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스무시간이 넘는 비행이니 책을 다섯권이나 챙겨갔지만, 오오 나란 여자...한 권도 보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에야 비행기에서 뻗을 걸 알았지만, 아니 정말 넘나 뻗어버림.. 밥 먹을 때만 깼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왜 잠을 자죠? 흠흠. 여하튼, 그렇게 왕복 다섯편의 영화를 봐버리는데, 로마에서도 아이패드로 자기 전에 친구랑 새벽까지 영화를 본 걸 포함하면 여섯편을 보았다. 세상에..
그중에 가장 좋은 영화는 단연 <패스트 라이브즈> 였다.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도 짤막하게 얘기하게 되겟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는 단독으로 다뤄줘야 한다. 이 영화는 내가 개봉당시부터 보고 싶어했었는데 놓쳤고 그래서 계속 봐야지 벼르고만 있었는데, 세상에 기내에서 상영하는 겁니다. 눈물이 났죠. 어머 이건 봐야해!
제목 패스트 라이브즈는 '전생', '지나온 삶' 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나는 그저 지나온 시간, 이라고 해서 과거를 의미하겠거니 하고 봤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전생'과 '인연'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해성(유태오)'과 '나영(그레타 리)'는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며 각별히 친했는데 나영의 온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좋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지만 헤어지게 되고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12년 후, 나영은 페이스북을 통해 해성이 자신을 찾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렇게 그들은 연락하게 되어 12년만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매일 전화하는 사이가 된다. 12년 후의 나영은 뉴욕에 다시 이민을 와있었다. 극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아직 제대로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2년 전에 친하게 지냈던 해성과 연락이 닿아 그들은 매일 연락하는 사이가 되는데, 그것은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시차가 달라 자다가도 전화를 받아야 했고 친구들과 있다가도 전화하러 가야했다. 그러니까 이 통화는 그들에게 지금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서로가 너무 소중한 것이다. 이 전화를 놓칠 수 없어! 내가 아무리 자고 있어도 니가 오늘 수업 들어가야해서 지금 밖에 시간 없다고 하니까 지금 통화해야지! 막 이렇게 되어버렸단 말야? 그러다 돌연 나영이 우리의 관계를, 즉, 이 통화를 이제 그만하자고 말한다. 해성은 이유를 묻고, 나영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뉴욕으로 두번째 이민을 왔어. 극작가가 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건데 요즘 나는 한국가는 비행기티켓만 알아보고 있어."
하아-
이거 뭔지 너무 알지, 완전 알지. 우리 누구나 다 이런 경험 살면서 한번쯤은 있지 않나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에게 그만두자고 말하는 이유가,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너무 몰두하고 있어서이다. 내 삶에서 당신이 너무 중요해지고 커져서 내가 하고자 하려고 했던 일에 몰두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동시에 두가지를 한꺼번에 신경쓸 수 없어서, 그래서 일단 나를 챙기려고 하는 거, 이거 뭔지 알잖아요, 다들. 알잖아요? 알죠? 알잖아!
나도 이렇게 상대에게 몰두했던 적이 있고, 그렇게 몰두하는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때가 있다. 그건 내가 싫었다는 게 아니라, 이러면 안되는데, 해서 내 자신을 좀 다독이고 싶었던 거였다. 내가 나를 좀 다스리기 위해 썼던 방법은 그 당시에 백팔배와(응?) 컬러링북 색칠하기(응?) 가 있었다. 그런데 컬러링북 색칠하기는 내 적성에 맞진 않았... 여하튼 그렇게 내 정신이 온통 상대에게 쏠렸던 때가 있어서 자꾸만 브레이크를 걸어야 했더랬다. 브레이크는 그 쪽이 먼저 걸긴 했지만... 하여튼 그렇게 해성과 나영은 다시, 멀어진다.
그리고 또 12년의 시간이 흐른다.
나영은 글을 쓰기 위해 갔던 장소에서 만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상황. 그렇게 부부로 지내고 있는데 12년 만에 해성이 뉴욕으로 나영을 만나러 오기로 했다. 해성도 이미 나영이 결혼했고 남편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렇게 그들은 재회한다. 아주 오랜만에 재회해서 함께 뉴욕을 걷고 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나영의 남편은 이들의 이 특별한 관계를 당연히 부러워한다. 너무 특별한 사이잖아. 어릴적에 헤어졌단 12년후에 연락이 닿아 신나게 연락하고 그러다 다시 끊어졌는데 또 12년 후에 만나기 위해 뉴욕까지 날아오다니. 이 사연 자체가 특별하잖아. 그리고 나영의 남편은 해성을 만나보고 싶어한다. 그렇게 나영과 해성 그리고 나영의 남편이 한자리에서 만난다.
