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전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했었다. 대학시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을 읽고 그에게 흠뻑 빠졌고, 그전에 읽었던 《상실의 시대》와 《양을 쫓는 모험》을 다시 읽으면서 그의 책들을 차례차례 읽으며 전작을 목표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의 소설은 별로지만 에세이는 좋다고 말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아주 좋아했다. 너무 좋아했다. 대학 졸업후에는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걸으면서 읽다가 전봇대에 부딪히기도 했고, 몇년 후 생일에 한 친구가 《해변의 카프카》를 선물해줬을 때에는 '아이고 어째, 나 이미 읽었어' 했더랬다. 그의 단편집 《빵가게 재습격》은 친구를 만나러 가며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지하철 역에서 내리고 계단을 오르면서도 쿡쿡대고 웃느라 멈춰야 했다. 나는 그가 쓰는 문장들이 재미있었고 그의 농담이 내게는 아주 잘 통했다. 그의 에세이도 좋아하지만 나는 그의 소설을 정말 좋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소설들에서 좀 걸리적 거리는 부분들이 나타났(다기 보다는 내가 알아챘)고, '이건 왜그래?'같은 것들 때문에 유감스럽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의 소설은 재미있다고 늘 생각해왔다. 크- 역시 재미있어. 나는 하루키의 소설이 재미있다. 여성의 외모 품평(미인이다, 미인인 편이라 할 수 있다, 미인은 아니었다, 추녀였다 등등)이 언제나 매번 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동그란 젖가슴에 집착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이야기를 무엇보다 그의 유머섞인 문장들을 좋아하며 읽었단 말이다. 《버스데이 걸》같은 뭔가 기획상품스런 책에 실망해서 읽자마자 팔아버렸어도 그 책으로 페이퍼도 쓸만큼 생각할 것들이 있었고, 그러니까 하루키는 내게 딱히 실망이란 걸 주지는 않는 작가란 말이다. 《일큐팔사》의 아오마메를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아오마메가 고환 걷어차기를 강의할 때는 자지러지게 좋았더랬다. 왜 미성년자 여성과 종교지도자인 남자와의 섹스를 그렸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너무 읽기가 괴로웠지만, 나는 그의 소설을 재미없게 읽는 독자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신간이 나오자마자 피할 수 없다는 듯 덜컥 사버리고 덜컥 읽었겠지. 그런데,
이 신간이 재미없다. 앞에서부터 내리 두 편을 읽고 물음표 천개 되었다. 뭐지? 뭐지? 하면서 그러다가는 '내가 변한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의 예의 그 유머있는 문장은 여전한데, 그런데 더이상 재미를 찾을 수 없게끔, 내가 변해버린건가? 아무튼 내리 두 편이 재미 없어서 당황해 책장을 덮었다가, 그래도 읽자 하고는 결국 다 읽었는데, 몇몇 문장들에서는 '아 역시 하루키야'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 이번 신간은 별로구나.. 했다.
