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파 리는,
스치듯 소개받았던 옆집 남자를 마트에서 다시 재회하게 된다. 그녀가 그를 본 것 보다 그가 그녀를 본 것이 먼저.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피파 리.
피파 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자신을 부른 남자를 마주 본다. 그는 무려 키에누 리브스! 그가 피파 리, 하고 부르는게 너무 질투가 나서 나는 그 순간 내 이름이 피파 리 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피파 리의 '리'는 Lee 로 쓰던데, 그럼 나도 '리'는 같아. 나도 Lee 를 쓴단 말야. 그때 마트에서 만난게 피파가 아니라 나라면, 키에누 리브스는 나를 불러줬을까? 다락방 리, 하고?
아, 피파 리, 부럽습니다. 키에누 리브스라뇨!
이 영화의 원제는, 그리고 몰랐다가 오늘 검색해서 알게 된건데 이 영화의 원작 제목은, 『The Private Lives of Pippa Lee』이다.
물론 그녀에게 로맨스가 찾아오지만, 그것은 삶을 구성하는, 그리고 그녀를 완성하는 아주 많은 것들 중 '일부'였을 뿐이지 '전부'는 아니다. 로맨스가 아무리 좋다한들 그 누구도 스물네시간을, 삼백육십오일을 로맨스에 푹 빠진채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이 영화가 재미있으며, 로맨스는 아주 작은 부분만 구성되어져 있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책이 있는 줄 알았다면 책을 먼저 봤을텐데. 아 어쩌지? 이 책을 읽어볼까, 말까?
- 만신창이가 되서 며칠을 보냈더니 주말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책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방안의 불을 끄고 멀뚱멀뚱 천장을, 그리고 벽을 쳐다봤다. 그러기를 수 시간, 새벽이 되어버렸다. 이 새벽에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나는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새벽은 다른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 깨어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스마트폰에서 알라딘에 들어가 월요일로 가는 새벽, 쓸 생각도 없었던 40자평을 썼다. 그 40자평들의 이유는 다만, '나는 지금 깨어있어요' 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 혼자 속으로만 생각한 일, 다른 사람이 알 리 없지. 그래, 다시 잠을 청하자 싶어 누워서 또다시 천장을 보는데, 어라, 핸드폰의 벨이 울린다. 지금 이 시간에 전화가 오는건가? 핸드폰을 집어 화면을 보니 '국제 전화입니다' 라는 문구와 함께 낯선 번호가 뜬다. 이걸 받아도 되는걸까? 늘상 스팸문자로 오던 '정품 비아그라 팝니다' 하는 전화는 아닐까? 그럼 뭐, 비아그라 판매자랑 이야기나 할까 싶어 여보세요 하고 받았는데,
"다락방님!"
한다. 어어, 이 목소리는! 내가 아는 사람이다! 와우! 게다가 그 친구가 말한다. 알라딘 들어왔다가 막 40자평 남긴거 보고 이여자 깨어있구나 싶어 네이트온 들어갔는데 없더라구요. 그래서 전화했어요! 라고 한다. 맙소사! 내가 깨어있다고 나름대로 말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응답해줬다. 그것도 무려 '프랑스 파리' 에서!!!! 23분간의 통화를 마치고 그 친구는 내게 말했다.
"다 보고 있어요. 프랑스 파리에서도."
아, 당신은 그 순간 나의 구원이었어요. 그 전에도 종종 그랬듯이.
- 그리고 이 아이.
이 아이는 쌍커풀도 없는데 눈이 아주 크다. 이 아이는 목소리도 크다. 이 아이는 잘 웃고, 웃을 때 이 아이는 눈도 함께 웃는다. 이 아이는 손이 따뜻하다. 이 아이는 그 따뜻하고 작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도 한다. 이 아이는 새벽에 깨어 말똥말똥 하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 놀아주자 한껏 웃는다. 이 아이는 내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운다. 나는 자리를 뜨려다가 다시 이 아이의 옆으로 가 아이와 눈을 맞춰야 한다. 언니, 내가 얘 시야를 가릴테니 그때 나가, 라는 동생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자리를 뜰 수 있었다. 그렇다. 이 아이는 나를 좋아한다! 나를, 나를 좋아한다! 눈에 보이면 웃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운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사랑의 표현이 있을까!
예쁜 아이, 내 조카. 나도 이 아이를 좋아한다. 많이, 아주 많이.
|
<< 펼친 부분 접기 <<
언젠가 쥬드님이 썼던 이 책의 리뷰에 나와있던 문장을, 나는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었다. 우리는 조심스러웠고, 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어, 라는 그 문장을. 나는 이 책을 집어 들고 맨 마지막 장을 펼친다. 그 문장이 어디 있는지쯤은 알고 있으니까.
It might have been your child but this was not the case. We had been careful, and you had left nothing behind. (p.333)
줌파 라히리가 써낸 가장 서늘한 문장이 아닐까. 그래서 가장 근사한. 아 물론 더한 문장이 있다해도 나는 알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은 건 아니고, 그저 번역본을 읽다가 마음에 들었던 맨 마지막 문장을 찾은것 뿐이니까. 나는 한장, 앞장을 넘겨본다. 그런데 거기엔 이런 문장이 있다.
I went along with all of it, chose a red Benarasi to wear. But the whole time I was thinking of you, fearful of the mistake I was making. (p.331)
번역본에서 이 문장이 어떻게 번역되어 있는지 찾아 옮기고 싶은데 지금 번역본이 내게 없다. 그시간 전부 너를 생각했다고 말하는 헤마가 또 이렇게 얘기한다.
On the crowded street, walking back to my parents' flat off Triangular Park, I searched foolishly for your face. (p.331)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누구나, 거리에서 아니 어디에서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기를 원할것이다. 어리석게도 그 얼굴을 찾으려 할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여기에, 이 시간에 와있을 리 없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나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찾기를 희망한다. 던킨 도넛츠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을라치면, 나는 그 사람이 혹시 도넛츠를 사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씨네큐브에 들어가 예매한 표를 바꿀라치면, 어쩌면 그 사람도 영화를 보러 오진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바보처럼.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닮은 사람을 간혹 본다. 그것은 정말 닮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만들어낸 닮은 사람일 것이다. 그쯤은 나도 알고 있다.
- 영화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에서 젊은 피파 리는, 자신이 사랑에 빠지게 된 남자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I like your face. I like your voice.
사랑을 이야기하는 문장은 어려울 필요가 없다. 장황하게 만들 필요도 없다. 쉽고 단순해도 충분하다. 당신의 얼굴이 좋다고 말하고, 당신의 목소리가 좋다고 말하는데 더 뭐가 필요할까. 물론 나는, 조금 더 섬세하게 표현할 수는 있다. 이렇게.
당신이 journey 를 발음했을 때, 귀가 녹아버리는 줄 알았어요. 심장이 따뜻해졌죠. 당신의 journey 란 발음은 완벽해요. 난 여태껏 단 한번도 journey 를 그렇게 발음했던 사람을 만난적이 없어요.
- 앗. 만신창이가 됐던 구질구질한 그 숱한 날들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 결국 또 말랑말랑하게 쓰고 말았다. 나란 여자는 정말 어쩔 수가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