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지 아니한가> 에는 총각과 사랑에 빠진 중년여성이 나온다. 너무 오래전에 본 영화라 기억이 희미한데 이 중년여성 '오희경(문희경)' 에게는 고등학생인 아들 딸도 있었던 것 같다. 검색해보니 노래방 총각에게 반했다고 나오네. 여하튼 그녀는 총각과 사랑에 빠졌고 어느날 그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고는 여행캐리어에 짐을 싸서는 가출을 한다.
오희경으로서는 사랑에 빠졌으니 이것은 그가 제안한 밀월여행이어야 했지만,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며칠의 시간이 지난후 그녀는 다시 캐리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녀의 손에는 커피원두가 잔뜩 들려있었다.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는 그 총각으로부터 커피 강매를 당한 것. 그녀의 집에는 아직 커피내리는 기계도 없는데. 그녀는 키친타올을 필터로 쓰고 밥그릇에 담아서(역시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다) 커피를 내려마신다. 그렇게 그녀의 사랑은 막을 내렸다.
그녀가 커피를 사기까지는 많은 우연한 사건들이 있었겠지만, 그런데 그녀가 커피를 사게 되기까지는 가장 먼저 그녀의 외로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녀는 외로웠고 그래서 총각과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아이들도 있고 남편도 있지만 그녀는 외로웠고 공허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건, 그녀의 외로움을 눈치챘기 때문에 상대는 그녀에게 접근해 커피를 팔 수 잇었다는 것이다. 사기는, 피해자의 가장 약한점을 알고 건드리니까.
수사 재현물을 볼 때 알 수 있는 건, 범죄 피해자에게는 약한 구석이 있었고 가해자는 그걸 알고 있었다는 거다. 아직도 인상적인 건 승무원이 되고 싶었던 여자가 대학에 떨어지고 실망하던 터, 그 대학 교수라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 합격시켜주겠다는 말에 성범죄에 노출되는 거였다. 외부에서 보면 그건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제삼자들에겐 승무원이 되고 싶은 욕망이 당사자만큼 크지 않을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범죄의 피해자가 됐다는 걸 알고나서야 자신이 어쩌면 그렇게 당했는지에 대해 후회한다. 우리는 가장 약한 부분에 대해 공격당할 때 이성을 갖고 생각하기 힘들다. 흔들린다. 무너져내린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무얼 원하는지 어느 지점에 약한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사실 커피 강매는 외로움을 이용한 범죄로 치자면 애교에 가깝다. 커피, 샀으면 먹으면 되는 거니까. 중년여성 오희경은 내가 왜그랬을까 자책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그렇게 오래가지 않아도 될것이고 그 총각으로부터 배신감을 느꼈겠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치명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일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어느 날 고양이 꼬리를 보면서웃고 있는 제 자신이 더 허무하더군요. 나는 왜 가족과 웃지 못하고 고양이 꼬리를 보고 혼자 웃고 있나......"
순간 그의 외로움이 가슴에 확 들어왔다. 이 사람은 가족과함께 웃고 울면서 살고 싶은 이로구나.
그러다 마흔 중반이 되도록 집에만 있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을 때, 인생 별것 없다, 잘 노는 게 잘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나가보았다. 자리는 그저 그랬다. 다만옆 테이블에 있던 젊은 남자가 계속 쳐다보는 것이 신경쓰였는데, 아니나다를까 그 남자가 다가와 "이 폰 번호, 저만 압니다" 라면서 고가의 새 휴대폰을 놓고 가버렸다. 그 바람에 뜻밖의 사건이 시작되었다. 휴대폰을 돌려주기 위해 연락을 취하고 만났는데, 말이 잘 통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대화라는 것을 하는기분이 들었다. 만남은 거듭되었고 둘은 내연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함께 들어간 여관에서 강도를 당하고 말았다. 돈도 빼앗기고 사진까지 찍혔다. 그러고도 모자라 다시 전화가 와서 거액의 돈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이야기를 어렵게 털어놓으면서도, 피해자는 그 남자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형사의 훈련된 촉은 남자가 휴대폰을 주고간 행동에서부터 ‘진짜 선수‘라는 사인이 왔고, 여관에 강도가 들이닥친 상황까지 잘 짜인 계획이라는 판단이 서면서 위험한 사건이라는 사이렌이 마구 울려댔다.
하지만 나의 어설픈 추리로 고양이 꼬리보다는 사람을 믿고싶어하고, 먼길을 돌아 비로소 한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사해보면 다 알게될 내용을 미리 추정해서 피해자를 아프게 할 이유는 없을 것같았다.
