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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짐승아시아하기 ㅣ 문지 에크리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평점 :
오래전에 김혜순 시인의 시집 <당신의, 첫>을 읽었더랬다. 지금 검색해보니 김혜순 시인의 글을 읽은건 그게 유일했다. 이 책,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그야말로 지금의 나를 그리고 이곳의 여성들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 골랐는데, 읽으면서 이건 영락없이 시인의 글이로구나, 했다. 구절구절마다 은유로 가득하고 책 한권이 통째로 은유라 해도 좋을것이다. 시인의 문장이라는 것은 아름다우나 다소 난해하기도 해서 어느정도 읽으면서는 이 책은 좋은 책이지만 나에겐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티베트, 인도, 실크로드, 산동성, 운남성, 산서성, 청해성, 미얀마, 캄보디아, 고비사막, 타클라마칸사막, 몽골 을 다녀오며 쓴 글인데, 매 꼭지 지금 시인이 머무르는 곳의 지명이 나와 있질 않아, 그저 글에서 설명한 걸 읽으며 아 여기는 인도겠구나, 여기는 미얀마겠구나 했다. 그 지점이 시를 잘 읽지 않고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친절하지 못하게 느껴졌는데, 나는 시 라는 문학장르에 있어서도 딱히 친절하다고 느끼질 않는 바, 이렇게 읽는 사람이 구절을 받아들이며 짐작하게끔 하는 거, 그게 바로 시인들의 글쓰기인가 싶은거다.
그렇게 난해하게 읽어갈 때쯤, 그러나 난해한 글, 어쩐지 모호하고 정확하게 와닿지 않는다는 불만이 쌓여갈 때쯤, 아! 하고 날카로움을 느끼는 문장을 만난다. '인도'라고 한 번도 언급되진 않지만 인도임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모든 내용들에서, 결혼에 지참금을 준비해야 하는 여자와 그리고 지참금을 받는 남자들에 대한 구절이 그랬다.
이들의 아버지들은 돈을 주고 남편을 사서 이들에게 주었다. 남편들은 돼지들처럼 등급이 있다. 등급이 높을수록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아버지들은 딸이 태어나자마자 딸의 남자에게 줄 돈을 저축한다. 지참금은 가방에 넣어져 현금으로 전해진다. - P124
돈이 있어야 여자들은 시집을 간다. 비록 그 돈을 여자들이 직접 만져보는게 아니라 이 남자에게서 저 남자에게 건네지는 것이라해도 어쨌든 돈이 있어야 한다. 딸들의 아버지들은 딸들을 시집 보낼 남자에게 돈을 건넨다. 그런데 그걸, '남편들은 돼지들처럼 등급이 있다'고 쓴거다. 와. 나는 이 문장이 너무 좋은거다. 내내 아름답지만 다소 난해한 문장들을 만나다가 갑자기 훅- 남편들은 돼지들처럼 등급이 있다, 고 하다니. 다른 누가 쓴 것보다, 다른 어떤 글에서 본 것보다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시인은 다소 뜨거운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다가 저 문장에서는 어쩌면 그 누구보다 차갑고 날카로운 사람들이 아닐까 싶어지는 거다.
티베트와 인도는 하얗다면 다른 곳에 대해서는 붉은 종이로 '붉은' 이라는 표현이 많이 들어가있는데, 이 붉은 부분이 내게는 더 좋았다. 여기는 숫제 날카로움이 한가득이다. 그리고 그 날카로움들이 내게는 더 잘 와닿는다.
붉은 경보
결혼 행진곡은 모두 경보처럼 들린다. ‘모든 날개 가진 것들을 살처분하라.‘ 붉은 결혼 예복을 입은 소수민족 신부가 붉은 베일 속에서 운다. - P155
붉은 부분들이 날카롭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나는 책을 읽다 말고 책 뒷표지에 쓰인 글들을 마주한다.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이 구절이 나를 아프게 찌른다. 그렇다. 나는 내가 아시아인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김혜순 시인의 글을 읽으며 처절하게 깨닫는다. 김혜순 시인이 이 책에 드러낸 곳, 이 책에서 본인이 도착해 만난 것들에 대한 묘사들은 내게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던 거다. 왜 똥이 넘쳐 흐르는 변소가 있는 곳에 굳이 찾아갈까, 왜 쥐가 들끓는 곳에 찾아갈까, 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제비가 몰려있는 탑을 찾아갈까, 왜 종이를 덕지덕지 붙인 불상이 있는 곳엘 갈까, 왜 돈을 달라고 몰려대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까, 왜 폭탄 테러가 있는 곳에, 왜 변소 앞에 바로 식당이 있는 곳에, 왜, 왜, 왜.. 도대체 '왜' 거기에 가는 거냐고, 치안도 안좋고 풍경도 안좋고 교통도 안좋은 곳에 왜 가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차곡차곡 쌓일 때, 나는 그 문장을 마주한 것이다.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그래,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이 아시아 저기 어디쯤에서 저런 모습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아니, 나는 모르고 싶었구나. 그러면서 나는 잘도 잘사는 나라들을 선망하며 목적지를 언제나 그곳에 두었구나. 나는 항상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나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번번이 깨닫게 되는구나. 내가 아시아인인데, 저 지저분한 변소가, 선박에서 머무르면 물을 향해 바로 배설물을 내보내는 바로 저 지저분한 가옥이, 여자들이 감히 남자 위로 올라서면 안된다고 제약을 두는 장소가, 그러니까 그곳이 어디든, 거기가 다 아시아였다. 이게 너무 아픈거다. 김혜순 시인의 날카로움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있다고 생각하다가 그것은 나를 향해있다고 생각한다. 이 날카로움은 세상의 많은 다른 사람들을 찌르지만, 그러나 나를 찌르기도 하는 거였구나.
