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게 2010년 최고의 단편이 무어냐고 물으면 나는 '한창훈'의 『밤눈』이라고 답하려고 했다. 아니면 최소한 『올 라인 네코』라도. 정말 그러려고 했다. 내가 이 책, '줌파 라히리'의 『그저 좋은 사람』을 읽지 않았다면. 

 

 

 

 

 

 

 

 

하아- 세상에 어떻게 이런 단편이 있을까! 나는 이 단편집의 단편 『지옥-천국』에 그만, 정신줄을 놓고야 만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 두번째 실린 단편 『지옥-천국』을 한번 다시 읽었다. 그리고 박박 정신없이 밑줄을 그었다. 밑줄 긋지 않을 부분이 없었다. 여자가 우연히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에 대한 연정을 품게 되고, 그러나 될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곁에 두려하고, 그 남자에게 여자가 생긴걸 알고는 표독스럽게 변하고, 그가 깨지길 원하고,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남자의 여자와 '같은 처지'가 되고야마는 그 일들이 너무나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녀가 자신의 옷이 풀어지지 않도록 온 집안의 옷핀을 다 모아서 입고 있던 사리에다 채웠었다는 과거 회상장면에서는, 아이구, 히유, 그녀의 옆집 여자에게 축복을! 

자, 그는 그녀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는 엄마에게 처음이자 유일한, 순전한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태어난 것도 엄마를 기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아빠와 결혼했다는 일종의 증거물이었고, 배운 대로 사는 삶이 낳은 예상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프라납 삼촌은 달랐다. 삼촌은 엄마의 삶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이고 기쁨이었다. (p.85) 

 
   

그런데 이제 그는 그녀를 서운하게 혹은 화나게 혹은 신경질나게 만든다. 

   
  엄마는 삼촌의 연애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데보라가 프라납 삼촌을 차버리고 떠나서 상처받은 삼촌이 후회하며 돌아오길 바랐다. (p.88)  
   
 
   
  "그 여자는 결국 프라납을 버릴 거야." 나중에 엄마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라납은 인생을 내던지는 거라고." (p.92)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어떤 표정인지 알겠고, 그녀가 이런 말을 하면서 지을 법한 표정을 나는어쩌면 그대로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단편, 『지옥-천국』은 압도적으로 최고이며, 다른 단편들도 매우 좋다. 한 편 한 편 도무지 버릴 것이 없다. 대체 줌파 라히리는 어쩌면 이렇게 섬세하게 글을 써낼 수 있을까. 내 친구가 좋아한다는 마지막 단편, 이 단편에도 아주 보석 같은 문장들이 나온다. 너무나 서늘해서 만질 수 없는 보석 같은 문장들. 

   
 

"그러면 왜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야?" 
그녀는 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진실이었다. "여러 가지 일들을 바로 잡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는 더이상 묻지 않았다.
(p.378) 

 
   

여러 가지 일들을 바로 잡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하는 여자의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때때로 우리는 가끔 그런 충동에 휩싸이지 않는가. 그 선택을 '좋아서' 하는게 아니라 '그 편이 모든게 정리되고 깔끔하니까' 선택해 버리게 되는. 결혼이라고 왜 안그렇겠는가.  

나의 이 단편집에는 포스트잇이 아주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렇게 붙여놓고 또 밑줄도 그어놓고서는, 나는 이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간혹 펼쳐 볼 것 같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는 결말 따위는 이 책에 없다. 또한, 그 식구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고 다시 행복해졌습니다, 하는 결말도 이 책 안에 없다. 그러니까 이 책에 동화 같은 해피엔드는 존재하지 않지만, 서늘함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완벽한 단편집이다. 

 

며칠전에 민음사에서 나온 피츠제럴드 단편선2 를 샀다. 

 

 

책의 목차를 보니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펭귄출판사의 단편과 목록들이 겹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샀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 작가이니까. 피츠제럴드와 로맹가리는 나에게 감히 접근할 수 조차 없는 단편을 쓰는 작가들이다. 피츠제럴드의 「컷 글라스 보울」은 정말 최고다! 

 

 

 

 

당장 읽고 싶어서 이 단편집을 샀지만, 그러나 나는 이 단편집을 읽기를 내년으로 미뤘다. 올해에는 그저 '줌파 라히리'에게 일등을 주고, 순전히 그녀를 경배하기로 했으니까. 피츠제럴드를 읽으면 그녀에게 일등을 줄 수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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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꺼이 숭배하리!
    from 유리동물원 2010-12-17 15:30 
    내가 만약 작가라면 줌파 라히리처럼 글을 쓰려고 안간힘을 쓸 것 같다. 꼭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고 그녀의 단어 하나하나를, 문장 한 줄 한 줄을, 그 사이의 행간들을, 글자가 쓰여있지 않은 페이지의 여백을 곱씹고 또 곱씹어 봤을 것 같다. 줌파 라히리는 내가 아는 생존작가중에 최고다. 적어도 나에게는. 요즘 전자책이 큰 이슈가 되고 있는데, 줌파 라히리를 전자책으로 읽는다는 게 나로써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종이책이 있고
 
 
비로그인 2010-12-17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어이 지르게 만드시는군요! 저 영어판 원본 사러 갑니다.