좋아하는 작가가 동시대를 살아가며 계속해서 신간을 발표해준다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기쁜 일이다. 나는 하루키가 사는 동안 내내 이렇게 신간을 발표해주었으면 좋겠고 내가 이 작품에 실망했다한들 다음에 나올 작품도 또 사서 읽어볼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에게 이제 소설의 소재는 과거로부터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생인데,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주요한 사건을 죄다 젊었을 때 경험하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상념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 소설들을 채우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가져오는것이야 말로 소설가의 힘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같은 경험을 했어도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이 소설가의 재주일 것이고, 경험하지 않은 것도 경험한 것처럼 꾸며내는 것 역시도 능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루키는 여전히 뛰어난 소설가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최근에 읽었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떠올리게 됐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1956년생이다. 하루키보다 일곱살 젊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신간 《다시, 올리브》에서 노년을 겪는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을 그려낸다. 물론 올리브 역시도 사이사이 과거의 일들을 드러내고 추억하긴 하지만, 그러나 올리브는 지금 이 순간이 자꾸자꾸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하루하루 더 나이들어 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 그녀의 신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다치고 죽는다. 나의 경우에는 영원히 살고 싶다고 늘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늙어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지속하는지 어떻게 친구를 사귀는지 어떻게 서로를 위로하는지를 보는 것은 당연히 가슴에 와 닿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내가 늙어간다는 것도 역시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올리브의 이야기가 더 좋았던건지도 모르겠다. 나이들어가는 작가가 나이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이야기가 나는 무척 좋았던 거다. 아무도 경쟁시키지 않았지만 나는 나 혼자 하루키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경쟁시켜버렸고, 고민의 여지없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실린 단편들 중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는 대학 시절 '찰리 파커가 살아서 보사노바를 연주했다'는 상상의 기사를 쓴 중년 남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그동안 읽었던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하루키는 음악을 대단히 좋아하고 듣는 귀도 좋아서, 연주만 듣고서도 세션맨들을 알아맞히곤 한다. 오 이 연주는 누구네, 오 이 공연은 언젯적 어디 공연이네, 하는 것들을 다 아는 거다. 이 단편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에서도 자신이 상상한 밴드에서 자신이 상상한 연주자에게 그 자리를 주고 그 음악을 역시 상상으로 듣는데, 나는 하루키가 음악 얘기할 때마다 그가 소설을 써내는 것만큼이나 신기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좋아하면 반복적으로 하기 마련이고 반복적으로 오랜 시간을 들이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하기 마련이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트럼펫은 누가 기타는 누가, 하는 것들을 대체 어떻게 소리만 듣고 알아맞힌단 말인가. 이건 반복해 들은 오랜 시간이 도와주긴 했지만 애초에 그런 감각을 타고난 게 아닌가 싶은 거다.
누구나 다 타고난 재능을 저마다 갖고 있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재능이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말 아닌가. 나는 하루키의 음악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도대체 내가 이렇게 가지고 태어난 감각은 뭐가 있는가 생각해보았다. 너무 좋아해서 오랜 시간을 들이고 오랜 시간을 들이다보니 남들보다 훨씬 잘하게 된 것, 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없다. 내가 남들보다 글을 더 열심히, 매일 쓴다고 해서 줌파 라히리 같은 작가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여성학 책을 아무리 읽고 공부한다고 해도 정희진 처럼 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빵을 이제부터 열심히 굽는다한들 세계 제일의 파티쉐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먹방을 찍을만큼 많이 먹을 수 있나? 내가 아무리 열심히 운동한다고 해도 한혜진 처럼 될 수 있을까? 없다. 없어. 내가 지금 아무리 시간을 들여 노력한다해도 나는 그 어느 것에서도 누구보다 뛰어날 수가 없다. 나는 그래봤자 그냥 나다. 나야... 나는 그저 보통의 사람. 그래서 천재들을 보면 마냥 존경 존경.. 이렇게 되는 것이다. 천재들에게 감탄하는 그저 보통의 사람이여...
<사육제(Carnaval)>는 오십대의 하루키가 한 십년정도 그보다 젊은 여자를 우연히 만나면서 진행된다. 둘은 클래식 공연에 갔다가 자리를 함께 하게 되는데 알고보니 둘다 슈만의 '사육제'를 가장 최고로 꼽고 있다는 공통점을 찾게 된다.
어쨌거나 그 반년 동안, 우리는 틈나는 대로 열심히 <사육제>를 들었다. 물론 <사육제>만 들은 것은 아니고 때로는 모차르트도 듣고 브람스도 들었지만, 직접 만녀만 반드시 누군가의 <사육제>에 귀기울이고, 그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내가 서기를 맡아서 우리의 의견을 요약하고 기록했다. 그녀가 우리집에 온 적도 몇 번 있었지만, 내가 그녀의 집으로 가는 쪽이 훨씬 많았다. 그녀의 집은 도심에 있었고 우리집은 교외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이서 총 마흔두 장의 <사육제>를 듣고 난 후, 그녀는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의 연주(엔젤반)를 베스트로 꼽았고, 나의 베스트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연주(RCA반)였다. 우리는 한 장 한 장의 음반을 면밀히 채점했지만, 물론 그런 순위에 중요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건 덤으로 따라오는 놀이 같은 것이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에 대해 주고받는 심도 있는 대화, 열의를 품을 수 있는 무언가를 거의 목적 없이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p.165-166)
위의 부분을 읽는데 자연스럽게 영화 《사이드웨이》가 떠올랐다. '마일스'는 와인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시음하러 다니고 수집을 한다. 자신의 절친이 결혼하기 전 함께 총각파티로 와이너리 여행을 하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마야'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는데, 마야와 그녀의 친구 그리고 마일스와 그의 친구가 한자리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면서 마야와 마일스 둘만 남아 와인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마일스가 와인을 좋아하고 수집한다는 얘기를 한 터다.
