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도 코트도 눈을 잔뜩 맞고 들어와서는 그냥 침대에 드러누워버렸다. 옷을 벗지도 않고 씻지도 않은채로.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쉬자. 혼자 서운했던 마음도 잠깐만 쉬고, 오늘 너무 일을 안한건 아닐까 했던 자책도 잠깐 쉬고, 지하철안에서 입을 가리며 받았던 첫 통화의 기쁨도 잠깐 쉬고, 내가 오늘 멍때려서 다른 직원이 화나지 않았을까 신경 쓰이던 것도 잠깐 좀 쉬고, 잠깐만, 잠시만 쉬자.
일분이었는지 이분이었는지 정말 잠깐 쉬었다가 벌떡 일어나서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원래는 벗자마자 침대에 팽개쳐버리는데, 오늘은 코트가 젖어서 침대에 던져 두어서는 안되겠다. 그럼 침대가 젖잖아. 나도 그쯤은 안다. 무슨놈의 눈이 우산을 써도 맞게끔 오냐. 그리고 뜬금없이 정신나간 여자처럼 책장에 창비세계문학세트를 꽂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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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뽀대난다. 책장이 마치 이 세트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구나. 이쁘기도 하지. 나는 4초쯤 만족해 하다가 3초쯤 더 뿌듯해하다가 이내 신경질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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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트 꽂아둔다고 빼 둔 이 책은 어쩔거임. 피아노 위에 빼뒀는데...아이 참..(왼쪽에 밑에 책등이 안보이는 저 두권은 무슨책일까요?)
넷북 쓴다고 방안에 가져다둔 테이블에 이 책들은 어쩔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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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관이다. 천사의 게임 한권은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고 나머지 한권은 여기 이렇게 있다. 저기 저 수키4권은 에릭이 어떻게 되나 싶어서 잽싸게 사두고서는 또 저기 저러고 있다. 필립 클로델의 소설은 두권을 사서 한권은 읽었고 나머지 한권은 저러고 있다. 저 위에 만화책 『도시로올시다』가 보인다. 핸드백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CD 플레이어도 여기있다. 넷북은 책 밑에 깔려있.......
이뿐만이 아니다.
이젠 침대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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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장쯤 읽다 만 『매직토이숍』이 제일 위에 있고, 다 읽은 필립 클로델의 소설. 그리고 『폭두직딩 타나카』 저 사이 어딘가에 "읽고 싶은데 안팔어 제기랄", 하고 흥분하자 남동생이 폐업정리하는 책방에서 구해다 준 『폭두고딩 타나카』도 있다. 나머지는 무슨 책인지 잘 모르겠다. 아 젠장.
이것 말고도 옷이며 가방이며 아주 방안이 난리가 났다. 그러니까 오늘 난리가 났다는게 아니라 원래 늘 난리가 나있다. 옷을 벗어던지다가 방안을 휘이- 둘러보다가 아 이런, 빌어먹을, 방 한칸은 서재로 쓸 것이며 그 책들의 정리와 니 옷들의 정리 그리고 모든 집안의 청소는 내가 다 할게, 라고 말하는 남자가 있다면 지금 당장 시집가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정리정돈이 적성에 안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