--지르고 왔습니다. 그런데 영어 원서가 더 싸요!

다락방 2010-12-17 10:17   좋아요 0 | URL
너무 좋지 않아요, Jude님?

여러 가지 일들을 바로 잡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이 문장이 정말 미치게 좋아요! 음, 저도 원서로 살까요? 저는 원서 사봤자 읽지도 못하는데 왜 자꾸 원서를 사고 싶죠? 미친허영심 ㅠㅠ

비로그인 2010-12-17 10:24   좋아요 0 | URL
제가 읽고 저 부분 다락방님 서재에 낙서해 둘게요. 제가 할게요. 그러니 다락방님은 제게 말만 해요. 하지만 아마도 한 권을 서재에 꽂아두는 것도 다락방님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것 같아요.

다락방 2010-12-17 14:00   좋아요 0 | URL
저도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과 이 책의 원서 장바구니에 넣어뒀어요. 20일에 지를래요. 몇몇 표현들을 찾아보고 싶을것 같아요. 한번도 찾아본적은 없지만. 단지 꽂아둔다는데 의미를 두고.. ( '')

무스탕 2010-12-1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 라히리라는 이름을 이 전에 들은것 같은데 어느 책이었는지 기억이 안나요 --a
이 책 '그저 좋은 사람' 이었나..?;;
하여간 오늘 눈보라를 뚫고 출근해서 민원님들은 안오시고 이러고 있습니다. ^^

다락방 2010-12-17 14:01   좋아요 0 | URL
어쩌면 무스탕님, 제가 [이름 뒤에 숨은 사랑] 페이퍼를 썼을 때 보셨을수도 있구요,
혹은
이 [그저 좋은 사람]을 무스탕님이 제게 선물해주셨기 때문에 이름이 익숙하신 걸 수도 있어요.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

무스탕 2010-12-17 14:10   좋아요 0 | URL
허걱-!! 그랬던 과거가 있었단 말??
이라 생각해 찾아보니 딱 1년하고도 며칠전에 그랬네요..;;;
많이 퍼주는 사람도 아니구만 왜 이런걸 잊어버리고 사는건지 참말루..
하여간 즐독 하셨다니 저도 즐거워요 ^^

암만해도 '이름 뒤에 숨은 사랑' 이 제 기억을 헷갈리게 한 원인같아요. ㅎ

다락방 2010-12-17 17:04   좋아요 0 | URL
네, 두 책 다 좋지만 [그저 좋은 사람]쪽이 더 좋으네요. 단편 [지옥-천국]때문에요.
아, 정말 좋은책이에요. 흑흑. 감동 ㅠㅠ

레와 2010-12-17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못참겠다. 당장 질러야지!!

원서가 많이 어려울까. 쌩뚱맞게 나도 원서도 사고 싶네..ㅎㅎ;;

다락방 2010-12-17 14:01   좋아요 0 | URL
올리브 키터리지도 원서 사려다가 완전 꾹 참고 있어요. ㅎㅎ

이 책 정말 좋아요, 레와님. 정말요!

섬사이 2010-12-17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이러면 안돼요.
이런 유혹은 견디기 힘들어요.

다락방 2010-12-17 14:01   좋아요 0 | URL
섬사이님,
이 책이라면,
견디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노아 2010-12-17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님 덕분에 눈여겨본 책이에요. 저는 이름 뒤에 숨은 사랑만 갖고 있는데 아직 보진 못했어요.
이 작가는 사진도 엄청 매력적이더라고요.^^

다락방 2010-12-17 14:02   좋아요 0 | URL
[이름 뒤에 숨은 사랑]도 참 좋거든요! 그런데 이 [그저 좋은 사람]도 정말 좋아요. [지옥-천국]은 예술의 경지입니다. 감동 ㅠㅠ

turnleft 2010-12-1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돌아가면 이 책을 읽어야겠군요. 저번에 운 좋게 hardcover 를 $8에 사 둔게 있어서.. :)

다락방 2010-12-17 14:03   좋아요 0 | URL
으응? 아직 안돌아갔어요, 턴님? ㅎㅎ (농담농담)

음, 그런데요 턴님, 이 책은 확실하게 제 취향인지라 턴님께도 완벽할런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심지어 저는 좋아하는 남자한테 선물하고 싶어지더라구요. 씨익 :)

turnleft 2010-12-17 14:08   좋아요 0 | URL
내가 다락방님한테 신고도 안 하고 돌아갈리가 s(-_-)z

느낌엔 줌파 라히리는 저한테도 잘 맞을 것 같아요 :)
물론 저는 지금 읽고 있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같은 책에 더 열광하는 타입이지만;;

다락방 2010-12-17 17:05   좋아요 0 | URL
ㅎㅎ 신고하고 들어가는거, 잊으면 안돼요, 턴님!!

