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벼르다가 어제부터 성경책 읽기를 시작했다. 친구 한 명과 함께 읽기로 했는데 친구는 종교적인 이유로 읽고 나는 나의 앞으로의 독서생활을 위해 읽는다. 소설, 인문학, 여성학 모두 책을 읽다보면 '성경을 알면 더 좋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침 친구가 소개해준 앱은 1년동안 매일 어느정도 읽어야 구약과 신약을 포함한 성경을 완독할 수 있는지 계획을 짜주었고, 그렇게 첫날인 어제는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 읽는 날이었다.
아주 꼬맹이때부터 나는 크리스찬이었다. 사실 신앙이나 종교라는것에 대한 큰 의미도 모르는채로 그냥 교회를 다녀야 해서 다녔다. 지금은 아주 많이 후회되는 시간들이 그 안에 있는데, 교회를 너무 열심히 다니는 아이었던 것에 대해 그렇다. 국민학교 6학년때 예배 반주자를 했고 피아노에 천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피아노 학원에 가서는 다음주 찬송을 미리 연습해야 했다. 덕분에 6학년 1년은 피아노학원에서 찬송가만 쳤고, 그 이후로 내 피아노 생활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피아노학원의 젊은 여선생님은 그래서 내가 찬송가 반주만 하는 걸 싫어했다. 다른 걸 치기 힘들어진다고.. 다른 얘긴데,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다른 학급의 내 친구 한명은 나처럼 연습 없이도 악보만 주면 바로 쳐냈더랬다. 나는 피아노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아주 늦게 깨달았다. 그때도 뭔가 인정하기 싫어했건만..
반주자만 한 게 아니라 열심히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고 전도에도 힘쓰는 아이었다. 친구들에게 전화걸어 교회 가자고 하는 아이었고, 예배가 끝나면 동네를 돌면서 주보를 나눠주며 전도하기도 했다. 그 때는 그렇게 하는 줄 알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했던 게 너무 싫다. 무엇보다, 아이들 끌고 다니면서 그렇게 하게 뒀던 교회가 너무 끔찍하게 느껴진다.
가장 어린 시절 기억나는 성추행도 교회에서였다. 목사였다. 더 나이들어서는(그래봤자 국민학생이었지만) 성가대 지휘자인 집사였다. 둘다 아내가 있었다. 그런게 성추행 가해자에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물론 나에게 가해진 성추행은 '기독교'가 한 것도 아니고 '교회'가 한 것도 아니다. 그 안의 '남성'이 한거지.
나는 중학교 2학년때 갑자기 교회를 그만두었고 그 뒤로 교회를 가지 않았다. 그렇게나 열심히 다녔던 아이었는데 교회는 내게 가장 끔찍한 장소가 되어 있었다. 점점 자라면서 교회에 대해 더 싫은 점만 보게되었고 욕을 퍼붓고 싶었던 일들은 아주 자주 일어났지만, 사람들이 교회에서 다 나같은 경험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에게 교회는 영혼의 안식처였고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받아들여주지 않는 자신을 받아주는 유일한 곳이었다. 지금은 가족 중에서 엄마만 교회를 다니고 계시는데, 토요일에 교회를 청소하러 간다고 하실 때마다 머리꼭대기까지 빡이 차오르지만, 그렇지만 그렇게 엄마가 가서 다른 교회분들과 사교활동을 하시며 즐거워하시기 때문에 내 기준으로만 판단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이르는 중이다. 현재 직장을 다니지 않는 엄마의 유일한 사교 활동은 종교활동이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는 사람, 친구를 사귀는 것이 교회 안에서 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그마저도 코로나 때문에 중단된 상태지만.
그러니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어도 어떤 말씀들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알고 있기도 하다. 친할머니는 어마어마한 교회 신자였고 권사님이셨는데, 창세기를 달달 외우고 계셨다. 많은 나이에도 사람들 앞에 나가 창세기 외우기 시범을 보인 적도 있는 분이다. 올케쪽 친척 중에는 목사님도 계시다. 그러니까 내 주변은 친교회적, 친기독교적 이라는 거다. 이런 내게 성경 읽기는 그렇게 낯선건 아닐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더 좋은, 더 넓은 독서를 위해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세기의 시작부터 걸리적거렸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이런 말씀을 본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을 먼저 만들고 흐음, 좋지 아니하네, '그(남자)를 위하여', '그를 돕는' 여자를 만들자, 하게 된 것이라는데, 내가 이 나이 먹고 이 정도의 삶을 살아오고 이 정도의 경험을 한 후에 읽는 저 구절은 성경책을 덮게 만든다. 함께 읽는 친구에게 돕게 하려고 만들었대, 아오, 나 어떡하지, 물었더니 친구는 내게 그랬다. "앞으로 계속 너 화나게 하는 말 많이 나올거야."
