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필립 베송을 알게 된 건, 그의 책 『포기의 순간』이었다. 경향신문 북섹션에서 그 책의 소개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책을 구매했고, 그 책을 읽으려고 책을 펼쳤을 때, 당연히 나는 책날개에 쓰여진 작가에 대한 소개를 읽었다.
필립 베송(Philippe Besson)
평단의 두터운 신망과 열성적인 고정 독자층을 동시에 확보한, 지금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2001년 『인간의 부재 속에서』로 등단한 후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발표해온 그의 작품들은 제목보다는 ‘필립 베송의 신작’으로 불리며, 그의 신작 소개는 프랑스 문단의 연례행사가 될 정도이다. 1967년 샤랑트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부터 접한 아르튀르 랭보, 마르셀 프루스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에르베 기베르 등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루앙의 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법학자로 강단에 섰으며, 일간지 〈리베라시옹〉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등단작 『인간의 부재 속에서』로 아카데미 공쿠르에서 수여하는 에마뉘엘 로블레스 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발표한 『그의 동생』은 페미나 상 후보에 올랐다. 이 소설은 2003년 파트리스 셰로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의 영예를 안았다. 2002년에는 『만추』를 출간, 에르테르엘 리르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각색되어 파리의 연극 무대에 올랐다. 2003년 출간된 『이런 사랑』(원제: 『이탈리아 청년』)은 공쿠르 상과 메디치 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2004년 메디테라네 상을 수상했고, 필립 칼바리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고 있다.
그밖의 주요 작품으로, 실제 유아살해사건인 ‘그레고리 사건’을 바탕으로 한 『10월의 아이』를 비롯, 『무상한 나날들』 『이별과 이별하기』 『우연히 만난 남자』 등이 있다. 2011년, 등단작의 속편인 『인간들 사이로의 귀환』을 발표했고, 여러 편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며 방송 프로그램 <파리 데르니에르>의 사회자로도 활동중이다. (-알라딘의 작가소개에서)
나는 아주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만능 엔터테이너를 자처하는 사람에게서는 하나의 집중된 능력을 보기 힘들거라는 것이었다. 이 작가에 대한 소개를 읽고 나는 책을 읽기 전, 그가 마음에 들질 않았다. 나는 파리의 삶이 어떤지도 알지 못하고 당연히 [파리 데르니에르]가 무슨 프로그램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가 단순히 작가가 아니라 어떤 '방송의 사회자'라는 것이 못마땅했던 거다. 이런 사람이 쓴 소설이 깊이를 가질 수 있겠어?
그러나 나는 [포기의 순간]을 읽기 시작하면서 내 편견이 깨지는 걸 느껴야 했다. 그가 쓴 문장들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게다가 그는 '나 자신'에게 충성하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 문체가 퍽이나 마음에 들어서 나는 그의 다른 작품들을 또 찾아 읽었다. 『10월의 아이』와 『이런 사랑』이 그것이었다.
『10월의 아이』에서도 예의 그의 문체는 마음에 들었지만, 그런데 뭔가 불편했다.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그 사실, 그것이 작가적 양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자꾸만 불편했다. 나는 그의 글솜씨가 마음에 드는데 그런데 이게 이래도 되는 것인지를 잘 모르겠는거다. 『이런 사랑』까지 읽은 현재, 그의 세 소설에서는 공통적인 특징이 보여진다. 소설의 시작은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걸. 그리고 그는 '타인'보다는 '자신'에 집중하라고 말해준다는 걸. 그가 주장하는 바가 권선징악인것이 아니라 희생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하는 나'라는 것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가 집중하는 '나'는 그래서 '나의 내면'의 소리를 잘 듣는다. 내가 최근에 읽은 『이런 사랑』에서의 이런 구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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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살리에리, 대체 무슨 일이야?'
대체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길래, 내가 이토록 막막하고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듯 아득해지는 거지? (p.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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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는 내게 웃어주었고, 나를 사랑했다.
