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브에 <박하경 여행기> 라는 8부작 드라마가 있다. 매회 25분 정도 분량, 이나영 주연이다.
극중 이나영은 국어교사이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 훌쩍 여행을 떠난다. 주말에 당일치기로 떠나는 여행, 아침에 가서 저녁에 돌아오는 거다. 나도 아직 2회까지 밖에 보지 못했는데 해남, 군산, 부산, 제주 등등으로 떠나는가 보았다.
1회의 중간쯤 보다 멈추고 안보고 있었는데, 며칠전에 김혜리 기자의 팟빵에서 이 드라마를 다루었다. 이 드라마를 다루는 코너의 게스트는 이 드라마를 세번째 정주행 한다고 하며 2회차의 '애매한 재능'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듣다말고 나는 웨이브로 가 드라마를 재생했다. 그러니 팟빵은 멈춤 상태. 2회차는 군산이다.
<가이드 투 러브>라는 로맨스 영화에서 여행 가이드를 맡은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에게 관광객이 되지 말고 여행자가 되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관광객은 삶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여행자는 삶을 경험하길 원하죠."
그 말을 듣고 내가 했던 여행은 확실히 여행자의 것이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여행은 남들 다 가는데를 나도 간다는 데 있지 않았으니까. 일단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훌쩍 떠나서 그 곳의 거리를 걷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으니까. 걸으면서 보고 싶었다. 어딘가 목적지를 정해두고, 가능하면 그곳으로 걸어가는 일. 종아리가 뻐근해지도록 걸으면서 낯선 환경에 나를 던져 넣는 일. 둠칫 두둠칫. 그것이 나의 여행이었다.
박하경의 여행도 다른 사람들의 여행과는 좀 다르다. 템플 스테이를 가지만, 스테이, 그곳에서 잠을 자는 건 안한다. 당일치기인 만큼 절에 도착해 그곳을 걷고, 사찰 음식을 먹고, 명상을 한다. 으레 '거기까지 갔으면 그건 하고 와야지' 하는 것들로부터 그녀는 자유롭다. 나는 여행갈 때 다른 사람들이 내게 조언이랍시고 '거기까지 갔으면 그건 꼭 하고 와' 라고 하는 말들을 정말 듣기 싫어한다. 캡 싫어 짱 싫어 왕 싫다. 내가 뉴욕까지 가서 그저 숨만 쉬고 온다한들 남들이 알바인가. 내가 그걸 원해서 간다는데, 내가 거기에서 만족한다는데, 왜 뉴욕갔으면 구겐하임 보고 와야지, 이런거 하는건지 모르겠어. 으. 내 여행은 내가 합니다. 뭐, 그렇다는 거다. 어쨌든, 박하경은 해남가서 템플에 도착하고 또 템플에서 스테이는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는 거다.
2회차는 군산인데, 그곳에는 전시를 보러 갔다. 자신의 옛제자 '연주(한예리)'가 전시회를 한다는 것. 꽃다발까지 준비해 갔는데 전시가 열리는 곳은 까페였다. 손님도 없고 전시를 관람하는 사람도 없는 그런 까페. 커피 손님이 오면 커피를 내리고 까페 한 구석에서는 타로 점도 봐주는 그런 까페에서, 예전 제자가 그림들을 걸어두고 전시하고 있었다.
그림을 보며 좋은 말을 해주고 싶지만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박하경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마디 말들을 해주지만, 사실 그림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세 명의 친구들이 오고 저녁 무렵에는 몇 명 다른 사람들이 온 게 전부. 그들 앞에서 연주는 전시회 개막쇼를 한다. 느린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주문을 외우는 거다.
우라파 라구라구
아 진짜 빵터졌네. 저거 원래 있는 말인가? 모르겠는데 몸을 움직이다가 갑자기 우라파 라구라구 하는데 아 진짜 너무 웃긴거다. 분위기 완전 싸해지고, 관람객으로 온 어린아이는 엄마에게 '엄마 저 사람 왜 저래?' 한다. 정말 '저 사람 왜 저래?'가 절로 나오는 행위예술인 거다. 그 분위기에 나도 적응 안되고 그곳의 사람들도 적응이 안되는데, 연주 친구중 하나가 박하경에게와 속삭인다. 애매한 재능이 사람 미치게 하는 거라고, 예전부터 뉴욕에서 전시할거라 큰소리 쳤는데 이게 뭐냐고, 선생님이 이제 쟤 좀 그만 하라고 말리라고 말이다.