후. 애당초 저렇게 쓰여져 있으니 종교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성경에 쓰여진 말씀대로 사는건 너무 당연한거 아니었을까.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저게 뭐여 하겠지만 그 종교 안에 있다면 말씀을 따르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을까. 나는 이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해 만들었다'는 걸 분명 얼마전에 어딘가에서 봤는데, 아 보면서 그 때도 이것이 뭣이여 했었는데, 아 그게 뭐였더라, 하면서 역순으로 내가 읽은 책들을 떠올리다가, 아아, 푸코, 푸코의 성의 역사에서 봤다! 했다. 그렇게 내 책장 앞으로 가 푸코 <성의 역사 4>권을 꺼냈다.
내 책장이 좋은 이유는 내가 원할 때 책장 앞으로 가 맞춤한 책을 꺼내들고 찾아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어제 김치찜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아아, 성의 역사 4권이다, 하고는 책장 앞에 가 책을 꺼내들고 원하는 부분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여러분은 알쥬?
육체의 고백에는 부부의 의무에 관련된 부분이 나온다. 푸코의 주장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여러 철학자들이 결혼과 아내, 부부에 관해 쓴 것들을 추려서 공통적인 주제들을 정리해둔 부분인데, 거기에는 불평등의 원칙이 존재한다는 것.
자연적 불평등의 원칙. <창세기>에 의하면, 하느님은 먼저 남자를 창조하고, 남자에게 여자를 '보조자'로 만들어 주면서, 남자에게 첫 번째 줄에서 명령하는 역할을 맡긴다. 그는 머리이다. "남편을 우두머리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여자를 몸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상상해 보자. […] 바오로는 남자와 여자의 자리를 지정한다. 한쪽이 권위와 보호의 자리라면, 다른 한쪽은 복종의 자리이다." -<육체의 고백>, p.383
여성주의, 페미니즘을 접하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사람들의 기본 전제는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신체적 차이가 있지만, 차이는 차이대로 인정하고 차별하지는 말자는 것. 그런데 성경은 애초에 불평등을 전제로 한다.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
게다가 이렇게 만들어진 여자인 하와는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것을 남자인 아담에게 권했기 때문에, 여자에게 아이를 낳는데 고통을 크게 하는벌을 내린다(창세기 3장 16절). 일전에 닐 게이먼이 자신의 소설 《멋진 징조들》에서 적그리스도인 아담 영, 천사,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악마를 등장시켜 말했던 이런 구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러게나 말이야. 그 나무에다 화살표를 그어놓고 커다란 글씨로 건드리지 말 것이라고 해놓다니. 그다지 치밀하다고 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왜 그 나무를 높은 산꼭대기에 올려놓든가 멀찍이 떨어뜨리지 않았느냔 말야. 정밀이지, 그 분이 뭘 계획하고 계신 건지 궁금해지잖아." -<멋진 징조들> 中에서
아마도 저렇게 그분의 뜻에 의문(?)을 가져서일까, 멋진 징조들은 영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는데, 기독교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내친김에 오만년전에 읽었던 멋진 징조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책은 지금 내게 없지만 그러면 다시 사야겠군...
다시 푸코 성의 역사로 돌아가면, 하느님이 부러 불평등하게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평등이 갈등을 야기할 거라고 한것. 이건 사실 하느님의 온전한 뜻이라기보다는 성경을 해석한 자들의 몫이었긴 했을테지만, 어쨌든 창세기의 말씀 대로라면 도우라고(help) 만든 존재가 여자이긴 하다.
