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 달은 마리 메르시에와 친해지고 싶었다. 마리 메르시에는 로랑 달의 환상이었다. 

   
 

로랑 달은 가까스로 본심을 숨기며 마리에게 무관심한 척했고, 스스로 변화를 꽤했으며, 적절한 어휘를 찾으려 애썼고, 현명한 생각을 찾기 위해 머릿속을 뒤졌고, 스쿨버스에서는 머릿속으로만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고, 별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넓적다리를 바라보았고, 둘 사이에 전혀 진전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고, 멜랑콜리하고 고상한 권태로움이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는 것을 보았고.(p.148)  

 
   

그러니까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마리 메르시에를 향한 로랑 달의 연정은 배가 사르르 아플 때의 복통의 기운이나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어떤 생각처럼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 것이었다. 

로랑 달은 토요일이면 그녀의 집에 가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 둘의 대화는 사실 서로 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그런 대화들 속에서도 그녀를 훔쳐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날도 그랬다. 그날도 그녀의 집에서 대화를 하는데, 그녀를 유혹하고 싶은데, 그녀와 관계를 좀 더 진전시키고 싶은데, 아, 그는 배가 아팠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로랑 달은 자신의 몸이 조약돌이 잔뜩 든 보따리 같다고 느꼈다.(p.153) 

이때부터 나는 로랑 달에게 연민을 느꼈다. 슬펐다. 그가 짝사랑을 앓고 있는 것보다 더 슬픈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가장 멋진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은 사람앞에서 어쩌면 가장 보이고 싶지 안은 면을 보여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꾸만 자꾸만, 현실이 된다.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화장실이 어디있는지를 물어보았고, 그리고 허겁지겁 화장실로 들어간다. 

   
  그는 허리띠를 풀고 하얀 팬티와 바지를 한꺼번에 내리면서 변기에 앉았다. 그러나 필요한 만큼 재빨리 행동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4초 정도 만에 로랑 달은 누런 액체가 속옷을 더럽힌 것을 알고 기겁을 해야 했다. 액체 상태가 다 된 설사가 빛의 속도로 쏟아졌던 것이다. 컵 꼭대기까지 꽉 찬 두 컵의 액체 겨자가 한 컵은 팬티에, 또 한컵은 변기에 쏟아졌다.(p.154)   
   

아! 

이제 그에게는 아픈 배가 문제가 아니었다. 연정을 품은 그녀의 집 안, 그 화장실안에 지독한 냄새를 풍기게 하고야 말았다. 냄새의 근원인 팬티를 찢어 변기에 넣고 돌렸지만 그 팬티를 변기가 빨아들일리가 없다. 그는 20분 넘게 화장실에서 나가지를 못하고, 밖에서는 그녀의 어머니가 괜찮으냐며 뜨거운 차를 준비했으니 나와서 마시라고 한다.  

결국 신발 속에 팬티를 넣고, 오물이 묻어 있는 바지를 좀 닦아내었지만, 냄새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와서 안전 부절 못하고 대화를 간신히 이어가고, 머릿속에는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차있고, 결국 그의 짝사랑 대상은  

"이게 도대체 무슨 냄새지?" 

라며 화를 내고야 만다. 작별 인사를 할 때에는 두 개의 솜뭉치로 코를 막기까지 하고.  

 

이거야 말로 비극. 이거야 말로 슬픔. 슬픔중의 슬픔. 

 

 

 

 

 

 

 

 

학창 시절의 짝사랑 대상. 그러니 굳이 이 사건이 아니었어도 그가 그녀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는 결론은 나오지 못할 확률이 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당시의 로랑 달에게 그 순간은 끔찍했겠지. 아, 나는 생각조차 하기 싫다. 내게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  

그만두자. 구질구질하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서로 다른 짝을 찾고 삶을 살고 그렇게 십년이 흐르고 이십년이 흐르게 되면, 그 순간을 떠올리며 농담할 수도 있을거다. 아, 그때 내가 그 여자를 사랑했는데, 맙소사, 그녀의 집에서 설사가 나온거야! 하면서. 그땐 정말 끔찍했지, 하면서 술을 마시며 웃을 수도 있게 될거다. 물론, 시간이 좀 지난후에. 