마야: 수집한 와인 중에 가장 좋은 와인이 뭐에요?
마일스: 61년산 슈발 블랑이요.
마야: 어떻게 그걸 안마시고 가지고 있을 수 있어요?
마일스: 특별한 순간에 마시고 싶어서요.
마야: 당신이 그걸 마시는 순간이 특별한 순간이에요.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장면인데, <사육제>에서 저 두 등장인물이 바로 이런 순간을 경험하는 거다. 여러 연주자들의 연주 얘기를 하며 누구의 무슨 연주를 제일 좋아해? 물었더니 남자가 슈만의 사육제라 답하고 여자는 깜짝 놀라면서 자신도 그렇다고 말하고, 그렇게 그들은 와인 한병을 또 새로 비우면서 좋은 음악 친구가 되는 거다. 그 후에는 함께 슈만의 사육제 연주를 찾아 듣게 되고, 새로운 음반을 찾게 되면 함께 들어보자 서로에게 청하고 서로의 집을 오고가는 그런 사이가 되는 거다.
와, 진짜 너무 좋지 않은가. 나는 이런 거 진짜 너무 좋다. 취미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서 나와 친한사람이라고 해서 나와 취미가 같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취미가 같은 사람과는 그 특유의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 이야기가 즐거워진다. 한 작가의 책이 나올 때마다 그 작가의 신간 소식을 서로 알려주고, 읽고나서 어땠는지 이야기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특별하고 또 아무나랑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걸 나눌 수 있다는 건 진짜 너무 좋다. 나에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을 전해준건 나의 오랜 친구였는데,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 그리고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내가 흥분하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신간이 나온대! 라고 해봤자 '그게 누군데?' 할게 아닌가. 애초에 그 작가를 기다리는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할텐데 올리브 키터리지라고 너무너무 좋은 작품이 있어, 라고 한들 우리의 대화는 그 뒤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알라딘을 좋아하는 건 그런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시 올리브가 나올 것이라거나 읽고 있다는 글을 쓰면, 그 책을 이미 읽었거나 읽을 사람들이 저마다 말을 거는 거다. 나는 그 이야기의 이 부분을 좋아해, 라던가 아아 그거 읽고 싶었는데 너는 벌써 시작했니? 하는 것들. 이런 거 진짜 너무 좋잖아. 흥분은 같이 해야 재미있지 혼자 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영화 《내 남자는 바람둥이(surburban girl)》를 보면, 이미 유명한 편집장인 오십대 남자가 훌륭한 편집자가 되고 싶은 편집 보조인을 집으로 불러서 '밀란 쿤데라랑 찍은 사진이야' 라며 자랑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자랑이 통하려면 상대가 밀란 쿤데라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모르는 사람에게 밀란 쿤데라랑 사진을 찍은 적이 있지, 하면 그게 뭔데? 할 거 아녀... 그러면 자랑하려던 나의 흥은 짜게 식어버리지...
그런데 원제는 surburban girl 인데 왜때문에 내 남자는 바람둥이 같은 제목이 되었을까? 부끄럽기 짝이없다.. 내 남자는 바람둥이.. 웩 -
그나저나 푸코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육식의 성정치는 진짜 엄청 재미있을 거라고.... 휴...... 푸코 근데 언제 다 읽지? ㅜㅜ
오늘도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푸코 읽어야 하는데 자꾸 다른 책만 들춰본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