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2022년 1월 26일은 산뜻하게 정치기부금을 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올해 첫 정치 기부금을 보내볼까, 며칠전부터 생각하던 바 어제 실행에 옮긴 것. 비록 소액이지만 나는 어제 장혜영 의원과 심상정 후보에게 후원금을 보냈다.
장혜영 의원이 의원이 되기 전, 나는 그분과 여러가지로 생각이 다른 지점이 많아 의원이 되고난 후에도 딱히 지지하진 않았었다. 그러나 최근 그를 보면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게 느껴지는거다. 그렇다면 내가 나랑 다른 지점에 방점을 찍지 않고 우리가 공통으로 생각하는 부분, 그러니까 내가 싸우고 싶어하는 지점과 그의 지점이 일치하는 그 부분을 보고 힘을 실어주자, 하게된거다. 1987년생의 젊은 의원이 맹렬히 싸우는 걸 보는 것은 분명 멋지고 근사한 일이면서 본인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데에는 분명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이고 그 준비는 자료수집, 공부, 생각일 것이다. 지지하는데 가장 쉬운 건 다른 무엇보다 돈을 보내는 것이다.
어디에 후원을 하느냐 혹은 어디에 기부를 하느냐는 그 사람의 관심사가 어느 분야인지를 말해주는 것일테다. 나로 말하자면 여성의전화, 엠네스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사단법인 비투비, 유니세프 등에 정기후원을 하고 있고, 기존에 디지털성폭력 아웃인 디소에 정기 후원을 했었다. 사정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응원과 격려의 마음, 지지의 마음들이 그 단체들에 담기는 것일테다. 그러나 어디에 후원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관심사를 말해준다는 것은 반만 맞다. 어떻게 보이고 싶으냐도 후원을 할 수 있는 요인이 될테니까.
닐스 비우르만은 그린피스 회원이며, '청소년을 위한 봉사 활동'등을 통해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한 존경받는 변호사로 소개되고 있었다. 한 단에는 비우르만의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이며, 그와 같은 건물에 사무실이 있는 루네 호칸손 변호사와의 인터뷰 내용을 싣고 있었다. 호칸손은 비우르만이야말로 힘없는 사람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후견위원회의 한 공무원은 "피후견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에 대한 진정한 봉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구판, 2부-하권, p.129)
'스티그 라르손'의 소설에 나오는 '닐스 바우르만' 변호사는 힘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애쓰지만, 정작 자신의 피후견을 강간하는 놈이었다. 자신의 힘과 권위를 이용해서. 그런 그가 공식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매우 쉬웠다. 피해자인 리스베트 살란데르 외에 세상은 그를 좋은사람인줄로만 알았다.
각설하고.
얼마전에 유튜브를 잘 보지도 않으면서 <삼프로> 의 대선후보 정책편을 보았다. '안철수'와 '심상정'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했는데, 사회자들은 심상정에게 돈을 주로 어디에 쓰냐 질문했다. 그 때 심상정 후보는 '쓸 돈이 없다'고 했다. 사회자들도 그렇고 나 역시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국회의원 월급이 얼만데 돈이 없느냐, 고 묻자 심상정은 솔직하게 자신의 수입이 한달 9백만원 이라 밝혔다. 국회의원 월급이 구백만원이구나, 처음 알았네. 어쨌든 한 달 월급 9백만원은 큰돈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경우 임원들도 9백만원을 못받는걸. 으.. 쪼렙 회사구먼... 쪼꼬미 회사.. 쩝...
심상정은 자신의 월급 9백만원을 어떻게 쓰는지 얘기했다. 일단 가사노동을 전담하고 있는 남편에게 생활비로 3백만원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정당에 3백만원을 내놓는다고. 그러면서 덧붙였다. 작은 정당은 큰 정당과 사정이 다르다, 이 당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나는 내 월급에서 3백만원을 내어놓아야 한다, 고. 그러면 자신에게 3백만원이 남는데, 자신이 이렇게 사회에서 활동을 하고 국회의원으로 생활하는한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내는 곳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백만원 이상을 쓴다고 했다. 그렇다면 심상정 개인이 쓸 수 있는 돈은 이백만원이 채 안되는 거였다.