부러 내 몸이 편히 쉬지 못할 곳으로 찾아가 부러 끔찍한 광경들을 목도하고 그러면서 생각하고 글을 써내는 이 사람이 궁금해졌다. 김혜순 시인이 그동안 살아온 삶이 궁금해졌다. 어떻게 시를 쓰게 된건지, 어떻게 그런 곳을 여행하게 된건지, 그리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제일 모르는 걸 알려주고 싶어하게 된건지가 궁금해졌다. 김혜순 시인의 산문집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었는데 대부분 시집이었다. 그러나 산문집이 있다고 해도 내가 궁금해하는 걸 친절하게 설명해줄 것 같진 않다.
문장의 아름다움과 날카로움을 좋아할 친구들이 떠올랐다. 나보다 이 글을 더 잘 읽고 또 좋아하게 될 친구들이. 그들과 이 날카로움을 공유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알고 있다. 날카롭기 위해서는 오래 벼르는 시간이 있었을 거라는 걸. 그 시간들이 김혜순의 시집들에 쌓여있는 걸까? 김헤순 시인이 궁금해진다.
붉은 먼지
당신은 푸른 하늘을 노래해라. 나는 내 몸속에 일어나는붉은 먼지구름을 노래하련다. 당신은 소멸의 고귀함에대해 노래해라. 나는 내 몸을 풀고 아기를 낳는 날들을노래하련다. 당신은 푸른 바다를 헤치는 흰 돛을 달고 피안으로 가라. 나는 전장의 참화 속에서 아기의 기저귀를널어놓고 쌀을 씻고 저 푸른 하늘에 눈을 흘기련다. 내 붉은 치마 속으로 숨어 들어오는 사람을 숨겨주련다. - P146
붉은 가위
여자의 두 다리는 가위 같다. 달마다 무엇을 자르는지 두다리 사이에서 붉은 물이 흘러내린다. 가끔은 뭉클한 허벅지로 만든 두 가윗날이 조그만 아기의 붉은 몸뚱이를잘라내기도 한다. 이브가 따 먹은 붉은 열매가 그 속에들어 있다가 한 달에 한 번 우는가 보다. 창조주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여자가 두 다리 사이에서 붉은 열매를 잘라낼 수 있게 되었을 때, 제 몸에서 또 다른 몸을 잘라낼수 있는 가위를 갖게 되었을 때. 사막의 여자가 모래바람속에서 금방 낳은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린다. 여자는 말이다. 아저씨는 말했다. 절대로 죽지 않는 요물이란다. - P174
간혹 거리에서 분홍색 가사를 걸치고 머리를 밀어버린 여자들을 만나지만 그녀들은 승려가 아니다. 여자는 사원에 몸을 의탁해도 승려가 될 수는 없다. 단지 잡무만 본다. 남자가 1층에 있을 때, 여자는 2층에올라갈 수 없다. 여자가 남자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건남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원의 제단에도 여자는 올라갈 수 없다. 그럼에도 남자들은 말한다. 국립대학에는 여학생 수가 더 많고, 사미니들의 불경 지식이 더 풍부하고, 해박하다고. 그래도 사미니들에게 분홍색 옷을입히고, 양산을 씌워 그들이 여성임을 강조하고 금기를덧씌우는 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독재정권 아래서 살아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 퇴폐, 슬픔, 분노, 타락을 어떤 예술 작품 형태로도 표출하지 말라는 권력자의 주문이 여성 억압과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먼저 여성을 억압하고, 다음 소위 여성적이라고 규정된 것들을 억압한다. 그들은 전 국민을 자신들과 같은 부류로 개조하려 든다. - P244
도처에 ‘무엇을 하면 행운이 온다‘ ‘무엇을 보면 행운이 온다‘라는 말이 난무한다. 그러나여자들 앞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하면 액운이 닥친다‘라는 팻말이 가로놓여 있다. - P248
지독히 붉어서 눈이 시린 모음
글을 쓰는 여성이 스스로의 언어를 발명하려는 지난한몸짓, 여성성에 ‘들리는‘ 과정에서 뾰족하게 솟은 ‘지독하게 붉어서 눈이 시린 모음‘의 언어. 그런 글을 읽으면내 안에서 기쁨에 찬 한 여자가 뛰쳐나오리 바람이 그곳을 지키고 앉아 있다. 사막의 걸레 커튼 밑에서 여자는 하루 종일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여자의 눈동자가 흐리다. 마치 사막에 시달려 백내장에 걸린 것처럼.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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