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있던 책 '정미경'의 『아프리카의 별』을 출근할때 깜빡잊고 들고 나오질 못해서 출근길에 음악들으며 멍 때렸는데, 퇴근길에도 멍때리긴 싫어서 강남역 가판에서 [시사 IN] 을 샀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뒤에서부터 읽어나가다가 문화 in 코너의 [금주의 저자]에서 '김진혁'을 만나게 된다. 지식e 의 김진혁 피디가 책을 냈구나, 하고 반페이지 정도 되는 그의 글을 읽었다. 그리고 당장 그의 책을 사고 싶다고 생각했다.
김 PD는 항상 지식의 '프레임'을 경계했다. 가끔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나갈 때면 항상 마지막에 "내 말 역시 특정 프레임이 담겨 있으니 반드시 의심하라"고 말한단다. 이 책에서도 무엇이든 함부로 정의내리고 해석하지 않았다. "내가 [지식채널 e] 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어떤 느낌을 받았듯이, 독자들도 이 책으로 스스로 영감을 받았으면 좋겠다." -시사 IN 147호 中에서
(일부만 발췌한 것이니 더 읽고 싶다면 시사 IN을 사서 읽어보도록 하자.)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정말 그가 무척이나 좋아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얼마나 똑똑한지 알지? 내 선택이 얼마나 현명한지 알지? 내가 하는 말은 진실이지, 하고 자만에 가득차 살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이 때에, 그러니까 곳곳에 나만 믿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깔려있는 이 때에 '내 말도 의심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니. 그런 그의 책이라면 당장 사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그 기사를 읽고 잠실역에 내려서 교보문고로 향했고, 그렇게 그의 책을 샀다.
그리고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프롤로그부터 나는 밑줄을 긋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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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두 가지 지식이 있다. 하나는, 알면 알수록 신비하고 오묘한 지식. 다른 하나는, 알면 알수록 답답하고 먹먹해지는 지식. 전자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상식을 풍부하게 해준다. 그것들을 배움으로써 더 똑똑해졌음을 느끼게 된다. 반면 후자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것들을 배움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전자는 '몰랐던 지식'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고 후자는 '몰랐던 나'를 새롭게 알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몰랐던 지식이야 배우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나는 나에 대해서 '어째서 몰랐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수많은 답변 중 하나다. (프롤로그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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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라면서 몰랐던 나에 대해 하나씩 알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식이란 것은 역시 상식을 풍부하게 해주고 똑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리의 무지를 드러내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지식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아 그래 그것도 지식이었지, 하게 된것이다. 그래, 그것도 지식이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지식인 것이다. 나는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졌다. 그는 앞으로 어떤 말을 하려는걸까.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노라니, 그는 점점 더 마음에 드는 말만 한다. 내가 자꾸만 받아들이고 싶어지는 것들을 그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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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사안들이 대부분 '극단적 대결'로 벌어진다. 즉 어느 하나가 주장하는 의견이 다른 한편에서 주장하는 의견과 절충이나 타협을 하지 못하다 보니, 한쪽이 살면 다른 한쪽은 죽어야만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러다 보면 상대가 하는 말 모두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으로만 보이고 당연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우선 이런 생각에서 양쪽 모두가 벗어나야 한다. 손을 맞잡고 벗어나면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무리다. 따라서 그 물꼬를 먼저 틀 수 있는 쪽은 더 많은 힘을 가진 쪽이다. 약한 쪽에 '양보'를 말할 수 있지만 '굴복'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pp. 68-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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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방송장악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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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권력과 불편한 관계에 있어야만 정상이다. 언론본연의 기능이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귀찮고 불편하다고 해서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권력이 못마땅하다고 해서 언론 스스로 권력이 되려고 나서서는 안되는 것처럼 말이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권력, 스스로 권력이 되려고 하는 언론, 둘 다 불행해진다. 언론의 자유는 곧 국민의 자유고, 국민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다. (p.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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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김진혁 피디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김진혁 피디 한명 뿐인걸까? 도대체 어째서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이런 말을 해서 책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걸까?
내가 가끔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를 깨닫고 먹먹해질때가 있다. 그런데 내가 뭘 어찌할 수가 없어서 더 답답해지고 속이 상할때. 그런 상황에 대해서 김진혁 피디는 이렇게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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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분노는 승화되지도 못하고 배설되지도 못한 채로 내면에 남는데 그건 일종의 '무기력함'일 것이다. 아무리 문제의식을 가져봤자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 않는 데서 느끼는 절망 말이다. [지식채널e]를 보고 느끼는 '먹먹함'이라는 감정도 바로 이게 아닐까. 그러나 이 '무기력함'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느낌은 다름 아닌 소외된 이들이 체험하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시청자는 소외된 이들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나마 그 입장에서 그들이 느끼는 고통과 절망, 그리고 무기력함을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체험할 수 있다. 소외 문제에 있어서도 백 마디 말보다는 한 번 경험하는 것이 훨씬 나은 법이고, 이는 문제의식이나 비판의식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핵심적이다. (pp.102-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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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 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김진혁 피디의 이 말만으로는 위로를 조금 얻었을 뿐, 역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 보다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쪽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부분일테고. 그러나 김진혁 피디가 말한것처럼,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작일 수 있다.
중간에는 [지식채널e]의 작가들과 인터뷰한 부분도 실려있는데, 그중에 한 작가의 말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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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나에게 지식이란 '나만 아는' 지식이었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나만 알고 있는 지식, 나 자신만을 위한 지식은 쓸모도 생명력도 없는 지식이라는 것을.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가 사는 지식, 많은 사람들을 위한 지식이야말로 꼭 필요한 지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팔딱팔딱 살아 있는 지식 말이다.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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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는 것이 좋다. 그 생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한 노력에 대한 것일때는 더욱 좋다. 소외된 사람들을 같이 한번 생각해보자고 말을 하니까 한번 같이 생각해 보고 싶다. 나 혼자 잘먹고 잘 살자, 라는게 아니라 나는 얼마나 잘났는지 니가 아니, 라는게 아니라 '우리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 조차 몰랐다는 것을 깨닫자'고 하니까, 어디 한번 그래볼 참이다. 내가 얼마나 모르고 살았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아보려고 한다.
다 읽고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