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뷔페식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가 샐러리를 후무스에 찍어 맛있게 먹었더랬다. 그 레스토랑에 가면 후무스랑 샐러리 혹은 오이를 먹게 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 때마다 참 맛있게 먹는다. 후무스는 병아리콩으로 만든 소스인데, 흐음, 이거 맛있단 말야? 요즘 생야채 안먹는 내가 후무스에 찍어서는 좀 먹는단 말이지? 내가 만들어볼까? 하다가 어쩐지 이건 좀 어려운 과정일 것 같아서, 그보다는 '판매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검색해보았다. 역시나 팔고 있었고 나는 잽싸게 구매했다. 헤헷. 그러면 샐러리랑 오이도 사야지!
후무스는 컬리에서 샀다.
샐러리는 마트에서, 오이는 시장에서 샀다. 샐러리 썰어서 접시에 담는데 싱그런 냄새가 후욱- 코로 들어오고 공기중에 떠다닌다. ㅋ ㅑ ~ 엄마 아빠 찍어서 드렸는데 아빠는 먹을만하다 하셨지만 다시 안드셨고 엄마는 괜찮은데? 하면서 잘 드셨다. 나도 잘 먹었다. 후무스 너무 작은 거 아닌가 했는데 막상 뜯어서 찍어먹다보니 제법 양이 되더라.
이걸 어제 소주 한 병 와인 한 병과 먹었는데, 곁들인 음식은 연잎삼겹살. 역시나 컬리에서 샀다. 연잎삼겹살은 그냥 전자렌지에 4~5분만 데워내면 되는거라 먹기가 세상 간편해서 가끔 먹는다.
엄마가 시장에서 상추도 사오셔서 생마늘과 함께 싸먹기도 했다. 그렇게 소주 한 병 비워내고 와인도 한 병 비워낸 것. 그런데 이거 먹다 보니 파김치랑 같이 먹었는데도 살짝 느끼했고, 결국 엄마랑 나는 컵라면에 물을 부어오는데... 하하하하하.
이게 어제 저녁이었다면 어제 간식은 크로아상 샌드위치 였다. 냉동실에 두었다 자연해동으로 먹을 수 있는 크로아상인데 나는 여기에 잠봉을 넣어 샌드위치로 만든거다. 바게트를 뺀 잠봉뵈르 샌드위치 준비물이 다 있던 터라 뚝딱 만들어냈다.
맛있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보니, 유니스의 식사 준비가 참 좋았다. 유니스여..
그 일이 끝나자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커버데일 가족이라면 오후 한 시에 먹는 식사를 점심 식사라고 불렀을 테지만. 그들은 자신의 가정부가 대낮에 속을 든든하게 해 주는 뜨거운 음식을 얼마나 절실하게 먹고 싶어 했는지 절대로 알지 못했으리라. 유니스는 냉동실에서 커다란 스테이크 한 조각을 꺼내 기름에 구웠다(석쇠가 아니라 기름이었다). 깍지콩과 당근, 파스닙(배추 뿌리같이 생긴 채소)을 삶는 동안 감자도 튀겼다. 뒤이어 애플 커스터드 크림을 얹은 애플 푸딩에 비스킷과 치즈, 진한 홍차도 곁들였다. -p.91
'속을 든든하게 해 주는 뜨거운 음식', '절실하게', '커다란 스테이크', '기름에 구웠다', '삶는 동안 감자도 튀겼다', '뒤이어 애플 커스터드 크림을 얹은 애플 푸딩에 비스킷과 치즈, 진한 홍차도 곁들였다' .. 아, 이 구절은 아름다운 단어가 참 많이도 들어가있다. 유니스여, 그렇게 잘 먹고 힘도 잘 쓰는데, 당신이 글만 읽을 줄 알았어도.. ㅠㅠ 너무 안타깝네요 ㅠㅠ
음 그런데 잘 모르겠다.
글을 읽을 줄 알면 몰랐던 때보다 더 많은 걸 보고 익힐 수 있을 것이고 거기에 외국어를 하나 더 할 줄 알게 된다면 세상은 분명 더 확장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도덕 혹은 윤리 감각에 있어서도 그럴까? 그 점에 있어서는 잘 모르겠다. 읽고 이해하는 일이 그 후에 내 사상에 변화를 주는 것일까? 유니스가 글을 읽을 줄 알았다면 일가족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이랄까 개념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다른 식의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 아니었을까? 아니면, 글만 읽을 줄 알았다면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을까? 여전히 여기에 대한 답은 모르겠다. 그런데, 하여간 본인이 먹을 식사 준비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어서, 만약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면, 유니스도 먹고 사는 일에 대한 글을 쓰면서 다른 식의 삶을 살아갈 수는 있었겠지. 책으로 가득한 집이 공포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만약 내가 글을 읽을 줄 몰랐다면 윤리 감각에 대한 개념이 더 약해졌을까? 감각은 글로써 습득하는걸까? 잘 모르겠다.
여하튼 나만큼이나 유니스도 자기 자신을 잘 먹이는구나, 했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유니스가 더 잘 먹는 것 같긴 하지만.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올림픽공원을 뛰고 집에 돌아오는 길, 아 맞다 정희진 쌤의 매거진 발행되었지? 하고 듣기 시작했다. 자, 뭘 먼저 들어볼까 하다가 정혜실 작가가 나온 코너를 선택했다. 정혜실 작가는 [우리 안의 인종주의]라는 책을 썼다고 하는데 오 이 책 읽어보고 싶다, 하고 검색해보았는데 아니, 2023년에 나온 책이네? 나는 왜 모르고 넘어갔지?
지난주에 여성학/젠더 책에 신간은 뭐가 나왔나 훑다가 마리아 미즈의 신간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
아니, 마리아 미즈라니. 이건 사야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너무 감탄하며 읽었는데 그런 마리아 미즈의 신간이라니. 이걸 어떻게 사지 않고 넘어간단 말인가!
어떤 감각, 어떤 선을 놓지 않기 위해 혹은 잊지 않기 위해 혹은 잃지 않기 위해 간혹 꺼내들어야 하는 작가가 있는것 같다. 그건 전작주의를 하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작가와는 좀 다른 개념인데, 나에게는 '반다나 시바', '장 지글러' 가 있고 이제 '마리아 미즈'가 있다. 나란 인간은 지독하게 개인주의적이고 또 자본주의적인데 가끔 나에게 브레이크를 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내가 내 세계에 침몰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러지말고 세상을 봐야한다고 이 작가들이 있는 것 같다. 반다나 시바를 읽고나서는 어쩌면 그룹지어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장 지글러를 읽고 나면 생애 일정부분은 난민들 옆에서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일에 보탬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리아 미즈는 자본주의에 제동을 걸어줄 것 같다. 워워, 너 너무 몰두하고 있네 너무 열심히 자본주의적이야, 멈춰, 하는 것 같달까. 하여간 마리아 미즈 님 좀 짱이신듯. 마리아 미즈 사야겠다... 라고 쓰면서 역시 그러나 이것도 소비가 아닌가.... 하게 되네요?
일요일이 가고 있어서 너무나 아쉽다.
자, 이젠 무슨 책을 읽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