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은 아니지만 나는 가끔 친구를 만날 때 책을 선물한다. 책을 선물하는 것은 퍽 즐거운 일이고 상대가 그 책을 재미있게 읽는 것도 행복하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책을 친구에게 선물 함으로써 그 책은 책 자체에 친구와 나의 사연을 포함하게 된다. 서점에서 혹은 길에서 우연히 내가 선물한 책을 보게 된다면 나는 저 책은 내가 누구에게 선물한 책이지, 라고 그 친구를 생각하게 될테고, 그 친구 역시 저 책은 다락방에게 선물 받아 읽은 책이지, 할 것이다. 물론 그 뒤에 정말 재미 없었어, 짜증나는 책이었지, 왜 이런 책을 준걸까, 라는 생각이 섞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할 때 조차도 그 책과 나를 연관짓고 있을것이다. 오늘은 갑자기 일을 하다 말고 책과 친구들이 생각났다.
지난 토요일 만난 친구에게는 이 책을 선물했다.
우리는 여섯시에 만나기로 했고 나는 다섯시반에 도착해서 삼십분간을 구두굽을 간다고 그 동네를 돌아다녔다. 오분전에 도착해보니 친구는 와 있었고 언제 왔냐는 물음에 친구는 한시간 전, 이라고 대답했다. 아뿔싸. 구두 굽 간다고 돌아다니지 말걸. 그냥 와 볼걸.
친구는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핸드폰이 있었다면 우리는 도착했다고 말해둘 수 있었을텐데, 그러면 나는 구두굽을 간다고 돌아다니지 않았을테고, 친구도 한시간을 내도록 기다리지 않았을텐데, 안타까웠다. 더운데 낯선 동네라 커피숍이 어디 박힌지도 모르고 길에서 기다렸을 생각을 하니, 어휴.
만나기도 전부터 친구는 혹시라도 늦게 되면 미안해지지 않을까 걱정하더니 결국은 한시간전에 도착했다. 나는 이 책을 친구에게 건네면서 이런 친구라면 이 책의 화숙을 이해할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울거나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화숙이를 미워할 수는 없을거라고.
나는 이 책을 앞으로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더운날의 을지로와, 한시간 전부터 기다린 친구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는 그에게 책 선물하기를 즐겨했다. 우리는 이제 자주 보지 않는 사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를 만날 약속이 있는 날은 책을 사뒀다가 선물했고, 그가 갑자기 집앞에 온다고 하면, 책장에서 내가 읽던 책을 꺼내어 갔었다. 이거 읽어봐요, 하고. 그는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들을 파일로 주거나 시디로 구워주거나 했었다. 나는 컴퓨터로 영화를 잘 보지 않지만 그가 주는 영화 만큼은 기를 쓰고 앉아서 봤다. 그래도 하나는 다 보지 못했지만.
이 책을 주었던 날을 기억한다. 그와 나는 서로 먼 곳에 살았지만, 강남에서 만나 집에 갈때는 잠실까지 지하철을 같이 탔다. 나는 그 시간이 무척 좋았다. 이 책을 주었던 그날도 우리는 지하철을 함께 탔고 그리고 자리가 나서 나란히 앉았다. 그는 이거 보면서 가야겠다며 책장을 넘겼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이 책을 보았다. 웹툰을 엮은 책인데, 이 웹툰을 보면서 그는 내게 "락방씨 이렇게 찌질한 남자 좋아해요?" 했더랬다. 나는 "어휴, 내가 이 주인공 좋아서 준게 아니라 사랑하고 이별하고 친구로 지내고 하는게 남 얘기 같지 않아서 준거죠." 했다. 좋아하는 남자와 지하철을 타는 것도 좋고, 좋아하는 남자와 같은 책을 보는 것도 좋고, 좋아하는 남자와 이야기 하는 것도 좋은데 그날 나는 이 세가지를 한꺼번에 하고 있었다. 그와 지하철을 타고, 같은 책을 함께 보고, 이야기하고 웃고.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 누구에게 추천할만한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을 그와 함께 읽었던 그 날은 좋았다.
