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슬퍼하는 사람, 약한 사람, 우는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하곤 한다. 왜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꼭 그런다. 사랑을 이루고,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하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 뒤돌아 눈물 흘리는 사람한테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무지하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 영화,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에서도 그랬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는 남자를. 둘은 가끔 둘만이 아는 숲에 가서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여자에겐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하다. 자꾸 웃게된다. 그런데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다른 여자를 이 공간에 데리고 온다. 이 둘만의 비밀 장소에.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 얘기했더니 보고싶어하길래 데리고 왔어." 라고 말하면서.
이런 무정하고 무심한 놈.
물론, 여자는 남자에게 '여기는 우리 둘만의 비밀 장소이니 다른 사람에게 알려줘서는 안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또한,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도 말하지를 않았다. 그러니 남자가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온다 한들 딱히 잘못했다고 혼내줄 수도 없다. 싸울 수도 없다. 그러니까 여자도 아무말도 못하고 그저 배신감을 느끼고 서운해하는 거다. 눈물이 나는거다. 나는 여기가 너랑 나의 둘만의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여길 아는 건 우리 둘 뿐이어야 하는건데.. 이 상황에서 나는 이 여자에게 감정 이입이 되지, 도무지 남자가 사랑하는, 그래서 남자의 비밀의 장소를 궁금해하고 거길 결국 알게 되는 여자의 감정에 대해서는 굳이 알고 싶어지질 않는거다. 그건 기쁨일테고, 행복일테니까. 내가 이입해주지 않아도 충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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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 [볼수록 애교만점]에서의 이선호. 나는 이선호를 엄청 예뻐라 하고 좋아라 하는데, 극중에서도 이선호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다. 한명은 간호사 정주리인데, 재벌집 딸이다. 이선호는 정주리에게 마음이 없다. 또 한명은 이선호가 과외를 해주고 있는 고3 수정이다. 이 시트콤을 매일 보지는 않는데, 그러니까 어쩌다 칼퇴하고 약속도 없는 날 집에 가면 보기 때문에 놓치는게 훨씬 많은데, 이선호가 고딩은 여자가 아니라며 고딩의 마음을 받아주지는 않는 것 같은 상황이다. 그래서 고딩은 많이 많이 속이 상한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아 시무룩해지는 고딩을 볼 때마다 나는 또 가슴이 아파서 고딩이 된다. 이선호는 이제 정주리랑 연인 사이가 되었는데, 고딩은 어느 날 우연히 정주리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이선호를 보게된다. 그때 고딩의 한숨은 나의 한숨이다. 그렇게 나는 이선호를 좋아하는 고딩에게 한껏 감정이입을 하고 슬퍼하는데, 그렇다면 정주리를 미워하거나 부러워하느냐 하면 또 그렇지가 않다.
이선호가 정주리랑 사귀는 사이기는 하지만, 이선호는 아직 정주리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정주리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단계랄까. 그래서 정주리가 팔짱을 끼고 이거 해요, 여기 가요, 하면 그대로 해주지만, 아직 그의 눈과 마음에 사랑은 없고, 나는 그걸 볼 때, 그때는 정주리가 된다 ㅠㅠ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아, 다만 노력할 뿐이야, 하면서. 슬픈 정주리가 된다. 아니 대체 왜? 이선호를 좋아하는 고딩이었다면, 정주리를 그냥 미워하면 되잖아?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 라고 하는 정주리한테도 감정 이입을 하는거지? 대체 왜? 병인가..
오늘은 이선호가 논문 준비 때문에 공부하느라 수염을 깎지 않은 상황에서 고딩을 만나 공부를 했다. 고딩은 이선호가 수염을 기른것이 못마땅했다. 쌤, 수염 깎아요. 쌤 수염이 쌤 잘생긴걸 가리는 것 같아서 속상해요. 신경 쓰여요. 이번 모의고사 망치면 쌤 때문이에요! 이선호는 그 얘기가 떠올라 수염을 깎는다. 고딩은 말끔하게 수염깎은 이선호를 보고서는 신이나서 뛰어와 이선호를 안으려고 한다. 이선호는 고딩이 자기를 안지 못하게 고딩의 머리를 막고 민다. 너가 시험 못본다고 했으니까, 신경쓰인다고 했으니까, 라고 말하지만 그가 떠올렸던 건 사실 '잘 생긴걸 가리는 것 같아 속상해요'는 아니었을까?
얼마전 읽은 [사랑 받을 권리]에 보면 한 남자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자를 짝사랑하는 사례가 나온다. 그는 정신과에 상담을 받으러 와서는 그여자는 날 남자로 보지 않아요, 라고 얘기한다. 닥터는 그에게 그여자가 당신을 남자로 보지 않는게 아니라 당신이 그녀를 여자로 인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거 아니냐고 한다. 결국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고 남자랑 이뤄진다. 갑자기 이 에피소드가 생각나는 건, 이선호 역시 그런게 아닐까 했던 것. 이선호가 고딩이라며 자꾸만 고딩을 밀쳐내는 건, 자신에 대한 최면이 아닐까? 자신에게 주입시키는 건 아닐까? 고딩을 여자로 보게 될까봐 자신이 겁나는 건 아닐까?
오늘, 친구랑 메신저를 하다가 고딩과 정주리에 감정이입을 한다는 얘기를 했다. 친구는 [볼수록 애교만점]이란 시트콤을 검색해서 고딩이 누군인지 찾아봤다. 그러더니 내게 그랬다.
어머 다락방님, 이렇게 예쁜 애한테 감정이입을 하시는 거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게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미처 몰랐다. 예쁘다는 걸. 그러니까 예쁜데, 내가 예쁜 여자한테 감정 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걸. 어쩔. 그러니까 그 고딩은 이렇게 예쁘다. (오른쪽 묶은 머리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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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선호가 수염을 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