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불현듯 생각한건데, 내가 고단한 일상을 사는 건 스스로 삽질을 잘해서가 아닌가 싶어졌다. 그러니까 어제도 평소와 다름없이 술을 마시고(응?) 강남역에서 열차를 탔다. 술은 많이 안마셨다. 그래서 취하지도 않았다, 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너무 피곤해서 (월요일도 술, 화요일도 술...) 눈을 감았다. 이제 잠실쯤 됐으려나 싶어 눈을 떴는데 오, 눈앞에 사당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 패닉에 빠졌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본다. 여전히 사당이다. 대체 나에게 무슨일이 일어난건가. 나는 후다닥 내린다.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당연히 집까지 도착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렸고, 집에 도착하니 기진맥진. 아 젠장. 힘들어 ㅠㅠ
집에 도착해서 아빠가 받아둔 알라딘 택배박스를 뜯어 밀레니엄 여섯권을 피아노 위에 쌓아두고, 시집을 펼쳐 들었다. 난 시집안의 시들을 천천히 음미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래서 시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시집을 주문해 두고서도, 어제 친구가 어떤 시집을 샀냐는 말에 제목이 기억 나질 않아 말해주질 못했다. 시인이 누구인지도, 시집의 제목도 생각이 나질 않아서.. 무슨 생각으로 주문을 하는걸까, 나는?
어쨌든 이 시집을 어제 '훑어본' 결과 그다지 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는 거다. 내가 산 시집이라고 해봤자 몇 권 안되는데, 만족도가 가장 큰 시집은 '박연준'의 시집이었다.
물론, 이 시집 안에도 몇개의 눈에 띄는 시가 있다.
오후
빛줄기에서 떨어져
멀어져 ‥‥‥ 가는
가는,
햇살
오후의 느낌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낯익은 그림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그러다
당신의 맘속에
자리를 틀겠어요
아, 당신의 맘속에 자리를 틀겠어요, 라고 말하면 자리가 틀어지나. 이 시 때문에 이 시집을 사기로 결정했었다. moon 님이 페이퍼에 이 시를 올려주셔서.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라니. 그러다 당신의 맘속에 자리를 틀겠어요, 라니. 정말 후아- 스럽다. 또,
사랑이 익다
꽃들은 수증기처럼 피어올랐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버리고
우린 아늑한 저녁을 위해 무작정 길을 걸었다
아! 사랑이 익어갈 때 무작정 길을 걸으면 아늑한 저녁을 만날 수 있구나. 아늑한 저녁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무작정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가능하구나. 사랑이 익어갈때 쯤엔. 후아-
오늘 아침. 여느때와 다름없이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데 정말이지 피곤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몇개의 노래들을 들으며 잠실에서 눈떠야지 생각하고 있다가, 그런데 여기는 어디쯤일까 하고 잠깐, 눈을 떴는데!
오! 눈 앞에 그가 있었다. 그로 말하자면, 고등학생이다. 교복을 입고 있다. 아마 1학년이나 2학년쯤 된 것 같다. 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오늘 벌써 세번째 만난다. 아니, 만난다고 하면 안되지, 나 혼자 '봤다'. 그 학생이 버스 안에서 유독 눈에 띈 건 내가 아는 누군가를 엄청 닮아서인데, 나는 그를 닮았다는 것에서 오는 짜릿함과 반가움 때문에, 맨 처음 그를 봤을 때는 버스 안에서 안아버리고 싶었다. 확 끌어안고 뭔가 반갑다고 말해버리고 싶었던거다.
스물 두살때, 어른 남자를 막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지하철이나 길에서 만나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그 사람은 어릴때 어떤 모습이었을까, 저기 저 학생처럼 옷을 입었을까, 저기 저 학생처럼 앉아 있었을까 등의 생각들을 했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고등학생들을 보면 저 아이는 자라서 어떤 남자가 될까, 혹시 이러이러하진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버스안에서의 그 학생을 보면서는, 너도 잘 자라면 '그' 처럼 될 수 있어, 하는 생각이 자꾸만 자꾸만 드는것이다. 후훗. 피곤에 찌들었던 나는 그 뒤로 눈을 감지 않고 계속 그 학생을 흘끔거렸다. 그냥 베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 사람 많은 버스 안에서 아마 누군가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봤다면, 그리고 내 시선이 닿는 곳에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면, 아마도 나를 변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가 그 학생에게서 본 건, 그 학생이 아니라구요, 아니에요!
자꾸만 실실 쪼개다가 '박희정'의 만화 『호텔 아프리카』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나는 그 만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 가슴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턱, 막혀버리게 했던 바로 그 장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가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그가, 있었다.
마법처럼!
아, 난 정말 이 장면 좋아했는데!
사람들은 우연한 계기로 만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고 이 만화에서는 말한다.
정말 그렇다.
술 끊어야지. 다시 마실 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