줌파 라히리가 턴님께도 잘 맞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저 기분이 좀 좋을것 같아요!
:)

깐따삐야 2010-12-1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있어요. 안 사도 된다는 안도감.^^ 지난번 책 정리할 때 살아남은 책들 중 하나에요. 저 역시 이 책이 좋았지만 다락방님 글을 보니 더 '잘'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다락방 2010-12-17 17:06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은 이 책을 분명 좋아했을 것 같아요! 깐따삐야님이라면 첫번째 단편도 마구 좋아했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지옥-천국]은 다시 읽어도 전혀 질리지 않는 단편이에요, 깐따삐야님. :)

... 2010-12-1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츠제랄드도 나와보라고 해요 (다 붙어봐!) 줌파 라히리가 무찌를 거예요^^ 제가 심판이라면 세상의 단편소설가 전부 덤벼봐, 뭐 이래도 줌파 라히리가 .... (안톤 체홉님만 기권을 하셔준다면, 하핫--;;)

다락방님 우리나라에는 <축복받은 집>으로 번역되었던데, 그 중에 [질병의 통역사 Interpreter of Maladies]도 꼭 읽어보세요. 거의 [지옥-천국 Hell-Heaven]급이예요.

다락방 2010-12-17 17:09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물론 줌파 라히리가 좋지만, 정말 아름답고 완벽하지만, 그래도 피츠제럴드하고 로맹가리한테는 안돼요. 피츠제럴드는 그 누구도 따를수가 없어요. [컷 글라스 보울] 읽어봤어요, 브론테님? 그 소설은 단편의 으뜸이에요. 최고에요, 최고. 전 피츠제럴드 같은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단편이 정말이지 모두 뛰어나요. 최고에요, 최고. 저는 안톤 체홉보다는 피츠제럴드의 단편이 훨씬 더 마음에 들더라구요. 그리고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 단편집은 진짜 감동 ㅠㅠ

저 [축복받은 집] 장바구니에 넣어뒀어요. 20일경에 주문할거에요. 아흑. 질병의 통역사라구요? 아 궁금해요. 읽어보고 싶어요. 줌파 라히리 같은 글을 쓰고싶어요, 브론테님! 정리하자면 저는, 도무지 피츠제럴드와 로맹 가리같은 단편을 쓸 욕심은 낼 수도 없고, 제가 쓰게 된다면 정말 줌파 라히리처럼 쓰고 싶어요. 딱, 제가 추구하는 바에요.

poptrash 2010-12-1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집을 나설 때, 책을 안 읽은지 너무 오래되어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저 책을 잠깐 집었더랬어요. 아직도 안 읽었거든요. 그러다 그냥, 에이 책은 무슨 책, 하고 내려 놓았는데.

다락방 2010-12-17 17:42   좋아요 0 | URL
다시 집어들어요, 얼른!!
후회하지 않을거라구요!!

웽스북스 2010-12-18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다락방님이 이 책 중에서 지옥-천국을 제일 좋아해서 너무 좋았어요!!!!
그 단편의 마지막 장면을 읽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보이지만 기실 무너지고, 허물어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녀의 감각은 정말 최고에요! 저도 <축복받은 집> 볼래요 ㅎㅎ

다락방 2010-12-20 09:12   좋아요 0 | URL
지옥 천국이 가장 좋았지만 다른 작품들도 좋았죠. 맨 마지막 작품의 결말은 영화 [업클로즈 앤 퍼스널]을 생각나게 하더라구요. 물론, 저는 그 영화보다는 이 책 쪽이 이백배쯤 더 좋았지만 말예요.

저도 축복받은 집 장바구니에 넣어놨어요! 결제를 오늘하느냐, 1일에 하느냐를 조금 고민해봐야 겠지만 말예요.

건조기후 2010-12-18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책 지르려고(읽는 게 아니라;) 들어왔다가 다락방님 덕분에 [그저 좋은 사람]도 냉큼.ㅎ
[그저 좋은 사람]이랑 나란히 땡스투된 다른 거(뭘까요?) 하나도 제가 드린 거에요! 헤헤 (푼돈 갖고 자랑하기)
오. 제 서재 프로필 소개글(?)도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 나오는 문장.. ^^

다락방 2010-12-20 09:13   좋아요 0 | URL
저도 언제나 '지르'지 '읽'지는 않고 있어요. 다섯권 지르고 한권읽기, 이른바5-1법칙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랄까요. ㅠㅠ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 진짜 완전 짱이지 않아요? 대박이에요. 흑흑.
그나저나 땡스투라니, 감사드려요. 차곡차곡 모아서 또 책을 질러야겠군요!

오랜만에 오셔서 댓글이라니, 아, 정말 건조기후님은 저를 진짜 좋아하시나봐요!! ㅎㅎ

2010-12-20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0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