나였어도 이 친구처럼 생각했을 것 같다. 야, 애매한 재능이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구나. 확 튀는 재능이라면 성공할 것이지만, 애매하니까 계속 해보게 되고 그런데 성공은 못하고. 전시라고 해야 까페에서 하는 게 전부이고 딱히 돈도 벌지 못하는 삶. 그렇게 늙어가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우라파 라구라구 가 너무 어색하고 어이가 없어서, 아 진짜 저런 사람이 친구라면 좀 또라이 같아 피하겠는데, 어색어색하다, 이러면서 웃었다. 그런 한편 '애매한 재능'이란 건 보통의 사람에게 꽂힐 수 밖에 없는 단어가 아닌가 싶은 거다.
애매한 재능.
그래, 애매한 재능이 사람 미치게 한다. 극 속의 연주처럼 뉴욕 전시를 꿈꿨지만 지방의 까페에서 친구들만 간신히 불러 관람하는 그런 전시. 그런 전시가 반복되면 돈은 누가 버나, 그 예술을 지속할 동안 생계는 누가 책임지나. 애매한 재능으로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고 시도하는 것은 과연 꿈을 위해 달려가는 거라고 좋게만 봐줄 수 있는걸까? 그 꿈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대신 노동을 해서 누군가 대신 돈을 벌어야 되는게 아닌가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건 바로 그 애매한 재능일 것이다. 신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재능을 한가지씩은 허락한다는데, 어느 정도 인생 살아온 사람들은 '그건 다 구라다!' 라는 거 이미 깨닫지 않았나. 재능 같은 거 없지 않나. 설사 있다 해도 그거 아직 발견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지 않나. 또 있다 해도 누구나 다 김연아가 될 수도 없고 누구나 다 정희진이 될 수도 없고, 누구나 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될 수도 없지 않나. 사실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은 극소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매한 재능으로 어떻게든 또 시도하고 또시도하지 않나.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애매한 재능이구나 하는 생각에 예술을 접고 생계를 위해 적성에 맞지 않는 노동을 하고 있을 것이고.
내가 가진 것도 애매한 재능이겠구나 싶었다.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 못 쓰지는 않는 재능. 그러니까 글을 아에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너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한 걸 표현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들으니 못쓰는 축은 아닐 것이지만, 그러나 알라딘에서만 읽히니 ㅋㅋㅋㅋㅋㅋ애매하고도 애매한 재능 ㅋㅋㅋㅋㅋㅋㅋ그렇다면 알라딘에서만큼은 일등이냐? 그것도 아님. 겁나 애매하고 애매하고 애매한 재능인 것이다. 아아, 우린 대부분 다들 애매한 재능을 가지고 도전하거나 애매한 재능이라서 포기하거나 그렇게 사는 거 아닌가. 하하하하하하하하. 애매한 재능. 이것은 없는 것보다 나은 걸까 아니면 차라리 없는 게 나은 걸까. 연주는 언제까지 그렇게 동네 까페에서 전시하며 살 것인가. 그런데 까페에서만 전시하며 사는 것이 나쁜 것인가? 꼭 뉴욕에서 전시해야만 가치 있는 것인가?
어제 친구를 만나 이 애매한 재능에 대해 말했는데, 친구는 누구나 다 도스트예프스키가 될 필요는 없지 않나, 하고 얘기해주었다. 맞다. 도선생 님이 아니라면 그 글에 혹은 책에 의미가 없나? 널리 두루 읽히는 글이 아니어도 단 두 명에게는 뭔가 인상적으로 남을 만한 글이 되었다면, 그건 또 그대로 의미가 있는게 아닌가. 지방의 작은 동네 까페에서 전시를 해서 얼마 안되는 사람만이 왔어도, 그런데 그들 중 누군가가 그 그림에 영향 혹은 감동을 받았다면 그건 그대로 의미가 있지 않나. 또한 행동, 행위했다는 것에도 의미는 있다. 나는 무언가를 어쨌든 했다, 가만 있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의미 플러스 돈이 있으면 더 좋지않나? 이왕이면 의미에 돈까지 함께 오면 더 좋지 않은가. 돈이 안오는데 의미는 있는 건, 반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나는 너무 자본주의에 찌들었나. 자꾸 돈 생각하네. 네, 돈을 정말 좋아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애매한 재능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거나 혹은 팽개쳤을 텐데, 그렇다면 애매한 재능을 가지고 시도하고 또 시도하고 달려드는 연주를 나는 응원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그 공연을 보면서 솔직히, 이제 그만 월급쟁이를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크- 우라파 라구라구 라니 ㅠㅠ
우라파 라구라구 때문에 한참 웃으며 보았는데, 참 이상도 하지. 이 드라마가 자꾸, 내내 생각난다. 그냥 사람들이 이 2회 라도 꼭 봤으면 좋겠는거다. 재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애매한 재능, 이것에 대해 자꾸 생각해보게 되는 거다. 묻고 답하게 되는 거다.
