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와 한나 아렌트를 마치고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를 오늘 아침 출근길에 시작했다. 일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꼬꼬마시절 마키아벨리 의 《군주론》을 읽었었다. 도대체 마키아벨리가 누구고 군주론이 뭐길래 .. 하는 마음으로 읽었던거다. 그 당시 내가 느낀건 물음표 천개였고, '아니 이게 왜 이렇게 길이길이 전달되는거지? 이건 임금한테 폭군되라는 거잖아??' 했던 기억만이 지금 얼핏 남아있다. 그 때 내가 읽었던 군주론은 이것이었다. 아마도 청소년용이었던 듯?
꼬꼬마 시절(이라고 했지만 성인이었음)에 읽었던만큼 그정도의 희미한 기억만을 간직한채로 웬디 브라운의 마키아벨리 부분을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베버에 대한 웬디 브라운의 글을 읽기 이전에 우리가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웬디 브라운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웬디 브라운은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정치학과 정치 이론이 남성에게 독점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가로지르며 연속적이면서도 다양하게 남자다움이라는 사회적으로 고안된 속성 및 자만과 동일시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정치적 삶에 여성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런 것들이 변치 않으리라는 점을 감지했다. 서구 정치학은 남성주의적이며 그 형식·정신·내용에서, 범주에서, 특징에서, 가치를 판단하고 혐오의 대상을 정하는 데서, 그 호감과 반감에서 여성 혐오일 수 있다는 점을 감지했다. 정치학과 정치 이론에서 여성에 대한 질문을 꺼낸 뒤 진지한 어떤 지점에 다다르려면, '남성에 대한 질문'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p.16
자, 그리고 이 책에 대한 정희진의 해제를 보자.
사족을 달자면, 나는 근대 이후 세 가지 역사적 이정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 그리고 기후 위기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인간의 의지로 타자, 다른 사회, 자연을 정복하려는 것이었고, 이는 문명과 발전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세계를 이원론의 관점으로 파악하고 나의 외부(대상)를 극복해야 한다는 초월성에의 추구는 인류의 역사를 남성의 역사로 만들었다.
모든 인간의 자연의 일부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사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자연과 적대하고 있다. 생태주의자조차 기후 위기를 "자연의 역습"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자연에 포함되어 있다면, 나올 수 없는 사유다. 남성됨에 관한 연구는 전쟁, 기아, 근본주의, 인종주의를 넘어 지구 자체의 생존 문제가 되었다. 남성됨 연구가 절실한 이유다. -p.35
웬디 브라운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마키아벨리를, 그리고 베버를 남성으로서, 남성됨으로서 바라보고자 한 것은 이 책을 쓰고자 할 때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함으로써 그녀는 정치에서 여성이 배제된 이유를, 여성혐오를, 나아가 여성에 대한 질문 자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어떤 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결국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 있다. 이를테면 개인적으로 나의 경우, 몇 번 언급했지만 최명희의 혼불을 읽다가 '페미니즘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페미니스트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어쨌든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던거다. 그러나 혼불을 읽으면서 너무도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일들을 겪어나가는 여성들의 삶을 보노라니, 대체 왜 이래야 하지? 왜 이런 모욕을 견뎌야하지? 여기에 대한 답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알 수 있을까? 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기 시작한거다.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우리에게 언어가 없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어, 우리에겐 우리의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언어가 없었네, 라고 자각하게 되면서 언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고, 왜 세상은 여자들을 마녀로 몰고 갔을까,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정신분석이 궁금하게 되고, 왜 세상은 이토록이나 여자를 죽이는걸까, 가부장제가 궁금하게 되고, 왜 이토록 여성혐오적인 문화가 있을까 종교가 궁금하게 되고, 결국은 철학이 궁금하게 되어버리는거다. 나는 철학에 대한 흥미도 없었고 사실 지금도 딱히 내가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취합하고 거슬러 올라가 답을 얻고자 하면, 거기에 철학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현재까지 내가 내린 답인데 이건 나 혼자 공부한 나 개인의 답이니 모두의 답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또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다른 답이 내려질지도 모르겠다.
