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침대 위에서 책을 읽다가 이젠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끄기 전, 이불이 엉망으로 되어있는 걸 보고는 제대로 폈다. 이불을 들어올려 펼치고 다시 똑바로 놓는 그 과정에서 이불과 침대 사이 혹은 이불이 접혀 있던 그 어느 사이에서 나의 스카프와 스타킹이 엉망으로 구겨진채로 튀어나왔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튀어나왔다. 어어? 이게 왜 여기있지? 나는 이것들이 사라지고 없었다는 사실을 그동안은 알지도 못했다. 이게 대체 왜 여기에..언제부터.. 하긴, 이렇게 이불을 다시 펴다가 침대 위에서 튀어나온 건 비단 스카프와 스타킹뿐만은 아니었다. 내 삶을 되돌아보면 침대는 마치 마법상자 같달까. 그러다가 자기전까지 읽었던 책에서의 그림블이 생각났다.
그림블은 정원에 가서 왼발 페널티킥을 43골 날리고는 침대를 정돈하기로 했다. 침대 정돈은 정말 쓸데없는 짓이다. 그림블에게는(사실상 웬만큼 상식적인 사람 누구에게든) 침대가 각 맞춰 딱딱 정리돼 있는 것보다는 시트가 둘둘 말려 있고 바닥에 베개 한두 개 떨어져 있는 게 보기는 더 낫다. 게다가 몸이 빠져나온 그대로 놔두면 다시 잠자리에 들기도 훨씬 편하다. 하지만 어른들은 정리정돈에 대해 무지하게 유난 떠는 사람들이므로 그림블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침대를 정리했다. 이건 꽤 괜찮은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잃어버려서 찾다 찾다 포기한 물건(잠옷 바지 같은 것)을 침대에서 종종 발견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까먹고 있던 땅콩버터 샌드위치가 베개 밑에서 나온 적도 있다. 침대란 좀 웃기는 냄새가 나는 물건인가 보다 했건만. (p.144)
세상에. 내가 열 살쯤 먹은 그림블과 별 다를 바 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니. 끙. 그러나 한가지 위안이라면, 나는 최소한 침대에서 음식을 발견한 적은 없다. 그러니까 내 침대에서는 '좀 웃기는 냄새'가 난 적은 없다는 얘기다.
이 책의 제목은 [픽션-작은 나라와 겁나 소심한 아버지와 한심한 도적과 자식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엄마와 아이를 두고 페루로 가 버린 부모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새와 위험하지 않은 대결과 이상한 휴대전화와 당신이 모르는 뉴욕의 비밀] 이다. 내가 좋아하는 닐 게이먼과 조너선 사프런 포어가 참여한 이 작품집을 내가 읽어봐야 하는건 당연하다. 물론 조금 늦은감이 있지만. 제목 덕분에 내가 기대를 한껏한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닉 혼비의 작품도 닐 게이먼의 작품도 그저 그랬다.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조너선 사프런 포어의 작품은 내 생각만큼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센트럴 파크와 맨하튼을 얘기해줘서, 그리고 연결할 수 있는 실이란 실은 죄다 연결해서 사랑한다고 말해줘, 사랑해, 라고 말해주는 소년과 소녀가 나와서 역시 포어가 짱이구나, 하기는 했다. 그런데 인상 깊은 작품은 '조지 선더스' 의 글에 '줄리엣 보다'의 그림이 삽입된 「라스 파프, 겁나 소심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 아마도 나는 몇가지의 강박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이 소설속의 아버지를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나 가족들의 안전이 걱정이 되는 나머지 그 누가 보기에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소심한 아버지. 그런 그가 깨달아가는 사랑과 두려움에 관한 진리.
그는 알았다. 사랑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그들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두려움을 없앤다는 것은 곧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을 반드시 수반한다는 것을. (pp.51-52)
아. 그는 분명 어리석었다.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식구들을 보호 통을 만들어 가두어 두는 그 행위를 대체 누가 용납할 수 있을것인가. 그러나 그가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 관심을 끊기로 결심한 것은 나 조차도 여러번 시도해보았던 일 아닌가. 나는 가장 강한 두려움은 가장 강한 사랑에서 온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사랑과 두려움 사이를 잘 조율해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두려움이 커지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오고야 마니까.
그리고 소심한 아버지는 결국 또 하나의 명백한 진리를 깨닫는다.
거울 속 그의 모습은 완전히 미친놈이었다. 머리카락은 산발에 눈에는 냉랭함이 서려 있었다. 누구도 그에게 수염을 정리하란 얘기를 해 주지 않았기에 수염은 거의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고, 누구도 그의 수염을 보고 슬쩍 헛기침하며 지적해 주지 않았기에 수염에는 빵 부스러기, 캔디 바, 그리고 납득이 안 가겠지만 고무로 만든 문 버팀쇠도 붙어 있었다.
그때 파프는 '파프 가설'보다는 덜 우아하지만 똑같이 진실한 '파프 추론'을 발견했다. 사랑 없이 산다는 것은 수염에 너절한 것들을 달고 다니는 거라는 것을. (p.55)
역시, 너무 사랑하지 않는 쪽이 세상을 사는데 좀 더 수월한 것 같다. 물론, 사랑하는 것도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것도 노력한다고 되는건 아니지만.
- 오전에는 엽서를 받았다. 시 한편이 적힌 엽서. 아, 너무 좋아. 나도 엽서를 꺼내어 답 시를 적어 보내야지. 우표를 붙여서 퇴근길에 우체통에 쏙 넣어야지. 내게는 시를 적어 엽서를 보내주는 친구가 있다.
- 오늘 나의 메신저 대화명은 '포크찹 스테이크' 였다. 점심을 먹던 남동생이 자신이 간 식당에서 본 메뉴라며 맛있겠다고 언제 여기서 술을 한잔 하자고 메세지를 보낸 것. 그 메세지를 읽자마자 눈앞에 포크찹 스테이크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걸 먹어야 해, 반드시 먹어야 해. 그래서 나는 남동생에게 오늘 당장 가자고 했더니, 동생은 오늘 선약이 있단다. 아, 나 이거 먹기 전에는 계속 이거 생각만 날 것 같은데. 그래서 당장 내일, 다른 곳으로 가서 스테이크를 먹자고 친구랑 약속해 두었다. 그런데 회사의 동료 직원인 y 가 말을 건다. 폭찹 스테이크(나는 포크찹이라 쓰고 그는 폭찹이라 썼다)는 자신도 많이 만들어 먹었었다며, 요즘은 게을러서 만들어 먹은지 오래라고. y는 내 메신저 대화명에 예민한데-아마 다른 사람들의 메신저 대화명에도 그럴 것 같지만-, 특히나 술이나 술안주가 들어가 있으면 더더욱이 말을 건다. 평소에는 잘 말을 안거는데..그러고보니 얼마전에는 돼지국밥 사진을 메신저로 보내주며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었는데, 생각난김에 조만간 돼지국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해야겠다. 내게는 맛있는 술안주를 보면 내 생각을 하는 직장 동료가 있고, 남동생이 있다.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