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라 브라운'의 소설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때로는 연인처럼』인데, 여기에는 아주 친한 친구(물론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이 둘은 서로의 일과가 끝나면 만나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얘기하거나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인데, 어느날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여행을 떠나고 한 침대서 잠들게 되면서 이 둘은 더이상 친구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지만, 어쨌든 이 둘은 서로의 하루 일과가 끝난 후, 혹은 일과 중, 서로에게 연락을 하고 만나러 가고 하는 일들이 지독하게 자연스러운 친구사이였다.
때로 주변에서 어떤 연인들을 보고 '저 둘은 대체 왜 사귀는걸까' 싶어질 때가 있듯이 때로는 주변에서 '저 둘은 대체 왜 사귀지 않는걸까'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언젠가 여러명이 함께 모여 왁자지껄 수다를 떨고 모임이 끝났을 때, 그 다음날 친구 한명이 내게 전화를 걸어 '나는 너와 K 가 대체 왜 사귀지 않는지 모르겠어. 니네 그냥 사귀는 사이 같아.'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K 와 하루에도 몇번씩-특히 새벽에는 더- 전화를 하는 사이였다. 누가 전화를 하든, 또 누가 만나자고 하든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아주 자연스러운 사이. 내가 정신 사납다고 하면, 그는 모임자리에서도 전화를 걸어, 니 정신이 왜 사나운지 다 말해봐, 라고 말해주는 그런 친구였다. 니 정신이 사납다니까 내 정신이 사나워서 모임에 집중이 안돼, 라고 하면서. 나는 이 관계가 퍽 만족스러웠는데 그가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버리는 순간 내 핸드폰에 더이상 그의 전화번호는 남아 있질 않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이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리 장군의 고조부모에서 조부모 이야기로 넘어갈 즈음 책을 내려놓고 젭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받자 대뜸 물었다.
"뭐 하고 있어요?"
"밤에 불을 켜놓고 자는 것의 부작용에 대한 글을 읽고 있어요."
"밤에 불을 켜놓고 자는 거라니?"
"밤에 불을 켜놓고 자는 습관이 있는 아이는 결국 시력에 문제가 생긴대요. 눈이 충분히 쉬지 못해서 그럴 거라는 가설이 있어요."
"아니면 아이들이 원래 눈이 나쁘기 때무넹 불을 켜놓고 자려는 걸 거예요. 시력이 나쁜 것과 어둠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레바카가 물었다.
"흠." (pp.221)
밤 열시쯤, '이 시간에 내가 이 사람에게 전화해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사이,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뭐하냐고 물어도 되는 사이, 대뜸 묻는 질문에 거리낌없이 대답해 줄 수 있는 사이.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사이란 생각이 들어서 이 부분을 읽는데 마음이 포근해졌다. 이 둘은 함께 살지 않아도, 그러니까 늘 한침대에 누워 그날 하루의 일과를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완벽하지 않은가 싶어진거다. 여자는 쉰이 넘었다.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하다. 우울하기도 하다. 과거의 연인을 만나보기도 한다. 과거의 연인과 새롭게 시작할까 갈등하기도 한다. 나는 그녀가 과거의 연인을 다시 만나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왜 그녀는 젭을 염두에 두진 않을까 싶어졌다. 젭이 있는데. 과거의 연인조차도 젭은 자신의 경쟁자임을 알고 있는데, 왜 그녀는 모를까.
몇번의 파티나 혹은 일상사에서, 젭이 그녀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 하기도 하고 그녀의 사정을 이해해주기도 하는 그 과정들 속에서, 또 과거의 일들을 얘기하며 젊은시절의 그녀의 모습에 대한 기억조차도 잊지 않고 얘기하는 젭을 보면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젭이 그녀에게 사실은 그동안 당신을 사랑해왔다고 고백하진 않을까, 혹은 그녀가 '젭이 언제나 내 옆에 있었구나' 라는걸 깨닫고 그를 다시 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조마조마했다. 그렇지만 그 둘은 그저 내내 지금과 같은 관계로 유지될 것 같다. 그건 단순히 젭이 그녀의 시동생이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 새벽, 나는 내 잠꼬대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나는 코를 골다가도 (하하) 잠꼬대를 하다가도 스스로 깨곤 한다. 몇해전에도 어느 지방으로 놀러갔다가 내 잠꼬대 소리에 놀라서 화들짝 눈을 떴는데 마침 옆에서 자던 친구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너 지금 누구랑 얘기한거야?"
라고 물었더랬다. 아,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하고 챙피해서 우물쭈물 아무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때 말할걸 그랬다. 나는 신과 대화중이었다고. 너에게만 말하는데, 사실 나는 하늘에서 살던 천사야. 그런데 천사는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거든. 그래야 가벼운 몸으로 구름위를 깡총깡총 뛰어 다닐 수 있어서. 그런데 나는 하늘에서도 자꾸만 자꾸만 고기를 먹어서 무거워졌어. 너무 무거워져서 그만 땅위로 뚝- 떨어져 버린거야. 그러다 너를 만나 사랑하게 됐고, 그러니 지상에서 나는 내내 머물고 싶어서 계속 고기를 먹는 거란다. 내가 지금 고기를 그만 먹어서 가벼워져 버리면, 나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사가 되어야 하거든. 이 땅에 너를 두고 내가 혼자 갈 순 없지. 내가 고기를 먹는건, 정말이지, 고기를 좋아해서가 아니야. 지금 신이 찾아와서 다시 하늘로 올라오라고 설득하길래 그럴 수 없다고 대화중이었어.
아, 나는 왜 그때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왜 하고 싶은 말은 나중에야 생각이 날까?
앤 타일러의 『인생』은 재미있다. 나는 어느 부분에서는 쿡쿡대고 웃기도 했고 또 포근해지기도 했다가 설레이기도 했다가 신경질이 나기도 했다. 앤 타일러의 인생은 내가 읽었던 그녀의 다른 작품 『아마추어 메리지』보다도 조금 더 재미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지만 이 책은 현재 절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