그래 애매한 재능이 사람 미치게 하는 거지.
나에게 있는 것도 애매한 재능이지.
애매한 '재능' 일까?
애매한 재능이라는 것도 너무 과대평가 아니야?
애매한 재능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아?
그래도 재능인데 없는것보다 낫지 않아?
괜히 애매하게 있어서 생계가 힘들어지는 거 아니야?
그렇게 내내 생각나는 거다.
무엇보다 이나영이 극속에서 부른 노래가 너무 인상 깊었다. 가사가 너무 좋아서 오, 이 드라마 때문에 만든 노래인가, 하고 검색해 보았는데, 기존에 있는 노래였다. '백현진'의 <빛>. 정작 백현진이 부른 분위기는 이나영의 분위기와 좀 다르게 느껴졌는데, 노래가 너무 좋아서 최근에 반복해 들었다. 듣노라니, 이 드라마의 2회차는, 이 노래를 듣고 영감을 만든 드라마가 아닐까 싶어지더라.
그리고 저 몸의 움직임 어쩔.
어제 만난 친구가 '나는 필리스 체슬러랑 맞는 것 같아' 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에 나는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랑 맞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거다. 나는 누구랑 맞지? 모르겠다. 다음에 친구가 또 그렇게 말한다면, 나 역시 '나는 ***랑 맞는 것 같아' 이런거 하고 싶은데, 어제 친구랑 헤어지고 오늘까지 곰곰 생각하며 여성주의 책 꽂힌 책장을 보는데, 아무리 봐도 나랑 맞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여성주의 책장에 꽂히지 않은 사람 중에는, 아이고, 내가 생각햇던 것들을 알고보니 이미 오래전에 다 정리해준 분이 계셨으니, 그 이름 한나 아렌트.. 아직 한나 아렌트 제대로 읽지 못한 쪼렙이지만, 멍청한 건 죄다, 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사유하지 않은 것은 악이다' 라는 말을 했던 한나 아렌트 떠오르니. 아, 나 사실 한나 아렌트랑 맞는 거 아닌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고 해놓고 너무 웅장한 사람이라 잠깐. 쪼그라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그래서 친구랑 헤어지고 교보에 갔다. 친구랑 맞다는 필리스 체슬러 원서 살라고. (네?)
그런데 교보에는 필리스 체슬러 원서가 단 한 권도 없더라.
그래서 알라딘에서 샀다.
아, 그리고 어제 영화 <바비> 봤는데 ㅋㅋㅋ 내가 보통 영화보면 뭔가 생각하는 게 있고 그래서 페이퍼를 쓰게 되는데, 이건 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착한 영화다. 페미니즘, 가부장제 라는 단어가 노골적으로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 착한 영화다. 그냥 착한 영화다. 온건하시네요, 그레타 거윅 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건 아마도 제가 파이어스톤을 읽고 있는 중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 뭐지, 이갈리아의 딸들, 허랜드를 짬뽕해놓은 영화 같다. 가부장제는 세상을 잠식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아 근데 거기 ㅋㅋ 존 시나(프로 레슬러)가 갑툭튀 ㅋㅋㅋㅋㅋㅋ그것도 인어로 나와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웃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헬쓰 인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만 쓸라 그랬는데 자꾸 뭔가 생각나네.
어제 친구랑 음식점 나와서 광화문역으로 가야되는데 지도를 봐도 방향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는 거다. 그런데 마침 경찰 두 명이 보이길래 가서 물었다. 광화문 교보문고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요? 그러자 지도앱을 켜려고 하길래, 그러면 그냥 우리가 찾겠다고 할랬더니, 아 교보문고요? 하고는 여기로 쭉 가서 왼쪽으로 쭉 꺾으세요, 하는 거다. 그래서 네 고맙습니다 하고 가려는데,
가다 보면 또 경찰 있을 거예요. 그러면 또 물어보시면 친절하게 답해줄겁니다.
이래가지고 빵터져서 길에서 소리 내서 웃었다. 경찰들도 같이 웃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왜 주말에는 책 읽을 시간이 있어도 잘 안읽을까? 먹기만 오지게 먹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