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쓰는게 좀 힘들어서 가벼운 책들 위주로 꺼내 읽고 있는데, 어제 결혼기담도 그렇고 낮술도 그렇고 안샀어도 될 책들 같았다. 물론 읽고나서야 알았지만...책을 읽기 전에는 모르잖아?
하라다 히카의 소설 [낮술]은 주인공 '쇼코'가 '지킴이'라는 일로 돈을 벌면서 퇴근하는 낮에 점심으로 근사한 밥과 술을 마시는 연작소설이다. 심부름센터 같은 곳에 소속되어(라지만 딱히 근로계약 같은건 없고) 누군가 의뢰를 하면 밤에 아이라든지, 노인이라든지, 동물이라든지 가서 의뢰인이 돌아오기까지 지켜봐주는 것. 아픈 아이일 때도 있지만 외로운 누군가의 말상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퇴근길에 근사한 메뉴를 시키고 낮술을 마시며 지난밤 일에 대한 에피소드와 생각을 들려주고 큰 줄기로는 쇼코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겹친다. 쇼코는 젊은 시절 미팅으로 만났던 남자와 데이트를 하다 임신을 해 결혼하게 됐고 시부모와 같이 살다가 지금은 남편과 이혼해 혼자 지내고 있다. 어린 딸은 아빠와 시부모가 키우고 있고. 어느 하루는 술을 마시면서 자연스레 과거 남편과의 달콤했던 일을 떠올린다.
남편과 여행가서 오정이귀 와 연어 초밥을 시키고 맛있게 먹고 있는데 남편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거다.
"쇼코는 돈이 별로 안 들어서 좋다니까."
신혼 무렵에 딱 한 번 훗카이도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식당의 삿포로점에 갔었다. 오징어를 먹고 있는 쇼코의 귓가에 그가 그렇게 속삭였다. 그와의 달콤한 추억은 그 정도다. 그 일을 떠올린 것만으로 귀가 간질간질한 듯, 골치가 아픈 듯 복잡한 생각에 쇼코는 얼굴이 붉어졌다. -p.51
나는 이 부분 읽다가 이 정서를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아니, 나랑 데이트 하는 남자가 '너는 돈이 별로 안들어서 좋아'를 귓가에 속삭이는데, 그게 달콤해? 좀 어처구니. 나는 모욕적으로 느껴질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너는 돈이 많이 든다니까?' 같은 말을 듣고 싶은 것도 전혀 아니지만, 아니 '너는 돈이 별로 안 들어서 좋아' 라는건 뭔가 내가 가성비킹 애인 된것 같잖아? 좀 어처구니 없었다. 저 말 자체가 아니라 어쩌면 귓가에 속삭여서, 귀가 성감대라서, 그래서 바들바들 떨리고 찌릿찌릿 해져가지고 달콤한 기억이라고 저걸 곱씹고 있는건가... 그런데 귀가 성감대라 내 귀를 깨물고 얘기해도 '너는 돈이 별로 안들어서 좋아' 이런 말이라면 부풀어 올랐던 성욕 파삭 사그라질 것 같은데... 저게 뭐야 진짜. 물론 연인 사이의 일은 제삼자가 전혀 알 수 없고 그 둘 사이의 은밀한 것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너는 돈이 안들어.. 이건 좀 ... 나로서는.... 어처구니. 근데 저걸 달콤한 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달콤한 말이라고 듣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둘이 연인이 되고 뭐 그런거겠지. 하하.
그러다보니 '너는 우리 엄마를 생각나게 해' 이런 말도 떠오른다 ㅋㅋㅋ 나는 이거 들으면 진짜 뒤로 뒤집어지고 싫을 것 같은데, 그걸 여자 꼬시는데 쓰는 남자들이 있고 또 그 말에 넘어가는 여자들도 있으니까. '그 사람은 나를 보면 엄마가 생각난대' 이러면서 아련아련해지는... 아 내가 그걸 어디서 봤더라? 아니, 그 말이... 좋아? 나한테 그 말은 '넌 참 맏며느리감이다' 하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데. 엄마를 생각나게 한다거나 엄마를 닮았다는 건 뭐야, 아들 되고 싶다는거야 뭐야... 여튼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넌 돈이 별로 안들어서 좋다니까." 라니 ㅋㅋ 진짜 내 귀에 캔디ㅋㅋㅋ 꿈처럼 달콤했니 ㅋㅋㅋㅋㅋㅋㅋㅋ 쉬바... 돈이 안 들어서 좋대. 뭐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내가 내 돈 벌어서 먹고 싶은거 팡팡 사먹는 게 진리다.
아, 이번주 영어책 읽어야 되는데 머리가 멍해서 자꾸 가벼운 책만 읽게 된다. 히융 ㅜㅜ
금주중인 건 아니다. 단지 술 마실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 혼자 집에 돌아가는 게 괴로워 낮에 술을 마셨다. 하지만 그조차 할 수 없을 때가 있음을 쇼코는 알게 됐다. ‘술 마시는 데도 체력과 기력이 필요한 법이니까.‘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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