나는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레오가 나타났다. (p.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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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의 첫번째 용기는 바로 아무런 근거 없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이 심술을 견뎌내는 것이고, 관례를 추종하는 자들의 공격을 이겨내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교훈을 주려는 자들과, 주입받은 교육으로 마비된 무지한 자들과, 자신도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분노를 어쩌지 못하는 순진한 자들이 가하는 매서운 타격을 비틀거리지 않고 받아내는 것이다. (pp. 13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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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히 저 부분에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다. '관례를 추종하는 자들의 공격을 이겨내는 것'. 이것을 어떻게 문장으로 표현해냈는지 나는 놀라서 한참이나 들여다 보았고, 친구에게 문자메세지로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 그러니까 내가 되고 싶은 나, 온전히 나이고 싶은 나를 방해하는 건,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하고있어, 너도 남들처럼 살아'라고 말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들의 태도가 아닌가. 그걸 이토록 간결한 문장에 담아내다니. 나는 이 책속에서의 여자인 '안나'에게 공감을 백프로 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문장들 때문에 필립 베송에게 가혹한 평을 내릴수가 없다. 그는 현재를 살아가는 외로운 영혼의 내면의 목소리를 바로 들려준다. 아주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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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늘 통용되는 간단한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딱 들어맞는 단어가 아닐 것이다.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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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도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타인이 나에 대해 얼마만큼을 알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들은 얼마나 보기좋게 간추려지는가. 나는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신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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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틀릴 것이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와 우리가 겪은 일은 다를 테니까.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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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장들 틈에서 나는 그로부터 날카로움을 읽는다. 내가 항상 생각하는 바는, 젊은과는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거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나는 언제나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생각해왔다. 대체 왜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건 젊은게 더 좋고 나이든게 더 나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젊음은 젊음대로 그리고 나이듦은 나이듦대로 각자의 생각과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이들었으니 더 철이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게 아니다. 아니, 나이 들면서 성장해간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걸 어떻게 해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 필립 베송이 말한대로, 젊음과 나이듦은 '같은 무기'를 가진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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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젊음은 참을 수가 없다. 젊음과는 맞서 싸울 수가 없다. 우리는 같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 순식간에 우리 사이에 불균형이 자리를 잡는다. 더 무슨 말과 행동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말한다 해도 핵심을 비켜가게 될 것이다. 갑자기 메울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너무 많이 벌어져버렸다. 늙고 한물가고 지친 기분이 든다.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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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도 그의 책들을 계속 읽어보고 싶다.
자, 그리고 이승우. 나는 이미 『한낮의 시선』으로 그를 만났던 바다. 그 소설을 읽고난 후의 이승우는 내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다시는 안읽어, 도 아니고 너무 좋아, 도 아닌 그 어느 중간쯤. 그러니까 조만간 그의 다른 소설을 한 번 더 읽어봐야겠어, 라는 그런 느낌. 그러려고 했던게 아닌데, 나는 오늘 책장에서 무심코 사두고 책장에만 꽂아두었던 이승우의 「칼」이 실린 『2010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꺼내 읽었다. 아주 충동적인 행위였다. 벨아미를 읽을까, 테스는 어떨까, 시집을 읽을까, 19분은? 그러니까 이건 꽂아두기만 했지 고려의 대상은 아니었는데, 찰나에 꺼내든 것. 그리고 읽기 시작했는데, 오, 두시간을 물도 없이 걷다가 간신히 구멍가게를 만나서 생수 한통을 사들고 벌컥벌컥 들이켜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한글로 쓰여진 한국 사람이 쓴 소설. 내가 읽어야 할 바로 그런 소설이 아닌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이 바로 이게 아닌가 하는 만족감이 금세 차올랐다. 나는 그의 문장들을 읽어내리는 게 좋았다. 책장을 넘기고 또 다른 그의 문장들을 자꾸만 읽으면서 이승우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아, 나는 병신이야. 그동안 이승우를 안읽고 대체 무슨 뻘짓을 한거야. 그동안 뭐한거냐고. 이제 이승우를 읽어야겠어, 라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 『생의 이면』은 프랑스에서 더 잘 알려진 작품이란다. 맙소사. 대한민국 독자들은 왜 이승우를 프랑스에서 더 유명하게 그냥 놔둔거지?
이승우
195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고,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했다. 1981년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구평목 씨의 바퀴벌레』, 『미궁에 대한 추측』,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오래된 일기』 등이 있고, 장편소설 『가시나무 그늘』, 『생의 이면』, 『식물들의 사생활』, 『한낮의 시선』 등이 있으며, 산문집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살다』 등이 있다.