물론 최저시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심상정의 말만 듣고는 배부른 소리한다고 하는 사람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머릿속에서 '나에게 내가 쓸 수 있는 돈 이백만원만 매달 생긴다면..' 하고 그것을 희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데 나는 '정당에 내는 3백만원'에 대해 생각했다. 작은 정당은 큰 정당과 사정이 다르다, 라는 것은 당연히 돈이 더 없다는 것을 의미할 터였다. 나도 여성의당 권리당원이었던 적이 있었던 바, 당원들이 당비를 내는 것은 당이 쓸 수 있는 경제적 힘이 될것이다. 당원이 많다면 더 많은 돈이 걷힐테고, 당원들이 많다면 그 안에는 나처럼 소액이 아닌 큰 금액을 매달 보내는 사람도 있을테지. 그런 당은 굳이 국회의원이 자기 돈을 내어놓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내 월급이 순전히 내가 쓸 수 있는 돈이 되지 않을까.
만약 나였다면 어땠을까, 내가 같은 사정으로 있었다면. 나는 선뜻 삼백만원을 당비로 내놓을 수 있을까? 역시 나는 쪼렙이고 그래서 나는 국회의원이 아니며 그래서 나는 대선후보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한편, 심상정에게 그리고 정의당에 돈이 더 많았다면 어땠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심상정의 대선 운동은 지금보다 더 활동적이고 지금보다 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돈이 반드시 힘은 아니지만 그런데 반드시 힘이 아닌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힘 아닌가? 돈, 돈이 있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베버는 정치가 이런 주장과 환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선언한다. 정치가 관료주의 집단이라는 분쇄기에 갈려 나가진 않더라도 계급 투쟁, 복지에 대한 우려, 인도주의적 이상이 뒤섞인 질펀한 죽에서 다 사라져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선언이다. 이 지점에서 베버가 품은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의 또 다른 특징이 명확히 드러난다. 국가와 정치의 일이 경제 운영이라는 하찮은 일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하의 생산은 ‘무정부적‘이고 경쟁적이기 때문에 기업가 계급이 서로 생존하려고다투는 과정에서 국민들은 활력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 국가가경제를 좌지우지할 때도 국가의 권력 이익에 봉사하는 것은 부르주아의 고상함이 아니라 적대감이다.
『공산당 선언 The Communist Manifestro」이 경제적인 면에서 부르주아 자본주의 기업가의 혁명성을 강조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국가사회주의 관료는 커녕 어떤 노동조합도 그들의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이런 역할을 해 줄 순 없다. 요컨대 베버에게 경제와 정치 조직은 별개고 그래야만 한다.
정치의 관심사는 삶과 생계의 관심사와 다르고, 이러한 사안들이 어떤 수준으로든 국가 권력과 관련되지 않은 국가적 관심을얻게 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경제적 삶은 오직 국가에 권한을 주는 역할을 할 때만 정치적이다. 국가의 관점에서 경제는 목 적이 아닌 도구인 것이다. 단순한 생존은 선한 삶, 힘의 정치를 위해 존재한다.
정치적 삶의 자율성에 대한 베버의 관심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는 그가 이상적 정치가의 특징으로 꼽은 내용에 있다. 정치에‘의지해' 살아가기보다 정치를 '위해‘ 살아갈 사람들을 대상으로한 베버의 유명한 청원은 이중적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진정 정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내적 의미에서 자신의 삶‘인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정치를 만들어 갈 것이다. 둘째, 재정적 수단이 충분해서 정치적 지위에서 얻는 보수에 전혀 관심이없는 사람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다음으로 베버는 다음 내용을 인정한다. 정치가가 ‘정치로 벌 수 있는 수입에 경제적으로 독립적이고 경제적으로 일할 필요가 없는‘ 존재여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하는 것, 즉 ‘완전한 불로소득자‘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에서의 금권 선거와 금리생활자 부유한 변호사로 이루어진 정부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정치에서 수입을 얻지 않아도 되고 금전적으로 독립된 이들조차 자기 계급 이해를 증진할 정책을 만들 것이므로, 이들이 필연적으로 정치에 의지해 살아가게 된다고 인정한다.