내가 나의 후버까페에게 가장 최근에 선물한 책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이다. 후버까페는 내가 준 책을 한번도 허투로 읽은 적이 없고 감상을 적을때도 언제나 추천하거나 선물한 나보다 더 멋진 감상을 적어내기 때문에 나는 나의 후버까페에게 책 선물하는 게 퍽 즐겁다. 일례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선물했을 때에는 '전 인생의 가장 숭고한 위치에 다다른 할아버지 한분 모시고 인생 상담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미 돌아가신, 생면부지의 외국인에게 이렇게 큰 감사함을 느껴본 적이 전에 없었던 것 같아요' 라고 얘기했더랬다. 아- 멋지기도 하지. 후버까페는 아직 내가 준 책들을 다 읽지는 못했다고 했지만, 그 책들을 읽으면 그 먼 곳에서 많은 위안이 된다고 했다.
오늘은 후버까페가 네이트온에 로그인을 했다. 나는 그가 로그인 하는걸 보자마자 어어, 나한테 말걸고 싶어서 로그인했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 네이트온 친구들 중에는 '나' 때문에 로그인 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이 로그인 했을 때는 나를 보려고 한거라고 생각하면 사실 대부분 틀리지 않는다. 오늘의 후버까페 역시, 자신의 시간으로 새벽 두시가 다 된 시간, 내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대화를 하다가 우리가 항상 여름에만 만났다는 걸 알게됐고, 나는 그에게 나는 여름에 인기가 많다고 얘기했다. 그는 자신은 겨울남자라고 했다. 당신은 겨울에 더 멋져져요? 그는 그렇다며 겨울에 자신은 '장난 아니'라고 했다. 하하. 그 뒤에 이어지는 대화를 다 쓰고 싶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은밀하고 사적이라 패쓰. 그는 며칠전부터 내가 보고싶더니 엊그제는 꿈에 내가 나왔다고 했다. 하하. 심지어 그는 꿈속에서 나를 짝사랑했고 나는 그에게 관심도 없었다고 했다. 아 감동 ㅠㅠ 무슨 꿈이 그렇게 멋진걸까. 나는 살다보니 별 일이 다있다며, 어쩌면 그렇게 감동스런 꿈을 다 꿨느냐고 했다. 오와- 라고 했다, 나는. ㅎㅎ 젊고 멋진 남자의 꿈에 등장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스런 일이구나. 흑흑 ㅠㅠ 새벽 세시가 다 되는 시간 나는 그에게 잘 자라고 말하고 메신저를 끊으면서 오늘도 내 꿈을 꾸라고 했다.
이 책을 선물 받던 날을 생각한다.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날,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회사에서 나갈 수가 없어 초조했고, 친구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고 했다. 초조함이 극에 달하는데 그는 서점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세상에, 그렇게 이쁜 말을 하는 친구라니. 나는 아직 약속장소에 도착하지도 않고서도 마음이 흐물흐물 해져버렸다.
결국 우리 둘다 약속시간을 조금 넘겨 도착했고, 친구는 내가 먼저 도착했다는 걸 알고는 역에서 뛰어왔다. 그리고 그날 친구가 내게 준 선물은 [J.D. 샐린저와 호밀밭의 파수꾼] 이었다. 두권을 사고 싶었는데, 그래서 나 한권 주고 본인도 한권 읽고 싶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서점에 이 책은 단 한권 뿐이었다며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나에게 '샐린저'를 주려고 했던 마음과 내가 읽는 걸 본인도 읽겠다는 그 마음이 너무 좋아서 그때의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은 겨울에 선물 받았는데 내내 가지고 다니다가 (나는 집착하는 여자사람) , 어제서야 비로소 가방에서 빼고 책장에 꽂아 두었다. 마치 부적처럼 내내 지니고 싶었는데 몇개월간 가지고 다니다보니 표지가 너덜너덜 해졌기 때문에 빼어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끼고 싶은데, 이렇게 금세 낡아버리면 안되잖아, 하면서. 억지로 생각하지 않아도 그날의 친구와 그날의 감정은 저절로 떠오른다.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고 잊혀질 수 없는 친구다.
역시 여름은 끈적이는 계절이다. 그러나 혼자 끈적이기엔 아까운 계절. 이 여름도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