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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는 생활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평점 :
이 소설집의 모든 단편들은 '너'를 관찰하며 쓰여진다.
나와 처음 만난 너, 길고양이에게 신경을 쓰는 너, 나를 또 만나길 원하는 너, 나와 함께 살기를 원하는 너, 오지랖 넓은 너,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너, 혹은 언제나 할 말을 하는 너,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너, 하고자 하는 바를 하려는 너 등등. '나'는 그런 너와 함께 살며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할 때도 있고 불만을 대신 드러내줄 때도 있으며 얹혀사는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 배려하고 존중해줘야 하는, 호의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내'가 있고, 싫지만 알겠다고 말해야 하는 '내'가 있다. 어쩔 수 없이 너를 만날 수밖에 없고 어쩔 수 없이 너를 견뎌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너를 참아내야 하는 내가 드러나는 건, 모두가 '너'를 보며 말한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너'를 말하는 순간 드러나는 건, '너가 그런 사람이다'가 될 수도 있겠으나, 더불어 '그런 너'를 말하는 '이런 나'이기 때문이다.
왜 그걸 견디느냐고 진작에 헤어졌어야 하는데, 그걸 왜 헤어지지 못하냐고, 왜 그런 취급을 당하고도 그 사람 옆에 있냐고, 독자의 입장에 있던 내가 끼어들어 말을 얹으려다가, 그때야 알았다. 아, 책속 화자는 '너'에 대해 말하지만, 나는 책속 화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있구나, 하는 것을. 그제야 선명해진다. '너'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국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는 것.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처럼,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 누누이 얘기하지만 어떤 것을 욕으로 쓰느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준다.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었던 나의 성별을 가지고 욕으로 쓰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그걸 흠으로 보고 있다는 깊은 여성혐오가 내재되어 있음이 드러나는 것처럼, 상대를 비하하는 그 모든 지점에는 그렇게 보는 '내가' 있는 거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같이 어울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고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자신의 소설을 빌어 말한 적이 있다. 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당신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해준다고 말이다.
“당신이 그런 쓰레기한테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이 당신에 관해 뭔가를 말해준다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다시 올리브》, p.265
이 모든 것이 나에 대해 말해주지만 그러나 이것들만이 나에 대해 말해주는 것만은 아니다. 너에 대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너를 어떻게 보고 너를 좋아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도 나에 대한 것은 드러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느냐로 내 결핍이 드러나는 것처럼,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으로부터 그리고 결국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와 헤어지고 누구의 옆에 머무르느냐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여지는 것.
너에 대해 말하는 이 소설에서 말하는 나를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그런데, 만약,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이 지금과 달랐다면 그때도 '그런 너'를 보는 '이런 내'가 있을까는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된다. 그들이 만난 곳이 재개발을 앞둔 곳이 아니었다면? 광장이 생긴다고 해놓고서 개인 소유지가 되는 곳이 아니었다면? 언덕을 올라야만 비로소 나오는 집이 아니었다면? 다시 말해 그들이 청담동에서 만났다면, 대치동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그래도 '그런 너'를 견디는 '이런 내'가 있을까? 애초에 '그런 너'가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런 나'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너를 좋아하는 것 혹은 지금의 너와 헤어지는 것, 이 모든 것에도 나의 공간적 배경은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나의 사회적 계급은 결코 나랑은 그리고 너랑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친구의 사무실이 오픈했을 때 냉장고를 사달라는 말에 당황하고 그리고 그것을 할부로 결제하면서, 그런데 그 친구는 내 친구가 아니라 네 친구잖아, 같은 생각을 하면서,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건 '그런 사람하고 왜 함께인거야, 헤어져'이지만, 그런데 애초에 냉장고쯤은 아무렇지 않게 사줄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그때도 그 상황에 불만과 갈등이 또 쌓이게 될까? 너를 말하는 내가 보이는 이 소설은 결국 너라는 계급을 가진 나라는 계급의 사람을 드러냄에 다름 아니다. 가난한 동네에서 돈이 없어 점점 더 외곽의 집을 구해야만 하는, 좋은 집이라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좋은 집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해야만 하는 환경에서 사는 이런 계급 속의 너와 나, 그런 우리. 내가 너를 좋아하고 혹은 싫어하는 지극히 내 주관적이고 내 기준이고 내 감정인듯한 이 행위가 그런데 정녕, 내 고유의 나만의 온전한 선택이랄 수 있을까?
이 모든 '내' 감정은 결국 내 계급이 끼어들어 하는 일이다.
계급이 달랐다면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완전히 다르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니, 아예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