『생의 이면』, 『미궁에 대한 추측』 등이 유럽과 미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특히 프랑스 문단과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2009년에는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엄격한 기준으로 펴내는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폴리오 시리즈 목록에 올랐는데 한국 소설로는 그의 작품이 최초로 선정되었다. 『생의 이면』으로 제1회 대산문학상(1993)을,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로 동서문학상(2002)을, 「전기수 이야기」로 현대문학상(2007)을, 「칼」로 제10회 황순원문학상(2010)을 수상했다. ( -알라딘의 작가소개에서)
나는 이승우의 이름을 알라딘에 넣고 검색해본다. 『생의 이면』을 살 수 있을까? 다행이다. 절판이나 품절 표시가 없다. 내가 이승우의 작품을 더 읽어봐야 겠다고 결심하게 된, 「칼」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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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객들은 모두 심약한 사람들이야. 누구보다 약하고 억눌린 게 많고 세상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이지.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감추기 위해 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야. 칼을 모을 만큼 강한 것이 아니라 칼을 수집해야 할 정도로 약한거지. 칼을 가지고 무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칼을 소지하는 거야‥‥‥. 다마스커스의 사장이 한 말이다. 칼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칼을 가지지 않고도 잘 살지만, 칼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들은 칼이라도 지녀야 겨우 살 수 있다고, 실제로 그 사람들은 칼을 가지고도 애초에 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잘 살지 못한다고 그는 말했다. (p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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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독점적으로 소유하려는 열정으로 들끓던 나는 항상 뜨거워져 있었고, 거의 매 순간 상처를 입었다. 상처는 대개 나의 뜨거움에서 비롯했다. 나는 늘 뜨거웠고, 뜨거움에 데었고, 허기졌고 안타까웠고 혼란스러웠고 불안했다. 아무리 애써도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애써도 닿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에 더 닿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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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앞의 말을 반복하고, 그 반복으로 다시 원인과 결과를 반복한다. 이런 문장이 책을 전체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어서 어느 한 문장이 좋아서 밑줄을 그을라 치면 그 다음 문장도, 또다시 그 다음 문장도 놓칠 수 없게 만들고, 그러다가 문득, 그냥 책 한권을 다 밑줄 그어야겠구나 싶어지는 거다. 그의 문장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 그의 문장은 '내가 이 글을 알기 때문에, 이 글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온전히 다가올 수 있는 매력'을 주는거다. 어떻게해야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감정을. 그러니까, 이런거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특히 프랑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기분.
너,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반복해서 읽는다고 내가 이해하는 만큼 이해할 수 있겠어? (으쓱)
어깨가 으쓱해진다. 짜릿하다. 내가 이승우를 읽는다. 이승우의 문장들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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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야 했느냐고 물으면, 그렇게 해야 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온다는 걸 안다. 그 순간이 언제나 너무 늦게 찾아온다는 것도.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대개 어떤 이유로든 그렇게 할 수 없게 된 순간이다. 그렇게 할 수 없게 된 순간에야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깨달음이다.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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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2010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가장 좋은 건 역시 이승우의 「칼」이었고, 그다음에 좋은건 이승우의 다른 작품들 '수상작가 자선작'인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와 「첫날」이었다.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그 다음으로 (나에게)좋은 작품은 '박성원'의 「하루」였다. 만약 내가 좀더 일찍 '권여선'의 「팔도기획」을 만났다면 이 작품을 좋아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에서 느껴야 할 감정을 이미 '허먼 멜빌'의「필경사 바틀비」로 느껴본 바 있다. '프리츠 오르트만'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가 '한강'의 「훈자」를 읽는 동안 겹쳐 떠오른다.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곰스크'와 '훈자'가 서로 닿아있는 느낌이랄까. 세계 곳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서로 다르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서로 닮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유독 이 단편집을 읽는 내내 들었다.
나는 이승우를 더 읽을 것이다. 이승우는 수상작가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이 '주류나 중심에 있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바 있는데, 나는 당분간은, 이승우를 내 소설읽기의 중심에 둘것이고, 주류에 있도록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