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마을버스를 놓쳤다. 이게 다 아침밥 때문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멈추지를 못했다. 엄마한테 "엄마, 식탁에서 일어나지지가 않아."라고 말할 지경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래서 한강을 못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좁은 초록버스 안에서 시집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힘들어서 관두고 지하철안에서 시집을 읽었다.
편지1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날이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나는 확실히 시를 읽는데 그다지 유리한 감성 혹은 뇌(?)를 가지고 있지 못한건가보다. 이 시집은 제목이 제일 좋다. 그 여름의 끝, 이라는 이 시집의 제목. 나머지 시들은 어느 한편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물론 이 시집을 사게 만든 이별1 을 빼놓고는.
이별 1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픈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습니까
하아, 눈에 띄는 시가 하나도 없구나, 하면서 책장을 넘기다가 맨 마지막, 이 시집의 제목과 같은 시를 보았다. 이 시는 좀 괜찮다. 이 여름을 보내는 나 같다.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여름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 내 절망도 끝나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지금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여름은 끝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 절망도 끝이 아니겠지.
하루에 열번 포기를 하고 열한번 포기가 안된다고 머리를 흔든다. 스무번 포기하면 스물한번 포기가 안된다. 머릿속에서는 포기와 포기못해를 두고 작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고, 이 싸움은 결국 내가 그날 해야할 일들을 놓치고 있는 현실로 돌아온다. 어제도 퇴근길에 강남에서 삼성까지 걷다가 문득 내가 해야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젠장. 욕설이 튀어나왔다. 물론 그 일은 업무적인 것도 아니고 나의 개인적인 일이라 내가 하지 않아도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일을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게 화가 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걷다가 테헤란로, 선릉과 삼성의 중간쯤, 사람도 많고 차도 많은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는데 차들도 빵빵거리고 옆에서 걷던 남자도 내게 뭐라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횡단보도의 중간쯤에서 더 갈 수가 없었다. 차들이 자꾸 달려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차들은 여전히 달리고 사람들은 횡단보도의 양쪽으로 많이들 서있다. 그제서야 이게 뭐지, 싶어 신호등을 보니 빨간색이었다. 나는 빨간불에 그냥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던거다. 그 사람많고 차 많은 데서. 차 한대는 나때문에 급정거를 했고. 나는 옆에 걷던 남자가 다시 뒤돌아 가길래 따라 뒤돌아갔다. 내가 막 건너니 내 옆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신호가 바뀐줄 알고 나와 함께 건너고 있었던가 보다. 오 젠장. 잠깐, 아주 잠깐 동안 세상이 멈춘것 같았다. 모든 차의 운전자들과 길을 건너려던 사람들이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왜이래. 죽고싶어 환장했어? 나는 내게 속으로 소리쳤다. 열한번 포기가 안되면 열두번 포기하자, 스물한번 포기가 안되면 스물두번 포기하자. 그리고 그만 잊자. 초록불일때 횡단보도를 건너자. 차에 치이지 말자. 정신을 차리자. 해야 할 일을 잊지 말자.
어쨌든 당분간 시집은 사지 말아야겠다.
좀전에는 책을 주문했다. 당연히(!) 꼬꼬면이 온다. 움화화핫. 나는 책을 사고 싶었던건가 꼬꼬면을 먹고 싶었던건가..하긴 이런걸 따져 무엇하랴. 이미 벌어진 일, 다 부질없지.
오늘 아침 식탁에는 아주 반찬이 많았다. 물론, 그러니까 마을버스를 놓친거겠지만. 돼지고기 넣은 김치찌게와 감자볶음, 멸치볶음, 취나물, 마른오징어무침, 오이지, 김치. 너무 맛있어서 한입 가득 밥과 반찬을 넣고 황홀경에 취해 먹고 있다가 아빠랑 대화를 하는데, 나는 아빠의 의견에 반대를 했던가 혹은 반항을 했던가, 아빠는 대화끝에 그러셨다.
그래도 널 미워할수가 없어.
나는 밥과 반찬을 양 볼 가득 넣은채로 대꾸했다.
날 미워하는건 좀처럼 쉬운일은 아니지.
아빠는 마구 웃으시며 쉬운데, 라고 하셨지만 그건 못들은척 패쓰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