들도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할거다. 그녀와 사귀면서 다른 여자랑 결혼한 남자 역시, 내가 어쩌자고 이런 여자랑 사귄걸까 라는 생각을 하겠지. 그러나 나는 이 단편을 통틀어, 아니 이 단편집을 통틀어 이 장면이 가장 통쾌했다. 주변 모두가 그녀에게 그러지 말지 그랬냐고 지청구를 늘어놓을지 몰라도 잘했다.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어도 그녀에게 그건 필요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자신을 농락한 남자에게 찾아가 그의 이름을 동네 창피하게 부르던 것, 그것은 그녀가 그 순간 해야 할 유일한 행동이었을 거다. 나라면 저렇게 하지 못했겠지만, 그래서 더 그녀에게 응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으로 그녀는 당분간은 그 작은 마을 사람들의 눈치와 손가락질을 견뎌야 할텐데, 쳇, 새벽에 잠 못자게 자신의 배신당함을, 그래서 분노함을 모두에게 공표했다한들,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그녀는 잘못하지 않았다. 그녀는 못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한 실수를 하나 꼽자면, 자신을 그렇게 추하게 끌어내릴 남자와 사귀었다는 것, 그와의 미래를 기대하고 꿈꿨다는 것.
거지같은 자식.
사실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크게 좋다는 느낌을 받았던 건 아니었는데, 위의 단편인 「그림엽서」가 무척 좋고 그 외에도 「작업실」과 「위트레흐트 평화조약」을 자꾸만 들추어보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 세 편이 유독 좋았다. 「위트레흐트 평화조약」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계속할 수가 없었어. 내 삶을 살고 싶었어." (p.375)
앞뒤를 쑥 자르고 이 문장만을 턱 내뱉으면 대체 왜그런지 알 수 없겠지만, 나는 이 문장이 이 소설의-이 소설집의- 키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말을 듣는 동생은 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언니 삶을 꼭 붙잡아. 놓지 마." (p.376)
그녀 주변의 모든이들이 그녀가 심했다고 그녀가 나빴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동생이 그녀를 이해한다. 그녀에게 언니의 삶을 살라고 말해준다. 이토록 아름답고 가슴을 푹- 찔러대는 단편들이 이 책 안에 있어서 다른 단편들이 설사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더라도 이 단편집을 돌아볼 수 밖에 없다. 언급한 세 편의 단편은 누구에게라도 추천하고 싶다.
오늘은 휴일. 여수에 갔다온 피곤이 여즉 쌓여있어 오늘은 제대로 이걸 풀어야 했다. 자고 먹고를 반복하다가 깨어있는 시간에 침대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면서 편 류 근의 시집 안에서 나는 오, 이렇게 재미난 시를 읽게됐다.
유부남
당신이 결혼 따위 생각하지 않는 여자였으면 좋겠어 우리 그냥 연애만 하자 사랑이 현실에 갇히는 건 끔찍해 결혼은 천민들의 보험일 뿐이야 진부해 그냥 연애만 하자 서로의 눈을 바라보자구 구속하는 일 따위 구역질난다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야지 밤에 내게 전화하는 건 구속받는 기분이어서 싫더라 주말에 약속 잡는 사람들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정서적 난민 같아 주말엔 책을 읽고 음악을 들어야지 당신은 내게 뭔가 요구하지 않을 사람 같아서 참 마음에 들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야 천박해 그러니 우리 쿨하게 연애하자구 참, 내가 전화 받기 곤란할 만큼 바쁜 사람이란 거 알지? 전화는 항상 내가 먼저 할게 사랑해 이런 느낌 처음인 것 같다 우리 좀 더 일찍 만날 걸 그랬지?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나는 이 시를 읽고 이 시인은 대체 결혼을 언제했길래(응?) 이런 시를 지은걸까 싶어서 책 날개를 들추어 시인에 대한 소개글을 읽어봤지만 시인이 언제 결혼했는지는 나와있질 않았다..아................간만에 읽는 재미있는 시였습니다, 류 근님!
휴일은 언제나 시간이 빠르다. 사실 시간은 늘 빠르게 지나가긴 했지만 휴일엔 유독 심하다. 오늘은 정말이지 뭐 기억에 남을만큼 한 게 없는데 벌써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오늘은...오리 고기 먹은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는 하루구나..........
뭐, 그럴 때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