베버는 이 때문에 어느 정도 보수적인 사회 정책이 도출될 것이라는 점 역시 인정한다. "자신의 경제적 보장에 대한 염려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부유한 인간의 삶에 기준점"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도 베버는 부유층이 진정한 정치가 의 원천이라고 본다. 이렇게 본 이유는, 그가 권력에 대한 본능이 있으면서 정책 입안 회의장의 들끓는 이해 집단에 매수되거나 얽매이는 데 물들지 않을 이들이 있으리라고 상정하고 이들을 원하기 때문이다. 베버는 상위 계급이 절충안이라고 결론짓는다. 상층부에 있는 이들은 돈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만, 돈 때문에 정치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권력 본능에 있어서 이들을 능가하는 기업가 계급은 ‘경제적으로 일할 필요가 없지 않다. 이 계급은 내심 자기 이익을 위해 정책을 만들지만, 이 계급의 번영은 보통 국가의 일반적 번영과 보조를 맞춘다. 요약하자면 이 계급은 국가적 관심과 관련한 정책을 만들 때 계급의 이해관계와 사소한 경력상 이해관계 모두를 피해 갈 가능성이 가장 높다. 반면에 노동계급의 정치적 잠재성에 대해 베버는 이렇게 말한다.
사유재산 없는 대중은 비록 자신의 일상을 이어 가기 위해 거친 투쟁을 벌이지만, 그런 걱정에서 자유로운 자산가의 ‘더 차가운 머리‘에 비해 정치에서 일련의 감성적 동기, 감정적 특성에서 나오는 충동과 순간적인 인상 등에 휩쓸리기가 훨씬 쉽다.
‘일상의 거친 투쟁‘에서 생겨난 주정주의, 즉각성이 정치를 감염할 것이라는 베버의 두려움은 인구의 다수에게서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식화와 공명한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한편에 있는 욕구, 감정과 다른 한편에 있는 자유, 합리성의 대립 관계를 다시금 보여 준다. 정치에 적절하게 접근하려면 정치를 오염하는 생존 행위에서의 여유와 충분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베버는 정치적 인간이 강력한 개인적 헌신을 하려면 정치 조직에 충분한 지분(자산)이 있어야 하고, 정치적 관심이 지나치게 배타적이거나 즉각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오염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강력한 권력 본능이라는 긍정적 자질을 갖춘 정치적 지배층을 불러내면서 베버는 권력, 명망, 나라의 영광, 영웅적 리더십 같은 정치적 미학을 찾아 분투한다. 이 미학은 윤리, 사회, 문화, 경제 등 그 어떤 것이든 ‘공공선‘을 지도 목적으로 삼을 법한 정치적 실천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아렌트,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베버에게도 정치가 차지하는 공간은 고상하고 소중하다. 그곳에서는 평범한 관심사가 환영받지 못하고, 평범한 사람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폴리스에서 추방되고 폴리스를 위협하는 것을 모두 살펴본 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한 질문을 베버에게도 똑같이 해 볼 수 있다. 만일 정치가 삶·집단의 안녕·정의·참여등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정치는 무엇에 대한 것이고 왜 정치가 인간이 ‘부름‘ 받는다고 할 만큼 가장 높고 고귀한 노력이라고 할수 있을까? p.270~273
먹고사는 일에 대한 고민은 가장 우선된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먹고 사는 일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다면 다른 곳을 보는 일은 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니 정치에 매진하기 위해 충분한 사유재산이 필요하다는 것은 틀리지 않은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유재산 없는 대중이 감정적이고 감성적이기 때문에 정치를 감염시킬 것이라는 베버의 주장에 대해서는 과연 그런가 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로 말하자면 항상 정치인이란, 가장 약한 곳, 가장 얕은 곳을 보고 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약자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제대로된 정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베버가 '경제랑은 좀 떨어져'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단 말일까. 그 때 추구할 수 있는 궁극적 가치란 무엇일까?
여러분, 재미있지 않나요? 재밌어... 베버 읽는 거 재미지다... 뭐라고 이 자식아? 이러면서 읽는 거 넘나 재미지다.