가급적 피해자가 노출되지 않도록 수사와 재판 절차, 그리고 함께해야 할 과정과 시간을 설명하고 집을 나설 때까지 나도 피해자와 함께 숨죽였다. -p.113~114
<형사 박미옥>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박미옥 형사가 형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쓴 에세이이다. 지금은 명에퇴직후 제주도에서 책방을 꾸리고 살고 있다고 한다. 매 꼭지마다 자신이 맡았던 사건들과 그 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 그리고 어떻게 범인을 잡았는지 써있는데, 나는 위의 이야기가 박미옥 형사가 그런만큼 신경 쓰였다.
당연히 형사의 촉대로, 그가 처음부터 계획해 꾸민 범죄였다. 그리고 만약 형사가 아니었어도 저 얘기를 듣는다면 아마 당사자가 아니고 듣는 사람들은 '그 새끼가 범인이다' 라고 짐작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협박을 받고 있다고 신고한 여자도 내연관계의 남자를 의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금세 그 의심을 지웠을 것이다. 너무나 공허하고 외로운 인생에 찾아온 오랜만에 대화가 통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자신을 대하는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다는 걸 아는 일은 결코 달가울 리 없으니까. 박미옥 형사는 그 뒤의 그녀를 너무나 염려했다. 비로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안 여자의 마음을 떠올리는 것을 가슴아파했다.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그가 나를 대했던 시간들 동안 그 어느 한 순간도 진심으로 나를 생각했던 적은 없었을까, 를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너무나 외로운 마음에 드디어 의지할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니, 자신을 이용해먹을 생각이었다니, 그러면 그녀의 외로운 마음은 이제 어디에 기대야 할까.
그녀의 외로움이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끔 바깥으로 표현됐을 수도 있고 혹은 가해자는 아마 '누구든 걸려라'하는 심정으로 건드려본 것일 수도 있다. 여기와서 이렇게 있다면 걸려들기 좋을 것이다, 하는 그런 생각으로. 마침 여자는 지독하게 외로운 상태였고 범죄 피해자가 되었다. 외로운게 잘못이 아닌데, 그런데 그 남자의 접근을 차단할 수 없었다. 그녀는 외로움으로 인해 약해진 상황이었고, 외로움은 그녀의 가장 약한 부분이었으니까. 그녀가 범죄 피해자고 협박을 받아 무서웠던 시간들에 더해 , 나는 그녀가 그녀 자신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으로 인했던 선택과, 그 선택으로 인했던 짧은 시간의 설렘과, 그러나 그 후에 찾아온 협박까지를 내내 자책하며 떠올릴까봐 그게 너무 아프다. 부디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잘 살피기를.
일전에 정희진 선생님은 강연에서 '가장 무서운 건 외로움' 이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아직까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왜 그렇게 가장 무서운 것이라는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외로움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기 좋은 것 같다. 약한 상태에서는 다른 것들이 침투할 확률이 너무나 크다.
영화 <사랑과 영혼 GHOST> 에서 '몰리(데미 무어)'는 연인 '샘(패트릭 스웨이지)'를 잃고 슬퍼한다. 그런 그녀에게 샘의 절친인 '칼(토니 골드윈)'은 자주 찾아와 위로를 한다. 이미 오래 전의 영화라 더이상 스포도 아니겠지만, 칼은 샘의 직장 동료이자 가장 친한 친구라면서 샘을 살해한 사람이다. 그런 칼이 이제는 몰리에게 접근해 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거다. 그가 몰리를 유혹해야 겠다고 느낀 순간은 몰리로부터 '외로워요' 라는 말이 나왔을 때였다. 몰리는 샘을 그리워했고 그래서 울면서 외롭다는 말을 하는데, 그 때 칼은 친밀하게 다가가 그녀를 유혹하는 거다. 몰리는 그 유혹에 이끌리는 듯 보였지만, 그 상황에 옆에 있던 유령 샘의 분노로 고양이가 움직였나 사진이 움직였나, 무언가 움직이는 바람에 몰리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칼은,
그녀의 외롭다는 말을 기다렸다.
매 에피소드가 다 강력범죄의 이야기들이었는데,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건 사실 정액을 입에 물고 경찰서까지 찾아온 여성에 대한 것이었다.
봄볕 좋은 어느 오후, 그날도 당직이었던 나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우리를 찾는 일이 있을까 기다리던 참이었다. 두려운강력범죄는 밤에 주로 급습하는지라 긴장을 풀고 조금은 느긋하기까지 했던 한순간이었다. 그때 한 앳된 여성이 경찰서로들어왔다.
하지만 입을 열지 못한다. 입술을 앙다문 채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키며 안타까운 앓는 소리만 내뱉을 뿐이었다. 다친걸까? 아니면 피치 못하게 말을 못하는 상황이라도 있는 걸까?
