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에 대해서만큼은 난 완전히 인질이나 다름없어, 라고 내가 사랑하는 작가 샐린저가 그의 단편집 『아홉가지 이야기』에서 말한바 있다. 나는 그렇지 라고 생각하며 그 문장에 밑줄을 그어뒀었다. 맞다. 정말 그렇다. 나는 바람부는 날에게 그만 불어, 라고 말할 수 없고 비 오는 날에게 이제 그만 멈춰, 라고 말할 수 없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에게 눈을 내려줘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설사 말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날들이 내 말을 들어주려나? 나는 그저 날씨가 날씨인대로 그저 그대로 그 날들을 살아가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러니까 샐린저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다. 날씨에 대해서만큼은 난 완전히 인질이나 다름없다. 물론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는 눈오는 날도 비오는 날도 좋아하질 않았었다. 눈오는 날은 길이 미끄러워 싫었고, 비가 오는 날 우산을 들고 걸어야 한다는 건 끔찍하게 여겨졌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사람들은 눈이 오는날 눈이 온다고 전화를 걸고, 비가 오는 날 비가 온다고 문자메세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런 연락들은 눈이 오는 날과 비가 오는 날을 나로 하여금, 특별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온 몸이 흠뻑 젖을 수 있는건 비가 오는 날이라야 가능하다. 비릿한 내음이 진동해서 섹스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비가 오는 날이라야 가능하다. 우산 하나를 쓰고 근사한 남자와 보도 블럭을 걸으며 물을 튀기는 것도 비오는 날이라야 가능하다. 비가 오는 날 나는, 남자와 하나의 우산을 함께 쓰고 걷기도 했고, 바지를 적시며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혼자 걸어가며 비를 맞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은 더욱더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좋다.
세장쯤 읽고 있던 다른 책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읽으려고 그저 미뤄두고 있었다. 그런데 책 제목이 하필이면 '일곱까지 색깔로 내리는 비' 였다. 그래, 하필이면 비였다. 그래서 그냥 목차만 보려고 했다. 목차만 봐야지. 목차를 보노라니, 으윽, 김이설과 황정은을 너무 읽고 싶어지는거다. 안돼, 중간에 이러지말고 읽던 책 다 읽고 읽자. 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의 목차를 보고 나니 목차를 보기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 김이설하고 황정은만 읽고 다시 돌아오자 싶었다. 김이설하고 황정은만, 김이설하고 황정은만.
어휴, 김이설은 나를 아프게 만들었다. 나는 김이설이 이 책에서 다룬 소재에 꽤 민감하고 절박하다. 나는 김이설을 읽으며 제발 제발 이라고 자꾸 되뇌었다. 두번쯤은 책을 덮기도 했다. 그만 읽고 싶기도 했고 얼른 다 읽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결국 남자는 비, 로 응징받지만 나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전부여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 남자 앞에서 울어야 했던 그 숱한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것들이 나를 답답하고 초조하게 했다. 안타깝게 했다.
비는 사람들에게 기쁨보다는 우울함과 슬픔을 그리고 쓸쓸함을 주는가보다. 황정은의 글은 외로웠다. 황정은의 글은 쓸쓸했다. 그런데 이토록 쓸쓸한 글이, 어처구니 없게도,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이런 문장이.
야노 씨.
보고 싶어요.
나 떨어지고 있어요.
무척 쓸쓸하답니다. (p.211)
나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읽었지만 아직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를 읽지 못했다. 나는 황정은의 보고 싶어요, 나 떨어지고 있어요, 무척 쓸쓸하답니다, 라는 문장들이 무척 좋아서,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책을 또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말들로 위로를 받을때가 있다. 그러니까 상대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닌데도 위로 받는 일. 황정은의 글을 읽기 전에 내가 기운을 낸 건 영화 『컨트롤러』에서 였다. 맷 데이먼과 천사가 나누는 짧은 대화.
자신이 관리하는 사람에게 감정을 개입하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되지만 감정이 없는 건 아냐.
어떤이는 더 많구요.
그 천사는 자신이 하는 일에 이게 정말 옳은일일까, 하는 의심을 품었고 맷 데이먼을 도와주려고 한다. 맷 데이먼은 그 천사가 다른 천사들보다 감정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준다. 아, 나는 이 대화가 정말 너무 좋았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내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건(나는 이 영화가 좋을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맷 데이먼이 비오는 날 사랑하는 여자를 찾기 위해 뛰기 때문이다. 비오는 날, 그가, 뛴다, 맹렬하게, 열심히. 비오는 날 뛰는 남자라니! 근사하잖아! 게다가 그가 맷 데이먼이라니!!
자, 다시 소설집 얘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김이설과 황정은만 읽고 나서 다시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냥 내처 다 읽기로 한다. 김이설의 작품인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과 『나쁜 피』는 다 읽어봤고, 황정은의 작품 『백의 그림자』도 읽어봤지만 다른 작가들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이다. 그런데 특히 김 숨의 글이 좋다. 비가 오는 날, 발치하기 위해 치과에서 기다리는 네번째 순서의 남자, 나는 이 글이 무척 좋아서 김 숨을 검색해본다. 아, 얼마전에 경향신문 신간코너에서 본 『간과 쓸개』가 그녀의 작품이던가.
이 책에는 일곱편의 비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 비들 중 어느 하나 내가 생각하거나 기대한 비는 없었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비가 있었다.
며칠전 만난 친구가 자신의 친구 얘기를 해줬다. 십년이상 짝사랑 하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는 그 여자를 '친구'로만 대했다고 했다. '친구'란 단어는 때때로 슬픈 단어다.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저 연정을 품은채로 '친구'로 그를 만나고 있었는데, 오, 그 둘이 결혼 날짜를 잡았다고 했다. 나는 매운 닭찜을 먹으며 정말 잘되었다고,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면 정말 그 사람 앞에 서게 되는 모양이라고 축하해줬다. 웃었다. 그런 일들은 그러니까 좀 기쁘다. 십년 이상 걸린게 좀 짜증나지만..
일요일이 가고 있고 봄날이 가고 있다. 그렇게 봄밤도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