웬디 브라운 역시 자신이 알고자 한 것, 의문을 품은 것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했을때 찾아낸 것이 결국은 남성됨에 대한 것이었던 거라고 나는 판단한다. 독자인 나는 그것이 답인지 혹은 아닌지에 대해, 그것이 결국 가장 근본적인 것인지 아닌것인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더라도, 웬디 브라운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웬디 브라운은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그녀가 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 역시 맞아, 바로 이렇다 할 수도 있고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한가, 라고 물으면 그렇다 라고 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인간은 궁극의 것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소하게 예를 들자면, 나의 경우 문구점에 가 펜을 사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펜을 사가지고 신나서 쓰다가 또 펜을 사고 또 펜을 사고, 닳지도 않은 펜들을 계속 사대면서 펜을 쌓아두었던 거다. 그런데 어느날 몽블랑 만년필을 선물 받게 되었고, 그것으로 다이어리에 일기를 써본 후, 나는 문구점마다 들어가 펜을 사는 일을 멈출 수 있게 되었다. 몽블랑 만년필이라는 궁극의 펜을 손에 쥐게 되자 다른 걸 딱히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거다. 물론, 지금도 서점의 문구 코너에 가면 펜을 이것저것 써보지만 그렇다고 사오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다. 나는 어느 한 연애에서는 '너는 나처럼 만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여럿이지?'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있을 정도로 그 한사람에게 충실하지 못했다. 친구는 친구대로 연인은 연인대로 포지션이 뭐였든간에 나는 여러사람을 두려고 했다. 이 사람이 주는 것과 저 사람이 주는 것은 달랐고 그 모두가 나는 필요했으므로 그들 모두를 만났으며 그러면서 어떤 지점에 대해서는 연애 상대에게 숨기기도 했다. 괜히 말해 불쾌하게 할 건 무어람, 하고. 대부분의 정서적 만족을 연인이 아닌 친구라는 포지션의 이성에게서 얻는 것 역시도 내게는 감춰야할 비밀이었다. 이 사람이 주는 정서적 만족을 너는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이 사람이 주는 즐거움을 너는 결코 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굳이 말할 이유가 없었다. 아마도 내 연애들이 짧았던 이유는 바로 나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삶은 이런식으로 흘러갈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 연인이기도 한 사람, 정서적 만족과 기타 등등의 모든 것들을 내게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자, 나는 굳이 이걸 얻자고 저 사람을 만나고 저걸 얻자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해야할 필요가 없어졌다. 궁극의 사람을 만나면 여러개의 다리를 뻗을 필요가 없는 거였구나, 라고 생각했다. 물론 궁극의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내게 여전히 이성친구가 있고 지금도 있지만, 충성도랄까, 하는 것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궁극의 답을 찾고 싶다. 그것은 문학을 읽는 것에서도 그렇고 여성학에 대한 것에서도 그렇다. 공부에 있어서 혹은 인생에 있어서 궁극의 답은 결국 없을지도 모른다. 파랑새의 결말처럼 어쩌면 바로 옆으로 눈을 돌리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의 답은 결국 '없는' 것이거나 또한 '바로 옆에 있는 것'이거나 하더라도, 궁극의 답을 찾아가는 그 과정에 있어서는, 공부는 의미가 있지 않은가 한다. 웬디 브라운을 펼쳐서 한나 아렌트의 책을 사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다시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는등, 궁극의 답으로 가는 길에는 아주 많은 옆가지들이 뻗쳐 나갈 것이고, 아주 빙 둘러서 시간이 오래 걸려 도달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가다가 아예 옆길로 틀어질 수도 있고, 그러나 뭐가 됐든, 그것이 펜이나 사람이 아닌, 공부에 있어서라면 잘 가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또한 계속 가야 하는게 아닐까.
말이 너무 길어졌는데,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네? 마키아벨리 책 읽어봐야겠다고 쓰려고 페이퍼창을 열었는데 왜 때문에...
