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매달 10일 정도부터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를 읽기 시작한다.
10일이 되기 전까지는 읽고 싶은 책을 실컷 읽어주고, 10일부터 본격적으로 여성주의 책을 읽고 마치자,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오늘 출근길부터 이 책, '다나카 미쓰'의 [생명의 여자들에게: 엉망인 여성해방론]을 시작했는데,
제일 처음 <한국어판 서문>부터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아, 이 책, 읽기 만만찮겠네. 무엇보다 읽기 싫어하는 혹은 불쾌해하는 혹은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겠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부터가 매끄럽게 읽히지 않고 음, 당황스러웠거든. 자, 그러니까 서문에서 나를 이런 구절을 본것이다.
'여자다움으로 살아간다면 나는 나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온몸에서 끓어올랐습니다. 남녀 구별 없이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내면서, 저는 '이게 바로 나야'라고 여기는 내 자신과 만나고 싶었습니다.
'싫은 남자가 내 엉덩이를 만지지 않았으면' 하는 나, '좋은 남자가 만지고 싶어 하는 엉덩이를 갖고'싶은 나. 내가 싫어하는 남자가 내 엉덩이를 만지면 안 된다는 것은 여성들의 공통된 분노에서 나온 것이기에 운동의 대의가 되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만져 줬으면 싶은 쪽은 말하자면 개인의 욕망입니다. 대의와 욕망-이 두 가지가 비슷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나와 함께 들고 일어났습니다. -p.5-6
음.. 싫어하는 남자가 내 엉덩이를 만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는 일단 적극 동의. 그런데 '좋은 남자가 만지고 싶어 하는 엉덩이를 갖고 싶은' 것 역시 적극적 동의인가? 여기에서 턱, 하고 걸려버리는거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어떤 남자도 내 엉덩이를 만지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는 참인가? 나는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아니, 나는 좋은 남자여도 내 엉덩이 만지는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라고 나는 생각하는가? 질문을 여러개 더 던져보아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 엉덩이가 내가 좋아하는 남자에게는 매력적이기를 원한다는 답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니 '다나카 미쓰'의 저 구절이 거짓은 아니고 잘못됐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되게 불편한거다. 저 문장이 너무너무 불편해. 사실이라며, 참이라며, 그러니까 대의와 욕망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데, 내 안의 모순 우리 안의 모순을 우리가 인지한다고 해도, 그래도 저 문장이 왜이렇게 불편한걸까. 다나카 미쓰가 '지나치게' 솔직한걸까? 그런 지나친 솔직함에 내가 불편한건가? 지나친 솔직함에 당황스러운건가? 내 안의 깊은 욕망을 표현해버려서 불편한건가? 너무 직설적이라 불편한건가? 음..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닌것 같은거다. 그러니까 나는 '좋은 남자가 만지고 싶어하는 엉덩이를 갖고 싶은 나'라는 문장 자체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편하다. 이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문장의 적나라함에서 오는가 혹은 나 자신의 모순을 인정하기 싫음에서 오는가. 아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은거다. 이 문장은 불편함이 있다. 그런데 그건 내가 솔직하지 못함에서 오는 불편함이 아니다. 다른 불편함이다. 그렇다면 그 다른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라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그것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은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떠올린 건 '에바 일루즈' 였다. 에바 일루즈가 이 남녀관계 욕망에 대한 모순.. 을 말하지 않았었나.
그리고 나는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불안한가] 에서 이런 구절을 보게 된다.
