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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 - 사람들이 읽기를 싫어한다는 착각
김지원 지음 / 유유 / 2024년 3월
평점 :
명절 연휴, 식구들이 모두 돌아간 뒤 나는 한가로이 텔레비젼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 영화의 도입부를 보게 됐는데, 영화에서는 여자 등장인물이 남자 주인공인 킬러에게 사건을 의뢰하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내게 보이는 건 남자 주인공의 얼굴과 여자 주인공의 가슴이었다. 화면의 앞부분은 여자 주인공의 살짝 드러난 가슴 그 뒤에 남자주인공의 얼굴인건데, 영화의 흐름으로는 남자주인공이 여자등장인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같았지만, 그걸 빙자해 시선을 여자의 가슴에 고정시키려는 게 느껴졌다. 그게 너무 불쾌했다. 보다말고 이 장면에서 내가 느끼는 불쾌함에 대해 설명해줄 책이 있지 않을까, 싶어 나는 영화보기를 멈추고 내 책장 앞으로 가 섰다. 지금의 내 기분을 적절하게 표현해준 어떤 책이 내 책장 안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책을 아마도 미리 사두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거다. 그렇게 꺼낸 책은 '박정자'의 [시선은 권력이다] 였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책은 내가 기대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생각하지 못했던 참신한 내용이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또 생각해보지 못한 다른 관점을 보여주어 밑줄도 그어가면서 읽었다. 기대한 걸 얻진 못했지만 얻을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걸 얻었던 셈이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가 저자의 생각에 온전히 동의하는 일이 얼마나 될까? 어느 정도 공감하더라도 또 어느 부분에서는 나랑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이건 좀 아닌데, 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게 독서가 아닌가. 그런데 '김지원'의 [지금도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에 있어서라면, 나는 독자로서 저자의 생각에 백프로 동의했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김지원의 말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김지원은 책의 효용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나라 독서량이 매우 적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이 읽기 자체와 멀어진 것은 아니며, 오히려 SNS나 유튜브, 인터넷의 기사등을 통해 읽기 자체는 더 늘었다는 사실부터 얘기한다. 그런데 독자가 읽기를 원하는 건 양질의 글이라는 당연한 사실도. 대충 훑고 읽다 말게 되는 이유는 수없이 만나게 되는 텍스트들이 모두 이 글과 저 글의 짜집기이며 그로 인해 글이 담고 있는 정보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거다.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지만, 거기에 정말로 내가 가져갈 수 있는 진짜 정보는 얼마나 되는가. 정보 면에서도 그리고 지식 면에서도 저자가 연구하고 조사하고 깊이 생각한 책만한 것을 따를 것은 없다고 얘기하는거다. 원천적 정보, 정확한 정보가 거기, 책에 있다고. 책이야말로 정보의 순도가 높다고 말이다.
그뿐인가. 책은 지식을 얻는 최고의 수단이며 심지어 읽는 동안 광고에 눈을 뺏기지 않아도 된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하나를 얻으려고 펼쳤다가 곁가지로 뻗어가는 수많은 다른 것들을 얻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단순히 하나의 현상을 보고 그치는게 아니라 왜, 어째서를 더 파고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책이라야 가능하다. 그렇게 책에 대한 예찬에 이어 그 책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의 서문과 그 책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 도서관까지. 알고자 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우리가 책을 도구로 삼는다면 언제나 그 이상을 가져가게 될거라는 거다.
여기 어디 틀림이 있을까. 나는 이 모든 책에 대한 말들에 동의한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답을 구하고 싶다면, 그 때도 역시 책으로 향하면 된다. 그러면 책은 나를 원하는 답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그보다 더 멀리 데려가기도 한다. 때로는 기대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길로 나를 데려가기도 한다.
저자의 책에 대한 의견에 모두 동의하면서 나는 꼭 한가지를 더하고 싶다.
그건 책속에 '이야기'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SNS 를 통해 보여지는 단편적인 정보와 혹은 단편적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는 그 게시물을 올린 사람의 인생에 대해 멋대로 추측하게 된다. 그들의 행복과 불행 가난과 부유함을 순식간에 판단하게 되는거다. 그 사진 뒤에 그 사람의 기분과 행동이 있고 나아가 삶이 있다는 것까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책에는 그 뒤에 있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루이스 어드리크'의 [사랑의 묘약]에서는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나서 고통스러워하며 무얼할까 고민하다 감자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는 여자가 나온다. 어떤 사람은 감자 껍질을 벗긴다는 단순한 행위에 남편이 떠난 후의 고통을 담았다는 것을, 그 이야기를 책이 들려줄 수 있는 거다. 책에는 이야기가 있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이 장애인의 지하철 시위에 대해 비문명적이라 말했다는 자극적 기사가 나오면 그에 호응하며 역시 시위에 참여한 장애인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덧대진다. 그러나 '박경석'의 [출근길 지하철]을 읽으면, 그 지하철 시위를 하기 전까지 장애인들이 얼마나 오래 수많은 방식으로 싸워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신경 쓰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도. 기사의 타이틀만 보고 비난하기는 쉽고 우리는 몰랐을 때 혐오하기 쉽다. 그러나 행위자의 행동 이면에 그 사람 고유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소식까지 인터넷의 수많은 기사 오려붙이기 혹은 요약하기가 보여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왜'를 더 알고 싶다면 책을 펼쳐야 한다. 누군가의 생각없는 혐오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을 펼쳐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건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의 뒤에 숨겨진 그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 이야기는 다른 무엇이 아닌 책이 들려줄 수 있다. 그게 사람들이 '굳이' 책을 쓰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나는 우리나라 독서 인구가 적은 이유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책을 일단 펼쳐서 읽으면, 그래서 그 안에 담긴 정보와 지식과 무엇보다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다음 책을 그리고 또 다음 책을 자꾸 찾아서 읽게될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몰라서 그렇지, 일단 책이라는 문을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한 권이 두 권이 되고 두 권이 열두권이 되는 일은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정보와 지식 그리고 이야기에 더해, 답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 때문에도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책장 가득 다 읽지도 못하면서 가득가득 책을 쌓아두는 건, 언제든 내가 가진 물음에 기꺼이 답해줄 수 있는 어떤 책들이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나의 이 의문에 답해줄 책이 내 책장에 있을 것 같은데? 하고 책장 앞에 서서 책등을 살피곤한다. 그렇게 책을 꺼내어 답을 찾을 때도 있지만 답을 찾지 못할 때 조차도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게 가능해진다. 하나를 알고자 하면 조건없이 심지어 광고도 없이 그보다 많은 걸 내어주는게 책이다. 김지원은 내내 그 얘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