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엊그제 친구로부터 원데이 읽어봤니, 어땠니? 라는 물음이 톡으로 왔다. 나는 그거 책은 읽다 팔았고 영화는 좋은것 같았는데, 하고 알라딘 뒤져보니 2014년에 책은 백페이지 읽다 팔았고 영화는 좋았다고 써있는 거다. 친구와 원데이에 대한 대화를 하고나니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때 책은 읽지 못하고 팔았으니 그렇다면... 다시 읽어볼까 하게 되었고, 바보처럼 일단 원서를 주문했다. 번역본은 이북으로 사자..
나는 어제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네이버 굿다운로더로 천원 조금 넘고 넷플릭스에서는 그냥 볼 수 있다.
'에마'와 '덱스터'는 대학졸업식날 아는 사이가 된다. 인기남이었던 덱스터를 에마는 몰래 흠모하고 있었지만 덱스터는 에마의 존재를 몰랐다. 어쨌든 대학졸업식날 이케저케 아는사이가 되고 섹스할 뻔한 사이가 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냥 친구를 하기로 한다. 덱스터는 집이 엄청 돈이 많고 잘생기고 인기도 많고 그래서 삶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서 부모님의 지지가 가능한거다. 반면 에마는 런던으로 넘어가서 멕시코음식 집에서 종업원을 하며 내가 이러려고 여기온 건 아닌데, 그런데 이게 내 현재 직업이고 이것밖에 하는 일이 없으니 이 길로 나아가야 하지 않나 고민한다. 덱스터는 방송국 피디가 되고 싶었지만 아주 지저분한 심야 토크쇼의 사회자가 된다. 그는 인기가 더 많아지고 어딜가나 여자들이 따라붙는다. 이 여자를 여자친구 삼고 저 여자랑 하룻밤 자고 그러면서 그는 에마와 우정을 나눈다. 일하는 틈틈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기거나 외롭고 누군가 필요하면 항상 에마를 찾는다. 이런건.. 소울메이트일까?
반면 에마는 아직 딱히 교제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전히 마음속에 덱스터가 있고 그런데 덱스터가 자기 눈앞에서 여자친구랑 키스하는 것도 봐야되고.. 심란하다. 덱스터는 발가벗은 여자가 눈앞에서 왔다갔다 거리고 섹스를 눈앞에 두고 있어도 에마랑 통화를 한다. 덱스터에게 에마는 자신의 어떤 '다른 영역' 쯤에 놓아둔 친구인지도 모르겠다. 마음 속 성소 같은 것..
자신의 미래가 어찌 흘러갈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에마에게 덱스터는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에마에겐 처음 해외여행인데 가는 내내 그들 여행의 룰을 정한다. 벗은 모습 보여주지 않기 서로를 유혹하지 않기 등등. 이들이 이성이면서 한 호텔방에 잘건데 아니, 그거 가능해지는 부분인것인가.. 덱스터에겐 애인도 있었는데 어떻게 여자사람친구랑 단둘이 여행을 가는지, 나였으면 내 애인을 그 여행에 기꺼이 보내줬을까? 생각해보면 어떤 애인의 경우엔 맘대루 해~ 다녀와~ 했겠지만 어떤 연인의 경우엔 그런 생각을 하고 내게 말을 했다는 것 자체에서 이미 충격받고 우울하고 그랬을 것 같다. 인생..
여튼,
아니, 굳이 한 방 한 침대에서 자면서.. 아니 어쩌려고.. 게다가 에마는 덱스터 좋아하는데.... 어쩌려고 그래 어쩌려고...
그런데 한 번 해보고 싶긴하다. 너랑 나 친구, 베프, 너 남자사람 나 여자사람, 우리 둘이 여행, 한 침대, 노섹스 노누드 오케바리? 한 번 해보고 싶다. 내가 굳이 단둘이 여행을 가겠다고 허락한 것부터가 그 남사친은 내게 여느친구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노섹스 노누드, 사실 나는 그거 자신있다.
뭐 어쨌든 에마와 덱스터는..그렇게 되었다. 어떻게? 안알랴줌.
에마는 차근차근 자신의 길을 찾아 간다. 학교 선생님이 되고 늘 염원했던 글을 쓴다. 차근차근, 차근차근.