로이피(미국의 여성 작가로 뉴욕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가르치기도 한다)는 『뉴요커』The New Yorker 지에 실린 대프니 머킨의 말을 인용한다. "남성과 여성의 평등, 심지어 겉보기뿐인 평등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지만, 언제나 섹스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로이피가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더더욱 흘려들을 수 없는 노골적인 불평, 곧 평등이 섹스 욕구를 퇴색하게 했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남녀의 평등은 그다지 섹시하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평등을 존중하는 섹스는 협상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번거로운 절차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을 반면교사로 삼은 남자는 적극적이며 직접적으로 섹스를 주도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니까 여성은 자신감에 넘치며 게임이라도 벌이듯 유려하게 접근하는 남성성을 갈망한다. -p.81-82
평등은 원래부터 혼란스럽다. 평등을 기본 전제로 깔면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갈등이 불거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평등이 불안함과 애매함을 낳는 원인이라 말할 수 있다. 불평등을 편안하게 여기게 만드는 두 번째 측면은 권력관계를 보호관계로 바꿔주며, '자연스러운' 상호의존성과 강한 감정적 접착성을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반대로 평등은 어떤 의무감도 낳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의 욕구와 권리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상대방과 갈등을 빚도록 조장한다. 불평등이 지닌 세 번째 편안한 측면은 역할 문제를 놓고 서로 협상을 벌이지 않아도 좋다는 점이다. 이로써 관계 당사자들은 좀 더 자발적이고 직접적인 감정을 가짐으로써 골치 썩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즐겨 보는 드라마 시나리오가 그려내는 사회적 역할을 보라. 고민하고 자시고 할것 없이 그저 감당하기만 하면 되는 역할이지 않은가. -p.82-83
아, 뭔가 손에 잡힐 것 같지만 잡히지 않는 느낌이다. 내가 원하는 답이 여기에 있기를 바랐지만 정확한 답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어떤 방향에서 내가 저 문장을 불편해했는지는 알 것 같다. 에바 일루즈의 문장들을 읽고나니 내 안의 모순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는 만져지길 원하는 엉덩이를 갖고 싶다'는 그 '욕망'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지만, 그러나 그 욕망 자체가 순수하게 내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온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태어나기를 본능적으로 '누군가에게는 엉덩이가 만져지길 원한다'고 태어나진 않았다는 거다. 이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그 욕망은 나에게 세뇌된 것이라는 거다. 이 거대한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 살기 때문에 때로는 내 엉덩이가 누군가에게는 만져지길 원한다는 욕망이 생기는 것이지, 애초에 그것이 내가 내 모순에 직면할만큼 본질적 욕망은 아니라는 거다.
물론,
지금 내가 가진 모든 욕망은 이 사회에서 태어나 살아가기 때문에 만들어진 욕망인 것이 맞다. 만약 내가 화성에서 태어났다면, 무인도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욕망과는 완전히 다른 욕망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떤 남자에게 만져지길 원하는 엉덩이를 갖고싶어 한다는 것, 그 욕망만 나에게 주입된 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거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건 '그건 애초부터 내 욕망인 것은 아니었다고!' 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가진 대부분의 욕망은 이 환경에서 자라면서 주입되거나 만들어진 것이다. 나도 안다. 그런데 저 문장에서 불편한 것은, 그 욕망을 내 안의 모순, 그러니까 대의와 욕망의 대립.. 으로만 보는게 옳은가, 우리에겐 이런 대의와 욕망이 함께 있다, 고 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잘 설명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직 이 책을 몇 페이지 읽지 않았지만, 지금을 사는 여자들은, 내 욕망이 내 대의와 대립한다, 는 것에서 더 나아가있는데, 그 욕망의 원인 조차도 알고 있는데, 이 책, [생명의 여자들에게]는 욕망과 대의의 인정만 말하고 있는것인가, 에서 오는 것이다. 내 엉덩이가 누군가에게는 만져지기를 원해, 를 인정하는 데에서 끝나면 안되는데, 그런데 그 욕망은 왜 있는거지? 를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결국 닿게 되는 지점은 '어떤 남자가 내 엉덩이를 만지길 원하는 나의 욕망은 정말 내 것인가?' 일텐데, 이 서문만 보면 그게 아닌 것 같은거다.
아직 초반이니 더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