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이 책의 제목이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했다.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있을까, 갸웃했는데 오, 알 수 있었다.
나는 자신감 없이 그러나 동시에 노련하게 대답한다. 자신의 삶이 하염없이 비만 내리는 날일 뿐이고 자신의 육체는 이런 날을 위한 우산일 뿐이라고 느끼는 그런 사람들이 저희를 찾아옵니다.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시는군요, 그렇죠? 발크하우젠 부인이 묻는다.
아 예, 그렇죠,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죠. (pp.116-117)
이 책은 독특하다. 흥미로운 이야기로 팔랑팔랑 책장이 넘어가는 부류의 책도 아니고 아름다운 감동으로 내내 여운을 남기는 책도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책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 지 모르겠고 좋은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책속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있고, 하루하루 권태롭게 살아가고 있다.
50년대에 왜 레이저쇼가 없었냐 하면 그 당시엔 권태가 아직 오늘날처럼 세계를 지배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수잔네가 말한다. (p.188)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다가 이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이런거. 가끔 내가 지리멸렬하다 느끼고 지겹다고 느끼는게, 그게 권태가 이 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인건가? 나는 권태가 지배한 세계로부터 정복.. 당한건가?
와- 이 영화는 어마어마하게 슬프다. 슬프다못해 끔찍하다.
서른 다섯 이후로 나이 세기를 멈춰버린 한 대학의 교수인 여자주인공은 자신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포르노영화 제작자인 오래전의 친구를 찾아가 포르노 영화에 출연하게 해달라고 말한다. 이에 친구는 니가 부족한게 뭐가 있어서 그런 영화를 찍느냐고 말한다. 너는 직업도 있고 먹여살려야 할 식구들이 있는것도 아닌데. 그러자 여자는 대답한다, 심장이 뛰고 싶다고. 나에게도 심장이 있다는 걸 느끼고 싶다고. 그녀의 삶은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무기력하게 아이들에게 강의를 하고는 집에 돌아와 포르노 영화를 보는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포르노 영화의 감독 앞에서 오디션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차마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지 못한다. 감독은 오디션 보기를 포기하려는 데, 그녀는 감독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 번도, 남자가 (나에게) 자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그녀는 마흔이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남자랑 자 본 적이 없다. 키스를 해 본 적도 없다. 그런 삶이 가치 없거나 무의미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구나 어떤 경험은 하게 되고 또 어떤 경험은 하지 못할 수도 있는거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경험한다는 것이 어디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그러나 당사자가 '나는 그것을 너무나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불행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슬프다. 이 나이 되도록 몸매를 가꾼것도 아니고 대체 뭐한거냐, 뱃살은 접히고 모아놓은 돈은 없고 남자랑 한 번도 자 본 적도 없고, 라고 자조하는 여자가. 그녀가 원하는 건 '진짜로 성관계'를 가진다는 포르노 영화를 찍는 것이고, 그러면서 파트너를 바꾸는 것이고, 그러면서 키스도 해보는 것이다. 남자랑 자기 위해 포르노 영화배우가 된다는 설정이야말로 영화적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그저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기라고는 말할 수 없는게 아닐까.
그리고 그녀가 처음으로 영화를 촬영하던 날, 하아- 그 날이 너무 슬퍼. 슬프다 못해 끔찍하다. 그녀는 '하고싶어 하고싶어'를 입에 달고 다니던 여자였는데, 아아, 그 날, 바로 그 날, 자신이 전혀 경험이 없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눈앞에 보이고 만다. 여자를 제외한 그 공간의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나는 그 장면에 슬퍼하는데-그러니까 그런것은 지극히 은밀하게 그와 나 사이에만 알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니까-, 아, 그녀는 그런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드디어 남자랑 잤다는 데에 비죽비죽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오, 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에 '시작'만 있고 과정과 결과는 없었으니, 아, 이 영화는 정말이지 너무나 슬프다. 모아놓은 돈도 없이 접히는 뱃살만 가진 그녀의 삶이, 사실 뭐 나랑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그래서 가장 슬펐던건지도 모른다. 하아- 이 세계는 권태와 슬픔으로 가득차있는 걸까.
금요일에는 와인을 마시러 갔다. 스파게티를 파는 레스토랑이었는데 이벤트중인 가장 저렴한 와인을 시켜두고 앉아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남자 직원이 우리 테이블로 와인을 준비해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오픈해주겠다고 한다. 친구와 나는 그렇게 하라고 하고 말 없이 그가 와인을 오픈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오프너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와인병 입구의 껍질을 힘주어 오려내는 그의 손이 무척 크다고 느끼면서, 그래도 몇 번 쯤 그어야지 저렇게 한 번만 긋고 저 껍질을 벗겨내기는 쉽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그 큰 손으로 단 한번에 그 껍질을 벗겨낸다. 그리고 능숙하게 코르크 마개에 오프너를 박아 돌린 뒤 버벅대지 않고 코르크 마개를 병으로부터 빼낸다. 와- 엄청나게 멋있다. 나는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벗기는 것 보다 그 겉의 비닐을 벗겨내는 게 쉽질 않던데, 이렇게 능숙하게 해내다니. 손이 저렇게 크고 멋지게 생겨서 힘이 센걸까. 그래서 저게 가능한걸까. 그 전에도 또 그 후에도 나는 친구와 와인을 마셨던 바, 한 손으로 와인 병을 쥐고 따르는 것은 팔이 후달리는 일인데, 그는 와인 병을 오픈한뒤에 한 손에 병을 쥐고 힘들이지 않고 와인을 잔에다 따른다. 아우..짱멋있어. 나는 처음 레스토랑에 들어와서는 메뉴판의 금액들을 보고 기분이 별로 좋질 않았었는데, 커다란 손으로 와인을 오픈해주는 남자 직원을 보고는 마음이 몽글몽글 풀어져 버린다. 좋구나.
방금전에 남동생은 오늘이 만우절이니 자신의 회사 사장에게 전화해서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볼까, 라고 말한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너는 뻥쳤는데 사장은 뻥 안치고 그래라, 라고 하면 곤란하잖아. 그러다 깨달았다. 오, 나의 삶이 피폐하다는 것을. 맙소사. 만우절 밤의 21시가 지나가는데, 아무도 나에게 어떤 뻥도 치질 않고 있어!!!!!!!!!!!!!! 삶은 점점 더 권태로워지는걸까!
청포도나 씻어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