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었고, 나는 슬리퍼를 신고 후드티를 입고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우리는 영화를 봤다. 그리고 삼청동을 걸었다. 삼청동의 유명한 떡볶이집에 가자고 친구는 말했는데, 그 떡볶이집은 줄이 너무 길었다. 친구는 기다렸다 먹고 가자고 했지만 나는 맛집앞에 줄 서서 기다리는 건 딱 질색. 아, 싫다고 말하고 우리는 삼청동을 걸었다. 그리고 (아마도)삼청동에 있는, 그러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극장으로 들어갔는데, 그 곳에서는 어떤 전시를 하는 중이었고, 어떤 종류의 책들을 팔기도 했다. 어어, 여긴 뭐지 하며 그 책들 사이를 오고가다가 나는 익숙한 이름이 들어가 있는 인터뷰집을 발견한다.
어어, 삐리리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거 사서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나는 충동적으로 그 인터뷰집을 들고 카운터로 가 계산을 한다. 그리고는 그곳에 함께 갔던 친구와 극장을 나와서 맥주를 마시러 들어갔다. 우리는 맥주를 한잔씩 마시고 나는 맥주를 마시다가 포장되어 있는 그 인터뷰집을 뜯어 본다. 아 궁금해. 그리고 거기에 실린 이름들을 본다. 그 이름들 속에
'이아립'
이 있었다. 그 인터뷰집에 실린 사람 모두가 남자들이어서 나는 그때도 당연히 이아립이 남자인 줄 알았다. 한번 훑어보기만 하고 다시 뜯었던 비닐에 넣어둔 뒤 친구랑 맥주를 마저 마시고 헤어져 집으로 가는데, 어라, 나의 삐리리가 맥주 한잔 할래? 하고 청해온다. 나는 알았다고 말하고 그 시간에 허겁지겁 뛰어간다. 이 인터뷰집을 삐리리의 집으로 보낼까, 아니면 언젠가 만나는 날 줄까 혼자 생각해두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 오늘 연락한걸까! 몹시 신나서 약속장소로 그 밤에 이동하다가 문득 나는 내가 슬리퍼 차림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 이런 제길. 다행히 내가 먼저 도착한다. 나는 잽싸게 맥주집에 들어가서 앉아서 기다린다. 슬리퍼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맥주 다 마시고 나갈 때 어쩔 수 없이 슬리퍼를 보이고야 마는 상황. 엄마 슬리펀데;;
어쨌든, 이거 너 주려고 샀는데 다행이야, 여기에 니가 좋아하는 사람 있어, 하고 말하고 인터뷰집을 건네줄 수 있어서, 아 이 인터뷰집과, 나와, 삐리리는 삼각형으로 연결 되어 있을거라고 뭔가 생각한 하루였는데,
그리고 가을.
나는 한 친구로부터 『버스, 정류장』시디를 선물받는다. 이 영화를 본 적도 없고 음악 역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 루시드 폴이구나, 하면서 며칠 동안 듣지 못하고 있다가 엊그제, 아이팟에 담았고, 폴더에 따로 담기는 노래가 있길래 이게 뭔가 싶어 봤더니 거기에는
이아립
이란 이름이 있었다.
아, 이아립, 이아립이 가수였어? 가수구나!
앨범에 실린 루시드 폴의 『그대 손으로』를 들으며 이 익숙한 곡이 이 영화의 음악이구나, 하며 좋다고 듣다가
아, 이아립을 들어볼까, 하고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를 재생한다.
아, 이아립이 게다가 여자사람 이었어?
목소리도 듣기에 좋고 노래는 듣기에 더 좋다.
그리고 이런 가사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홀로 버려진 길 위에서, 견딜 수 없이 울고 싶은 이유를
나도 몰래 사랑하는 까닭을,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조금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
왜 하필 그대를 만난걸까, 이제는 나는 또 어디를 보면서 가야할까
목소리도, 가사도, 노래도 그리고 나의 기억까지도 모두다 아름다운 노래. 이 노래로 나는 오늘 하루를 마감하려고 한다. 퇴근까지는 한시간이 남았고, 이제 남을 일을 좀 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