베버 부분 읽다보면 저 위의 인용문에도 나오듯이 '주정주의'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앞으로 베버에 들어갈 분들을 위해 주정주의를 내가 찾아보았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주정주의'는 이런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주정주의
[ emotionalism , 主情主義 ]
요약 인간의 정신활동에서, 이성(理性)이나 의지(意志)보다도 감정(感情)·정서(情緖)를 중시하는 경향.
주정설(主情說)이라고도 한다. 주지주의(主知主義)·주의주의(主意主義)에 대립되는 말이다.
그 발현의 때와 장소는 여러가지이지만, 극도의 합리주의, 과학편중, 비인간적 억압 등에 대한 반발에 의하는 일이 가장 많다.
문예작품은 많건 적건 간에 주정주의적인 색채를 띠지만, 특히 초기 낭만주의 문학(루소, 노발리스 등)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정주의 [emotionalism, 主情主義] (두산백과)
베버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은 감정이나 감성을 이성보다 낮은 것이라고 여기는것 같다. 냉철한 이성 이라는 것이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더 옳은쪽을 향한다고 강하게 믿고 있는 것 같다. 나로 말하자면, 감정적이지 못한 것은 멍청한 것이라고 본다. 감정은 이성과 생각으로부터 오는게 아닌가. 어떠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 판단했기 때문에 내 감정이 발현되는게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해준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되는게 아닌가. 감정은 반응이고 반응은 모든 생각의 근원이라고 정희진도 말한 바 있다. 이 바보들아..
경계를 만났을 때, 가장 정확한 표지는 감정이다. 사회적 약자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상황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쉬운데, 이건 너무도 당연하다. 감정은 정치의식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사유도 사랑도 없다는 것, 따라서 삶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정(e/motion)의 라틴어 어원은 자기로부터 떠나는 것, 나가는 것(moving out fo oneself) 즉, 여행이다. 근대의 발평품인 이성(理性)이 정적이고 따라서 위계적인 것이라면, 감정은 움직이는 것이고 세상과 대화하는 것이다. 감정의 부재, '쿨'함은 지배 규범과의 일치 속에서만 가능하다. 반응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모든 느낌, 모든 즐거움, 모든 열정, 모든 생각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구판, p.34-35)
자, 그리고 베버는 물리력, 권위, 권력에의 의지에 대해 말한다.
그(베버)는 "남성의 물리적·지적에너지가 정상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여성은 의존적이다. 아이도 의존적인데, 이는 객관적 무기력 때문이다" 라는 사실에 가족유대의 진실이 있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가부장적 권위의 기원에 대한 진정 베버다운 설명이 등장한다. "강한 이들이 지배한다. (…) 그들이 ‘욕구 충족’영역에서 가장 능숙하거나 지식과 지배욕이 있어서가 아니다."
남성은 물리적으로나 지적으로 아내와 자식을 지배하고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가정을 다스린다. 남성의 힘 그리고 가정이나 마을 밖의 남성적 (폭력적) 세계에 대한 친숙함이 베버가 정치적 권위의 토대라고 부르는 가정 지배의 기반이다. 줄여 말하면 가정 내 권위는 복지보다 힘에 묶여 있고, 이 덕분에 명백히 정치의 성격을 띠게 된다. -p.259
자, 베버가 여기에 드러내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남성이 물리적으로나 지적으로 아내와 자식을 보호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누구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인가. 도대체 그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대관절 누구이길래 보호한다는 것인가. 위협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인가. 위협 자체를 없애면 되는일인데 왜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며 그것을 빌미로 군림하는가, 권력을 쥐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페미니즘 도서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여자에게 경제권이 그리고 교육의 권리가 처음부터 남자들과 동등하게 있었다면, 그랬더라도 남자들은 여자들을 그 무언가로부터 '보호'하기를 자처하며 그로 인해 가정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우리의 천재 애트우드 여사는 본인의 책 《시녀이야기》를 통해 여자들을 다스리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경제권을 빼앗아버림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아, 디 그레이엄이여, 그녀는 역시 남성의 보호를 바라는 것은 남성이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천재들 만세!!