또 그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라면, 그 여자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짝사랑의 대상에 대해서도 다른 말을 할 수도 있을거다. 그때는 내가 그 사람을 참 좋아했지, 그런데 왜 그렇게 좋아했나 몰라, 같은 말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전혀 특별할게 없었는데 말이야. 그때는 왜 그렇게 그사람이 반짝거렸을까. 

 

돌이킬 수 없이 그 자체로 찬란하고 고통스러운 순간. 짝사랑도, 그리고 그 사람앞에서 나도 모르게 터져버리는 설사도. 

 

봄으로 가려는 무렵이었다. 봄으로 가려는 무렵, 그러니까 좀 추웠을 때. 나와 길을 걷던 남자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뒤를 돌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로 무작정 끌려가기만 했다. 그는 나를 어느 빌딩 안으로 끌고 들어갔고, 그렇게 나를 벽에 밀치더니 키스를 해버리고 말았다. 초저녁이었는데. 밤도 아니었는데. 

나는 가끔 그 빌딩 앞을 지난다. 어쩔 수 없다. 우리 동네였으니까. 그 빌딩 앞을 지날때마다 번번이 그의 생각이 나는건 아니지만, 그 빌딩 앞을 지나지 않아도 그의 생각이 불현듯 날 때가 있다. 오늘처럼. 자연스럽게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지금쯤 어딘가에서 다른 여자를 벽에다 밀치고 있겠지. 

그는 이제 서른을 살고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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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백
    from 나는.. 따라쟁이 입니다. 2010-04-16 12:24 
    그날은 눈이 많이 온 다음날이였고, 당일도 눈이 많이 내렸어요. 그리고 발렌타인데이였죠. 그는 군대를 막 재대하고 여의도에 있는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요. 아침8시에 퇴근하는 그를 위해 저는 아침 7시쯤 여의도에 있는 편의점에 도착 했어요. 그는 약간 놀랐고, 그것보다 조금더 좋아했어요. 퇴근하고 돌아가면서 무엇을 할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침타임 알바가 오기를 기다렸죠. 아침타임 알바는 무슨일 때문인지 아홉시가 다 되어 도착했는데 그것
 
 
2010-04-15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6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따라쟁이 2010-04-16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사는 마음이 아파오네요. 저도 비슷한 일이 있어요. 눈 많이 와서 빙판이 진날이였... 아.. 역시 구질구질 하네요 ㅠㅠ

다락방 2010-04-16 11:07   좋아요 0 | URL
저는 상대의 구질구질한 면을 본적도 있어요. 쓰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구질구질한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대상을 다시는 안봤다거나 싫어하게 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는 살짝 실망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구질구질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구질구질 ㅠㅠ

비로그인 2010-04-15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올해 삼십번째 생일을 맞이합니다.

다락방 2010-04-16 10:58   좋아요 0 | URL
부럽습니다.
전 이미 몇년전에 보내버렸어요, 서른을.

poptrash 2010-04-15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올해 삼십번째 생일을 맞이합니다. 222

제니퍼 애닌스톤과 벤 스틸러의 <폴리와 함께>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어요.
학창 시절 제니퍼 애닌스톤을 짝사랑했던 벤 스틸러는, 어느날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죠.
그녀는 보헤미안처럼 차려입고 자유 분방하게 살아가는 멋진 여성이 되어 있었고
소심한 벤은 용기를 내어 그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요. 매운 인도 음식점에서.

문제는 그가 습관성 장 트러블이 있었고, 식사 이후에 그녀의 집에 가게 되었다는 거고,
그녀 화장실에는 휴지가 없었다는 거죠. 눈에 보이는 것은 수건.
수건은 물론 변기에 들어갔고, 역시 변기는...
뭐 그런거 아니겠어요.