나영의 남편은 좋은 사람이다. 이 관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해성은 나영의 남편과 있는 자리에서 나영에게 말한다. "네 남편이 좋은 사람인게 이렇게 아플 줄 몰랐어." 라고. 그리고는 인연과 전생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이번 생애서 우리의 인연은 딱 이만큼 까지인거라고 말한다. 24년전에 나영은 해성과 좋아하다 이민을 갔고 12년전에 나영은 연락을 끊자고 말했다. 그런 나영은 해성에게 떠나는 사람이다. 해성은 나영에게 "너는 나에게 떠나는 사람이지만 네 남편에게는 머무르는 사람이네." 라고 말한다. ㅋ ㅑ ~
소주 없이 들을 수 없는 말 아니냐, 진짜.
그렇다.
나라는 한 인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식으로 정의되고 기억된다. 그건 악인일 수도 있고 선인일 수도 있는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으로 떠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머무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영이라는 한 인간이 해성에게는 자꾸 떠나는 사람이었다. 잡힐듯하다 떠나고 잡힐듯하다 떠나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뉴욕까지 만나러 왔지만 나영은 해성의 곁에는 있을 수 없는 사람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나영의 남편이 나영을 옆에 두기 위해서는 큰 애씀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에 그들이 거기에 함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미래를 함께 하기로 했고, 그렇게 계속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남편에게 나영은 '머무르는' 사람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내게서 자꾸 떠나가는 사람, 결코 잡히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쉽게 곁에 머무르는 사람이 되어주는 그런 일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을 내 옆에 두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어떤 일은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라면 더 그렇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내게서는 떠나고 그러나 별 애씀 없이도 다른 사람의 곁에는 머무르는.
해성은 이걸 받아들인다.
응, 내게서 떠나는 사람인 너는 네 남편에게 머무르는 사람이지. 우리는 이번 생애서는 안되는 인연인거고. 그렇게 격렬한 감정을 품었던 사람과 이제 진짜 안녕을 하고 돌아선다. 그런 해성을 바래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나영을 보고, 그 마음이, 그러니까 돌아서 가는 해성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해성이 그걸 받아들이고 돌아서는 걸 봐야 하는 나영의 마음이 어떤 것일지, 그것은 정말이지 여러가지가 복합되어 있지 않을까. 아쉬움 후회 미련 미안함 안타까움.. 손 한 번 잡지 않았던 이들의 사랑이 질척댐 없이 아쉽게 돌아서는데, 나는 그만 눈물이 났다. 그 눈물은 무슨 눈물이냐고 물으면 그 감정의 정체는 모르겠다. 왜 울어? 그러면 나도 몰라, 이렇게 되는 그런 눈물인거란 말이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그런 눈물.
해성을 보내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앞에 남편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을 보자마자 나영은 남편에게 기대어 울어버린다. 남편은 그런 나영을 가만히 안아준다.
어떤 인연은 먼 공간을 오랜 시간을 거쳐 이동해도 연결되지 않는다. 어쩌면, 먼 공간을 오랜 시간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연결되기 힘든걸지도 모르겠다. 나영이 남편과 연결된건 같은 공간에 있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장소에, 함께. 그것이 그들을 그 뒤로도 함께 하게 만들어줬다. 그러나 나영과 해성은 같이 있길 원한다면 비행기 시간을 알아보고 조율해야 했다. 아직 학생이고 꿈을 향해 달려가야 했던 그들에게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쉬운 일이었다 해도 달라졌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이 어떤 상태였든지 간에, 서로를 향해 마구 달려갈 수 있었다고 해도, 영화에서 말한 것처럼 이번 생애 인연이 여기까지라면, 별 수 없다. 돌아설 밖에..
내 곁에 머무르길 가장 원했던 사람은, 나로부터 늘 떠나는 사람이었다.
잘 가
가지마
행복해
떠나지마
나를 잊어줘 날 잊고 살아줘
나를 잊지마
나는 괜찮아
아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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