갑갑함 속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던 그때, 여성의 입안에뭔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뭔가를 악착같이 물고 있는 것이었다. 급한 김에 휴지를 뽑아서 뱉어내도 되는 것인지 물어보았고그녀는 눈빛으로, 고갯짓으로 세차게 끄덕였다.
침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너무 가득하고 끈적하다. 얼른 물 한컵을 건네니 여러 번 입을 헹구고 나서야 비로소 호흡을 가다듬는다. 얼굴은 퉁퉁 부은듯했고, 넋이 나간듯 몸을 달달 떠는 여성을 보면서, 다그치기보다는 그냥 이게 무슨 일인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오후 4시경 집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남자가 그녀 앞에 멈추어서더니 슬며시 옆으로 다가서서는 옆구리에 칼을 들이댔다. 조용히 따라와라, 아니면 나는 찌르고 도망가면 그만이다. 목소리는 옆구리에 닿을락 말락한 칼날만큼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정류장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누군가 있었더라도 도와달라거나 소리칠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칼날은 가까웠고, 벗어날 길은 너무 멀었다. 꼼짝없이 범인이 이끄는 대로 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아파트의 울창한 화단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범인은 성폭행 후 유유히 휴대폰과 현금까지 빼앗아갔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 아픔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에게는 햇살 좋은 한낮의 오후가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암흑의 시간이었다. 피해장소가 이전엔 지극히 안온했던 일상의공간이라는 점도 안타까웠다. 늘 아무렇지 않게 이용하던 정류장에서, 집 주변 화단에서 이런 일을 당하면 피해자는 갈 곳이없어진다. 일상이 무너져내린다. 그런데 이 여대생, 대단하다.
범인이 입안에 남기고 간 정액을 물고 2킬로미터를 걸어 경찰서까지 왔다.
"그냥 뱉어버리고 갈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그간 제 나름대로 옳다고 믿는 일에 대해 주장하고 실천도 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당당하게 행동하지 못하면 영원히 나 자신에게 당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입을 악물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충격적인 일을 겪은 뒤 오만 역겨움이 다 밀려왔을 텐데, 그 비리고 더러운 것을 입에 담고 여기까지 오다니.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그녀의 행동에 답을주고 싶었다. -p.33~35
아아 진짜 인간이란 무엇인가. 세상이란 어떻게 굴러가는가.
악의 비열함은 바로 상대의 약함을 노린다는데 있다. 상대의 외로움 혹은 상대의 갈망등 가장 약한 지점을 노린다는 것, 그리고 약자를 노린다는 것. 나는 거기에 악의 비열함이 있다고 본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선택하지 않고 약한 상대를 선택한다는 것. 약함을 노린다는 것.
강간범은 여성을 칼로 위협하며 강간했다. 그런데 이 피해자는 그 길로 주저앉는게 아니라 자신이 공부하고 배운 걸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자, 그 힘든 상황에서 범인의 정액을 입에 물고 2킬로를 걸어 신고하러 온다. 다른 피해자의 도움까지 있어서 이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왜 어떤 사람은 약한 사람을 골라 혹은 약한 상태를 골라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가장 약해질 수 있는 순간에조차 이를 악물고 강해지며 악을 벌하려고 하는가. 진짜 인간 뭐냐. 강간을 당하기 전 칼이 옆구리에 느껴졌을 때부터 정말 무서웠을텐데, 더럽고 무섭고 다리가 떨렸을텐데, 그런데 기어코 경찰서까지 와서 정액을 뱉어내는 그 의지는, 도대체 어디서 발현되는걸까. 이 에피소드는 읽는데 정말 코끝이 찡했다. 어휴..
나는 인간의 악이 징글징글한데 이렇게 또 어떤 인간의 강인함에 숙연해지곤 한다.
어휴, 인간 진짜 뭐냐, 진짜..
남자는 1970년대 해외 출국이 제한되어 있던 시절에 유학을떠난 부유층 자제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파티에서 처음 마약을 접했을 때만 해도 저게 도대체 뭔데 그렇게 금지하는 걸까 하는호기심이 드는 것과 동시에, 설마 저까짓 것 하나 내가 이기지못하랴 자신했다고 한다. 그러니 인생에서 한 번쯤 경험해보는것도 괜찮지 않을까, 딱 한 번만 하고 다시는 안 하면 된다 장담하며 첫 경험을 했단다. 그러나 딱 한 번의 마약은 없다. 그는 다음 파티 때 이미 누구보다 먼저 팔을 내밀고 주사를 맞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약이 인생을 지배했고 점점 망해갔지만, 그럼에도 마약에 대한 열망은 참고 견디고 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거의 자동적인 반사에 가까웠다. -P199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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