하느님이 양성에게 똑같은 능력을 나누어 주지 않은 까닭은, 이러한 평등이 갈등을 야기하고, 여자들이 첫 번째 자리를 놓고 남자들과 다툴 만큼 자만심이 커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열에 따른 예절과 평화의 필요를 조정하면서,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을 둘로 나누어 남자에게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일을 맡도록 했고, 여자에게는 매우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을 부여했다. 그 결과 남자는 생활의 필수품 때문에 여자를 공경하게 되었고, 여자는 자신의 일이 열등하다고 해서 남편에게 반항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호보완성이 잘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 남자가 자기보다 부유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부유한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는 '상전'을 맞아들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자기보다 가난한 여자를 고른다면, 그는 여자에게서 '보조자, 지지자 […]'를 찾은 것이다. 자신의 가난 때문에 갖게 된 불편한 생각으로, 여자는 남편에 대해서 온갖 정성과 관심을 쏟고, 복종하고, 헌신함으로써 모든 부부싸움의 원인은 제거되었다. -<성의 역사 4>, p.384-385
얼마전에 여행프로그램을 보았는데, 거기에서는 중국의 외진 마을을 보여주었다. 여행자는 그곳의 사당에 들렀는데, 그 마을에서 모시는 신은 천지를 창조했다고 했다. 그 프로그램을 같이 보던 엄마는 "어? 그건 하나님이 하신건데?" 하셨고, 나 역시 어릴적부터 기독교였던 터라, 그러게, 하였지만,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은 결국은 하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섬기는 자들에 따라서 기독교의 모습, 이슬람 교의 모습, 불교의 모습이 되는건 아닐까. 왜냐하면, 하나같이 종교들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대하질 않았으니까. 이는 '수 로이드 로버츠'의《여자, 전쟁》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나는 책장 앞으로 가 그 책도 빼내온다.
수 로이드 로버츠는 감비아로 가 이슬람교의 우두머리인 '이맘'을 만난다. 그곳은 어린 여성들의 성기를 절단하는 할례가 이루어지는 곳이었고, 한번도 여성의 성기를 가지고 살아본적 없는 남자사람 '이맘'은 그러나 누구보다도 자신있게 여성의 성기에 대해 연설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이것이 이슬람 문화권에서 받아들여져온 이유이며,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는 이유, 또 그것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이유입니다."
배석한
남자들이 동의의 뜻을 담아 연신 끄덕거리는 분위기에 취해, 이맘은 말을 계속했다. "FGM은 여성에게 이로운 일입니다. 할례할 때
잘라내는 것은 매우 가려운 부위예요. 너무나 간지러워서 그걸 완화하려면 철수세미로 문질러야 할 정도라고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말이죠, 할례를 하지 않은 여자는 축축한 분비물이 나와요. 의자에서 일어날 때마다 옷이 잔뜩 젖을 지경이라 공공장소에 있다면
정말 망신스러운 일이 될 거예요."
이쯤 되자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여자로서, 약간의 분노를 담아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클리토리스를 가진 채 60년을 살았어요. 그리고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는 능글거리는 눈빛으로 답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요, 당신은 일반적인 여자들과는 좀 다른가보죠."
앞선
무식한 주장보다도 이 웃음에서 더 이상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진심으로 어린 여성들의 성기 절제가 신의 섭리이고,
여성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웃지 않았으리라. 그는 자신이 내뱉는 말이 상식에 어긋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점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 자체가 성기 절제는 오직 여성 통제를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자, 전쟁> p.28-29
할례가 아예 없어지진 않았지만 그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여자 전쟁 속에서 할례의 문화 속에서 살던 여자가 그를 피해 도망치는 얘기가 나온다. 지금 수많은 여성들은 보조자의 돕는 위치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돕는 것은 돕는 것대로 물론 충분히 의미있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러나 앞에서 이끄는 것 역시 마찬가지, 그것을 할 수 있고 하고싶어 한다면, 여자들이라도 그러하면 된다. 여성들이 보조적 위치에만 있지 않겠다고 항의하고 나서고 행동하는 것은, 어쩌면 애초에 신이 인간을 빚었던 그 의도보다 여자들이 더 똑똑하게 진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해야 한다는 신념은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훔친 이래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여성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고 경고해왔다.- <여자 전쟁>, P29
여자 전쟁 얘기가 나온 김에 아일랜드 얘기를 덧붙여보자면,
대체 아일랜드의 종교단체가 운영한 세탁소 체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걸까? 1767년 처음 문을 열었던 세탁소는 200년 이상 지속되어 마지막 세탁소가 1996년 문을 닫았다. '타락한 여자들'로 낙인 찍힌 여자 수만 명이 창피해하는 가족들과 위선적인 사제들에 의해 이곳으로 보내졌다. 도덕적 탈선으로부터 지역사회를 지킨다는 명목이었다. 단체의 이름은 예수의 추종자 가운데 한 명이자 '회개한 창녀'로 일컬어지는 막달라 마리아에서 비롯됐다.