다락방 2010-04-16 10:58   좋아요 0 | URL
저 봤어요, 그 영화. 혼자 극장에 들어가서 봤지요. 그 로맨틱 코메디를 사람많은 서울극장에서 혼자서요. 그리고 당연히 그 에피소드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 에피소드도 페이퍼에 쓸까 하다가 그러면 또 길어질 것 같아서. (제 글은 너무 길어요 ㅜㅡ)

poptrash님의 스물 여덟은 어땠나요? poptrash님도 스물여덟에, 서른이 훌쩍 넘은 여자를 벽에다 밀쳤나요? 응?

2010-04-15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6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머큐리 2010-04-15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진것보다 항상 더 낫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ㅎㅎ 그 마법이 깨져버리는 순간 사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그 동안 오버질한 초라하고 찌질한...에잇!!

다락방 2010-04-16 11:05   좋아요 0 | URL
그쵸. 그런데 더 낫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때문에 되려 더 찌질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욕망 자체가 없었다면 평범해질 수도 있었을 일들이 말입니다.

저 역시 오버하고 초라하고 찌질한 일들을 아주 숱하게 겪었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들. 그러나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을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어요. 미래는 예측불허니까요.

금요일입니다!

무스탕 2010-04-15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김자옥이 이순재 집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변기 막혀 나오지 못하고 엉엉거리던 장면이 생각나네요 ^^;;

다락방 2010-04-16 11:06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면 순재씨는 자옥씨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참 많이 보이고 그래서 안타까웠던 것 같아요. 싸이클복 입고 친구들을 만나러 간 에피소드도 그랬고 말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웃을일도 많지만 참 울 일도 많아요. 그쵸?

야클 2010-04-15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자면 앞으로는 엘리베이터로 끌려가세요. 아주아주 높은 빌딩의 화물전용 엘리베이터로. ^^

다락방 2010-04-16 11:03   좋아요 0 | URL
아 뭔가 뚜렷한 대상까지 넣어가며(응?) 상상했더니 아주 미치겠네요. 손발이 찌릿찌릿해지는게. ㅎㅎ
이래가지고서야 어디 일을 하겠어요!! ㅎㅎ

sweetrain 2010-04-16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년 후에 서른이 되어요.
이렇게 서른이 되어도 되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해요.


다락방 2010-04-16 11:04   좋아요 0 | URL
예쁜 서른이 되어요, 예쁜 서른. 반짝반짝 빛나는 서른.
서른은 한 번 뿐이니깐요.
:)

2010-04-16 0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6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10-04-16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따위, 잊어버렸음. ㅎ

다락방 2010-04-16 14:50   좋아요 0 | URL
나도 가끔 잊곤 함 ㅋㅋ

nada 2010-04-16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구질구질해. 사랑 따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요.ㅠ.ㅠ

저도 이 페이퍼 읽으면서 <폴리와 함께> 그 영화 생각했어요.
제니퍼는 왜 그런 영화를 다시 찍지 않는 걸까요?
그녀가 제일 그녀다워 보였던 영화였어요.
근데 남자들은 저런 상황에서 하나같이 다 수건을 변기에 집어넣더군요.
멍청하긴. 수건을 넣으면 변기가 막힌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건가요, 남자사람이란?
전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으면 세면대가 막힌다든가,
싱크대 수챗구멍에 음식물을 마구 버리면 언젠가 그것을 비워야 한다는 사실 같은 걸 모르는 남자가 너무 싫어요.

다락방 2010-04-17 08:41   좋아요 0 | URL
제말이요. 수건을 변기에 넣으면 막힌다는 게, 그게 남자사람들의 머리엔 들어가 있지 않은건가요? 너무나 멍청해서 한심할 지경이에요.

어제부터 삶이 지긋지긋하다고 느껴지다보니, 세상 모든 남자들이 싫어지네요. 죄다 변기에 넣고 돌려버리고 싶어요, 그들을.

마노아 2010-04-17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순간들이 있었나 하고 되짚어 보면, 비슷한 순간들이 몇 차례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태연히 잊고 지내지만요.
저렇게 민망하고 비참하고 서글픈 일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될 순간이 분명 있을 테지요.
하다 못해 라디오에 사연 보내어서 선물이라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ㅜ.ㅜ
다락방님, 토요일 오후예요. 같이 영화보면 딱 좋을 날이에요.^^

2010-04-17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7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8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