가부장제는 여자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없도록 남성 폭력이나 경제적 제약 등 장애물을 세워 여자가 의존적이라는 환상을 유지한다. 여자가 원래 의존적으로 태어났다면 우리가 남자에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온갖 장애물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믿어서는 안 되는 부분은 또 있다. 우리는 남자가 선의를 발휘해 ‘우리에게 권리를 부여해줄‘ 거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여자가 자랑스럽게 내 남편은 이런 일(예를 들어 직장 출근)도 하게 해준다고 말하는 건 남편이 본인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남편이 언제든 직장 출근을 그만두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 《여자는 인질이다》, 디 그레이엄, P355
여자는 남자가 보호해준다는 데에 감격해서 애초에 보호가 필요한 이유가 남자의 폭력 때문이라는 점을 잊는다. (p.190)
여자만 잊는게 아니다. 남자도 잊는다. 애초에 여자에게 보호가 필요한 이유는 남자의 폭력 때문이라는 것을.
베버는 위의 인용문에서도 그렇고 권력에 대한 본능 혹은 권력에의 의지에 대해 종종 언급한다. 권력에 대한 의지 혹은 본능은 나는 모두가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더 강하냐 덜하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바깥에 나와 사회활동을 하면서 을로 살아가다가 집안에 들어가면 군림하려 드는 것은 자신 안의 쪼꼬미 권력에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가정이어서는 아닐까.
나로 말하자면 나 역시도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진 권력이래봐야 사실 정말 별 거 아니지만, 진급이 가져올 책임감이 부담스러워 진급하기 싫다고 부르짖으면서도 그러나 하나 더 진급해서 회사 빌딩 복도를 걸어다니는 일을 사실은 즐기고 있다. 내가 좀 더 힘이 있고 좀 더 높은 위치에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나의 남자친구'나 '나의 남편'의 것으로 퉁치는 일 같은 거 말고, '내것'으로 하고 싶다. '내가' 힘이 있었으면 좋겠고 '내가' 권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서 내 친구나 혹은 내 가족, 내 연인이 딱히 권력을 가져 더 높은 사람이 되고 내가 그것으로 인해 뭔가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권력이 매력적인 요소임을 부인할순 없다.
손예진과 현빈이 주연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현빈이 처음 등장했을 때, 현빈은 그 역할 자체로 이미 어느 정도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잘생겼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캐릭터였으니까. 그래서 원래도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아니 회차가 거듭하니까 이 남자가 글쎄 그저 그냥 장교가 아니라 엄청난 권력자의 아들이었던 거다. 그래서 그의 권력이 내가 생각한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매력이 갑자기 이천배가 되면서 폭발해버리는 것이다.
또 있다.
드라마 <킹덤>에서 주지훈..이... 왕.... 인거. 너무 좋은거다. 가난한 마을 선비 혹은 무사로서 좀비랑 싸우는 게 아니라, 한 나라의 임금이 될 사람인거다. 그들 뒤에 권력이 있다는걸 아는 순간, 그러니까 '장군의 아들' 이며 '왕'인 것을 아는 순간 그들의 뒤에서 후광이 비춰버려가지고 .. 내가 그걸 보고 매력을 느껴서, 아아, 나란 여자 무엇인가, 권력에 반하는 사람인가.. 아아, 나는 세상 속물인 것이여... 하다가, 또 그게 그런것만은 아닌 거라는 것을 얼마전에 넷플릭스 로맨스 영화 보고 깨달았다.
<로열 트리트먼트>에서는 무려 남자주인공이 '왕자'다. 작은 나라의 왕자이고 나라를 물려받을건데..왜.. 왜케 매력 없어? 여자주인공은 뉴욕의 미용사인데 이 작은 나라의 왕자랑 사랑에 빠진다. 그러니 갑자기 어마어마한 권력을 갖게 되는 셈인데, 와, 1도 안부러워... 왕자인데 매력도 없고 저런 왕자랑 연애하느니 술이나 마시겠다, 라고 생각하는 나를 보면서 나에게는 권력'만' 있으면 매력이 되는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권력 플러스 알파.. 권력 플러스 .. 전완근?
아, 나는 왜 자꾸 이런 영화를 보는것인가... 애들도 안 볼 것 같은 영화를 대체 왜.. 왜........
아무튼 베버 재미있고, 오늘이 27일인데 아직 <남성됨과 정치> 다 못읽어서 매우 초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