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젊은 친구, 젊은 잭, 젊은 5월 초하루 양반, 우리는 선택에 의해 우리 자신을 웃음거리로 넘긴 겁니다. 우리는 매춘부처럼 웃음을 파는 창부들이죠. 우린 창녀처럼 우리 자신을 잘 아니까요. 그저 열심히 일하는 고용인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를 고용한 사람들은 우릴 영원히 즐겁게 노는 존재라고 생각하죠. 우리의 일은 그들의 기쁨이 되어주니까, 그들은 우리의 일이 우리에게도 즐겁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을 놀이라고 여기는 그들의 생각과, 우리의 놀이를 일로 여기는 우리의 생각에는 언제나 깊은 간극이 있죠. (p.236)
'앤젤러 카터'의 『매직 토이숍』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 『써커스의 밤』은 책장에 꽂아두고도 읽기를 망설였었다. 그런데 읽기를 결심하고 나니 이제는 계속 읽을지를 망설이게 된다. 이 책은 나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더 재미있게 읽힐 소설인것 같았다. 나는 대체적으로 모든일에 무심한 편이지만,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놓인 자들에 대해 늘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나보다 이 소설을 더 의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인공 페버스의 등에 난 날개가 그녀가 말한 그대로 진짜인지, 혹은 월써가 생각하는 것 처럼 꾸며낸 거짓말인지, 그걸 계속 확인하고 싶은데 책장이 쉬이 넘어가질 않아서 이걸 다 읽을까 말까, 읽으면서도 고민했다. 다른 책을 너무 읽고 싶어서 이 책 읽기를 멈출까 하고 생각했다. 퇴근무렵, 계속 읽어, 말어 를 고민하다가 그래 조금만 더 읽어보자, 하고 이 책을 들고 지하철을 탔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어떤 습관들은 없어지고 어떤 습관들은 새로 생긴다. 나로 말할것 같으면, 최근에 길동역에서 내려 벤치에 잠깐 앉아있기, 같은 습관이 생겼다. 언제부터 이게 생긴건지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요즘 내가 가야 할 집이 있는 길동역에서 내리면 바로 계단을 올라 교통카드를 대는 대신, 내리자마자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곤 한다. 사람들이 다 올라갈때 까지 혹은 그 후에 다음차가 와서 또다른 많은 사람들을 토해낼때 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 어제도 그랬는데, 그건 내가 어제 길동역에서 내리기 전에 이 책 속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열다섯살 소녀의 노래. 자신의 어린 몸을 밤마다 품에 안는 남자와 함께 살지만, 그곳에서는 끼니마다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여기가 천국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소녀의, 어떤 뜻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부르는 노래.
칼은 칼집보다 오래가고
마음은 몸보다 오래가니까요.
또 사랑 그것이 식어야
마음도 쉴 수 있으니까요. (p.264)
사랑 그것이 식어야 마음도 쉴 수 있으니까요, 를 읽는 순간 나는 좀 쉬어야 겠다고 결심했는가 보다. 지하철이 빠져나간 지하철 역 벤치에 앉아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건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이라고. 그러니까 사랑이 식어야 마음이 쉴 수 있다는 것 같은 것. 이런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사실이고 진실이다. 사랑이 식어야 마음도 쉬는 건 너무나 당연해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인데, 뜻도 모르는채로 불렀던 소녀의 노래가 그 순간 나를 쉬고 싶게 했다. 나는 자꾸만 사랑이 식어야 마음이 쉴 수 있다는 문장을 떠올리고, 이 책을 계속 읽기로 결심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직 절반이나 남았지만.
나는 다리 위를 달리는 버스를 타는 것을 끔직하게 무서워하지만, 요즘은 한강을 보는게 좋아서 그 두려움을 꾹 참아가며 출근할 때 마을버스를 타고 강변역으로 간다. 강변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버스를 타고 올 때 봤던 한강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강변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잠실역에서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 교통카드에 백원이 더 찍힌다. 그렇지만 나는, 한강을 보는 것에 백원을 투자하는 것 쯤은 할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다리 위를 달리는 버스를 타는 두려움이 없어진 건 아니다. 이런것도 타이레놀을 먹고 나아졌으면 좋겠다.
잘잤어요?, 잘자요, 밥 먹었어요?, 무슨 책을 읽고 있나요?, 비가 와요, 보고 싶어요, 비밀이 생겼어요, 란 내가 좋아하는 말들이 더 다정하게 느껴지는 금요일이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털어 놓지 않으면 내가 미칠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그러기엔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말이라서, 나는 결국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며칠전부터 '동물원'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를 너무 듣고 싶어서 음원을 사려고 했는데 도무지 살 수가 없다. 다른 가수들이 부르는 그 노래는 많은데 동물원의 노래로는 음원이 없다. 나는 다른 가수들이 부르는 게 아니라 반드시 동물원이 부르는 걸로 듣고 싶은데. 어쨌든 그런 금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