여성의 성에 대해 성모마리아가 비현실적으로 엄격한 기준을 세운 이래 남성들은 이에 대비되는 '타락한 여자' 에 집착해왔다. 초기 기독교의 현자로 통하는 성 예로니모는 4세기에 "여성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글을 남겼다. 13세기에 발의된 교회법Canon laws은 여성 감금을 정당화했다. "추악한 육욕으로 인해 결혼의 침상을 내버리고 타락한 여성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종교에 귀의한 여성들이 있는 수녀원에 배속시켜 영구적인 고행을 하도록 해야한다" 19세기 초 아일랜드에서는 이런 사상이 인기를 얻었고 대부분의 대형 세탁소가 이때 지어졌다.-<여자 전쟁>, p.86
나는 아직 성경을 다 읽기 전이고 또 다른 종교서도 읽어본 적이 없으니 신이 어떤 식으로 그 다음을 말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신이 여성을 감금하라고 하진 않았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만, 신이 남자를 먼저 만들고 그를 위해 여자를 만들었으며, 선악과를 따 먹은 것 역시 이브의 원죄라는 것. 그 사상은 아마 대대적으로 내려온게 아닐까. 그것이 후세에도 '여성은 만악의 근원'이라는 말이 나오게 만든 것이고, 결국 남자들의 기준으로 '타락한'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빌어 감금하게 한게 아닐까.
어느 정도냐면, 타락한 여자들만 보내는 게 아니라 타락할 위험에 빠질 것 같은 예쁜 소녀들도 보내진다.
아일랜드에서는 전통적인 아일랜드
도덕 관습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 누구에게나 '타락한 여자'라는 꼬리표를 너무나도 쉽게 붙였다.
창녀는 물론이고 근친상간이나 강간 혹은 사고로 인해 임신하게 된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도 '타락한 여자'로 분류됐다. 어떤 여자들은
심지어 '예방 차원'에서 세탁소로 보내졌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수녀들은 외모가 특출하게 빼어난 소녀들을 '타락할 위험이
높다'며 세탁소로 보냈다. 메리 메릿은 아마 반항기가 지나치다는 이유로 세탁소에 보내졌고, 그것이 파멸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엄격하게 유지해야 할 필요와, 노동자를 공짜로 부려먹으면서 이익을 얻으려는 종교단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이들 세탁소는 그 정당성을 더욱 공고히 확보했다. -<여자 전쟁> p.88
나쁜 건 제속도를 스스로 멈추지 못하고 더 나빠진다. 타락한 여자들을 감금하고 노동시키는 것도 그러했지만, 여자는 결혼한 이상 남편의 성관계를 거부해서도 안되고 임신하고서는 아이를 낳지 않아서도 안된다.
아일랜드 의사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여성의 골반이 너무 작아 자연분만을 하기 힘들다면 골반 뼈를 부러뜨려서 출산하도록 처치한다는 것이었다. "의사가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쇠톱을 가져오는 걸 봤습니다." 노라 클라크Nora Clarke가 기억을 떠올린다. "정육점에서 동물을 자를 때 그걸 사용하는 걸 봤기 때문에 이사가 가져온 게 쇠톱인 걸 알았죠. 그 의사는 내 뼈를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피가 샘처럼 솟아올랐고, 사방으로 튀었어요. 간호사들은 뼈를 자르는 걸 보고 속이 뒤집혔어요. 의사는 피가 안경에 튄다며 화를 냈고요." -<여자 전쟁> p.98-99
오늘은 창세기 4장부터 7장까지를 읽었다. 아담과 하와의 자식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은 가인의 농사지은 제물은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물인 양은 받으셨다. 왜 자기의 제물은 받지 않았는지 가인은 분노하는데, 나 역시도 왜 내가 준 건 안받고 쟤가 준 건 받지? 하면서 또 어리둥절 해지는거다. 이 부분 읽다가 친구에게 말하니 친구는 영어로 번역된 부분을 찾아 보여주었다. 가인이 드린건 자신이 농사지은 수확물이었으되, 영어에서 아벨이 드린건 '첫번째' 이며 'the best' 라고 했다. 음..
고작 창세기의 7장까지 읽었을 뿐인데 양미간에 주름 뽝지는 부분들이 여러차례 나오고, 그렇지만 이야기로서 재미있다. 좀 어이없는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이렇게 빡이 쳐서, -친구가 하와를 만난 부분의 영어 번역본도 보내주었는데, 너무나 당당하게 'for him' 이라고 써있었다- 내가 이 성경 한 권을 앞으로 읽어내는 일이 마냥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을 읽는 나의 입장은 '비종교인'이며 '성인 여성'이기 때문이겠지. 아마도 나는 성경을 읽다가 이렇게 여성주의 책을 떠올리는 일이 빈번하게 있지 않을까.
아무튼 오늘은 좀전에 오늘의 읽기를 마쳤다. 마음먹은 이상, 다 읽어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