그러니까 마키아벨리 부분이 너무 재미있는거다. 나는 미쳤나봐. 남성됨의 정치 너무 어렵다고 계속 징징거렸는데, 오늘 읽는 마키아벨리 부분이 너무 재미있는거다. 아니, 재미있잖아? 나 은근 마키아벨리랑 맞는걸까? 어쩌면 내가 꼬꼬마시절 군주론을 읽었기 때문일까? 왜 나 마키아벨리 부분 재미있지? 그리고 마키아벨리 부분 재미있는 내가 너무 좋은거다. 마키아벨리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나를 발겨나게 해준 웬디 브라운 님 땡큐!!
인간과 정치를 선명하게 젠더화하는 마이카벨리의 시각은 정치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 일부를 전복하기에 이른다. 그는 정치적 삶의 복잡다단함에 동조하면서도 정치 행위자들에게 정치 영역에서 가장 직설적인 힘과 도구를 쓰라는 충고를 서슴지 않는다. -p.154~155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은 인간의 본성에서 시작하며, 인간을 진정 남자다운 생물로 발전시킨다. 그리스인과 대조되는 마키아벨리의 이런 사상 전개는 정치적 삶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완벽함'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가 인간의 고유한 것이라고 인식한, 즉 쉽게 바꾸거나 통제하기 어렵다고 인식한 많은 특징을 특정 정치적 목적에 맞춰 변형하고 극복하고 이용하는 행위와 연결한다. 마키아벨리에게 인간은 정치의 원료인 바, 정치적 삶을 번창시키고 개별적·집단적 영광을 얻으려면 자연적으로 타고나는 것보다 우월한 형상이 필요하다. 이 우월한 형상이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남성됨의 이상을 구현하는 한편 마키아벨리 정치의 형태를 잡아준다. -p.155
마키아벨리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무한하고, 지배에 대한 관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통제 욕구는 기정사실이라는 가정에서 정치적 이론화를 시작한다. -p.167
나는 위의 167페이지 인용문이 정말 정확하다고 생각하는데, 특히나 '통제 욕구는 기정 사실'이라는 부분에서 더 그렇다. 집 밖을 나서는 많은 '을'인 사람들이 자신이 갑이 되는 위치에서는 어떻게든 힘을 쓰고자 하고 상대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 안에 이런 욕망이 자리잡기 때문이 아닐까. 밖에서는 보통의 구성원인 사람이 집에 가면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 부분에서만큼은 통제가 가능해,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그 안에 품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거다.
웬디 브라운의 책을 통해 만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에겐 급이 있고 가장 우월한 사람(물론 남자다)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느낌이라면, 마키아벨리는 마초를 추구하는 느낌이다. 남자는 마초여야 하지 으르렁- 물어뜯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느낌이랄까. 베버를 읽게 되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 어려운 책이 재미있어졌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마키아벨리를 좀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만 알았는데, 이 책에서는 《로마사 논고》가 자주 언급된다. 로마사 논고 읽어볼까 했더니 분량이 엄청나다. 나는 일단 만화로 만나주겠어.
자, 여러분 부지런히 읽읍시다.
처음부터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권력과 정복을 향한 무작위적 욕망에 이끌린 나머지 그 자신과 주변 환경에서 소외되었으며 태생적으로 근시안적이고 자신의 목표와 야심 때문에 좌절한 존재라고 가정한다. - P156
마키아벨리는 포르투나를 정신, 의지, 의도가 있는 여신으로 묘사하는 한편 환경에 대한 인간의 부적합한 이해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 P172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대담한 고백을 통해 당대에 퍼져 있던 신비주의와 미신을 타파한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거나 통제하는 데 실패한 것을 포르투나, ‘운명‘ 또는 ‘섭리‘등으로 부른다. 따라서 이는 어떤 외부의 힘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거나 정신이 꾸며 낸 것이다. - P174
정치학에서 그(마키아벨리)가 악명이 높은 이유는, 그가 정치를 윤리에서 떼어 내고 정치적 인간의 미덕과 미덕 자체를 구별했기 때문이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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