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너져 내리고 그들은 반짝반짝 빛이나고-
나에게 당신은 그저 예술가로만.
올해의 이것저것
아, 나는 올 한해 에피톤 프로젝트의 『눈을 뜨면』, 『이화동』, 『오늘』, 『그대는 어디에』, 『나는 그사람이 아프다』등을 들으면서 얼마나 쩔어(!)있었던가. 대체 갑자기 튀어나온 에피튼 프로젝트, 그는 누구인가, 왜 이다지도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가, 왜 나를 후벼파는가, 기타등등의 절절한 감정으로 그의 노래를 얼마나 장시간 들어왔던가! 올해의 음반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에피톤 프로젝트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랬는데,
나는 어제 에피톤의 나이를 듣고야 만다. 그는,
스물여섯.
스물여섯.
26세.
애기네. 완전 애기. 스물 여섯이라니. 아니, 스물 여섯이 이화동 어쩌고 저쩌고 ..노래를 한거야? 스물 여섯 애기 피톤이가, '내가 어떻게 해야 그대를 잊을 수 있을까? 우리 헤어지게 된 날부터 내가 여기 살았었고 그대가 내게 살았었던 날들' 이라고 하고, '그렇게도 사랑했었던 너의 얼굴, 맑은 눈빛 빛나던 웃음까지, 살아있다 저기 저 신호등건너, 또 손흔들며 보조개 짓던 미소까지 조심히 건너 내게 당부하던 입모양까지' 라고 하며, '아름답게 눈이 부시던 그 해 오월 햇살, 푸르게 빛나던 나뭇잎까지 혹시 잊어버렸었니, 우리 함께 했던 날들 어떻게 잊겠니' 라고 한거야? 스물 여섯, 베이비 피톤이가, '낮은 한숨이 늘었어 이유 없는 일에 눈물을 흘리고 때론 당연한 하루가 가끔 너무 속상해서' 라고 하고, '술 한잔 했어요 그대 보고 싶은 맘에 또 울컥했어요' 라고 한거야?
그런데 나는 삼십대 중반에 이화동을 처음 가보고, 거기 가서는 여기가 피톤씨의 추억이 서려있는 그 이화동이라는 데구나, 했던거야? 이렇게 감성에 쩌는 남자라면 나는 사귀지 않겠어요, 라는 미친 리뷰를 썼던거야?
나는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 이라는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도 않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 나잇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무살이 열살과 똑같은 사고를 해서는 안되고, 서른다섯이 열다섯처럼 행동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잘못을 반성하고, 현명해지고 싶어하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줄 아는 능력들이 켜켜이 쌓여가는게 나이를 먹어간다는 거고, 그렇지 못했을 때 우리는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며 자기 반성을 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는 말 자체도 나는 억지로 만들어 낸 말 같다. 그건 국경도 나이도 없는게 아니라, 국경이 있고 나이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스물여덟이고 상대가 열다섯이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걸 어쩔 수 없는거고, 내가 여기 있고 그가 아프리카에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거지, 그것들이 모두 '없기' 때문은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스물 여섯이면, 스물 여섯에 맞는 가사라는게, 그런 음악이라는 게 존재할거라고 생각을 했고,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를 들었을 때는, 이 남자는 삼십대 중반쯤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거다. 6-7년에 걸친 장시간의 사랑을 했고, 헤어졌으며, 삼십대 중반이나 후반의 노총각일 거라고, 나는 그리 내 마음대로 생각한거다. 그래서 그가 스물 여섯이라는 말을 듣고 노래가 어릴거야, 유치할거야, 그렇겠지, 라고 생각하고 어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에피톤의 노래들을 다시 들었다.
이화동 을
한숨이 늘었어 를
오늘 을
그대는 어디에 를
눈을 뜨면 을
나는 그사람이 아프다 를.
그런데,
변함없이 좋다. 무척 좋다. 내가 처음 음악을 듣고 느꼈던 그 느낌들을 여전히 고스란히 준다. 가사만 좋은게 아니라 음악도 좋다. 목소리도 좋다. 그가 스물여섯이든 어쨌든 그의 노래는 여전히 그의 노래였다. 아무것도 변하질 않았다. 스물 여섯이 만든 노래에 나는 울다가 웃었다가 멍때리다가 했다니, 무척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걸 알고 듣든 모르고 듣든, 아무것도 달라지질 않는다.
여전히, 에피톤 프로젝트는, 나에게는, 올해의 앨범일 수 밖에 없다. 피톤이 베이비, 베이비든 올드보이든, 어쨌든 이런 음악이라면 땡큐야. 사실은 애기 피톤, 당신이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당신이 스물 여섯이라 다행이에요. 마흔 여섯이나 쉰 여섯 보다는 스물 여섯쪽이 조금 더 호감가네요. 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