덱스터는 화려한 시절과 인기를 가졌지만 지저분한 쇼의 진행자라는 오명도 갖고 있고 무엇보다 자신의 부모님에게 자신이 진행하는 쇼를 보여드릴 수가 없다. 덱스터의 엄마가 그 쇼를 보려고 하자 그걸 말리는 거다.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모르게 하고 싶다는 그 부끄러운 마음, 결코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을 하는 그 마음. 그렇다면 그 일은 안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에마는 자신을 내내 갈망하던 '이언'과 애인이 된다. 한 집에 살게 되고 이사도 가게 되고 그렇지만 에마는 이언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언은 에마랑 함께하는게 기적같이 여겨지지만 그러나 에마가 사랑하는 건 덱스터라는 사실을 안다. 덱스터와 함께 있을 때 그녀가 밝게 빛난다는 걸 안다. 덱스터를 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걸 안다. 에마는 자신의 인생을 충실히 살아가며 책을 쓰고 작가가 되고 거주지를 옮기는 이 모든 과정에서 그러나 자신의 어느 한 부분에 덱스터를 두고 내치지 않는다. 덱스터랑 싸우기도 하고 덱스터의 청첩장을 받아도 그녀는 그를 놓지 않는다. 아니, 청첩장 받을 때 기분이 어땠겠냐고 ㅠㅠ 문득 너무 좋아했지만 더이상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던 남자가 2년만에 연락해왔을 때 '나한테 청첩장 주려는건가?!' 이러고 대충격 받았던... 나의 과거가 떠오른다. 그가 '하아 내가 어떻게 너한테 청첩장 준다고 전화를 하겠니..' 라고 그가 말하는 순간 내 머릿속 회로는 피라미드로 넘어갔었다. 굳이 2년만에 연락을... 그렇다면 피라미드? 좋다, 만나서 네가 나에게 옥장판을 팔아도 나는 사지 않겠다. 나는 너를 정말 좋아했지만 다단계 영업엔 노를 말하겠어. 나는 이렇게 칼같은 여자, 냉철한 여자, 차가운 도시여자야! 이성이 가득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인생을 조심조심 살아가려는 나의 태도 되시겠다. 아무튼,
덱스터의 인생이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더 가닥이 잡히지 않을수록 에마의 인생은 점점 더 단단해진다. 덱스터는 자신의 딸에게 에마가 지은 책을 읽어주고 또 기차 안에서도 에마의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덱스터는 한참을 돌고 돌아 자신이 있어야 할 곳, 자신이 진정 행복할 수 있는 곳은 에마의 옆자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주 긴 방황을 거친 뒤에. 반면 에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덱스터를 향한 자신의 마음과 사랑을.
어제 영화보면서 왜 이 남자들은 이렇게나 방황을 하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또렷이 보고 인지하고 그걸 알고 있는 여자들의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는 그들은 왜그렇게 돌고돌고돌아야 하는가. 가장 오래 돌아오는 인물이라면 내가 너무 싫어하는, 다 늙어 죽기 직전에 솔베이지 찾아오는 페르귄트가 있겠고, 노멀 피플 생각났고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생각도 났다. 아니, 일곱번 째 파도도. 원데이에서의 덱스터는 가진 자원이 충분히 차고 넘치는데도 홀로 서는 것에도 방황한다.
방황은 잘못이 아니고 방황은 죄가 아니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방황할 자유가 그에게는 더 있었다. 에마보다 더. 에마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을 자신이 개척해야 하고 자신이 중심을 잡아야 하고 그래서 때로는 억지로 어떤 선택들을 하지만, 덱스터는 살고싶은 대로 살거야~ 이러면서 선택할 수 있는거다. 물론 그 선택이 자기가 '하고싶은' 거였다고 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일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나는 덱스터가 지 꼴리는대로 살다가 결국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자기 길 못찾고 있는데, 기차 안에서 에마가 쓴 책을 읽는 아이를 보는 장면이 너무 좋았다. 에마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그 길을 향했던 것 같다.
나처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졸라 똑똑해.
멋져..
다 늙은 덱스터가 에마가 제짝인줄 알았다고 이 영화가 해피엔딩일줄 안다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뭐, 그렇다는 거다. 그 사람이 언제까지나 영원히 거기 있을거라고 착각하지마. 미래는 예측불허..
레오, 왜 "당신이랑 ( …… ) 하고 싶어", 이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 ( …… ) 할까요?", 이렇게 물어요?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몰라요? 아니면 내가 원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당신도 원하지 않을 여지를 남겨두는 건가요? (일곱 번째 파도, p.280-281)
언제 월요일이 온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