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무얼 하고싶다는 목표가 몇 개 있었고 그리고 그 목표대로 대부분 이루면서 살아왔다. 내가 그 목표 하나만을 보고 그 방향으로 걸어갔기 때문이고 또 그 목표 자체가 그리 원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목표하는 것을 이루는 삶을 사노라면 그 충족감이 매우 커서,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하면서 또 새로운 목표를 세우게 된다. 언젠가 엄마는 내게 꿈을 크게 가지라 하셨는데, 엄마 그래서 이루지 못하면? 이라 되물었더니 '이룰 수 있는 꿈을 꿔야지' 하시는거다.
엄마, 꿈을 크게 가지라며?
꿈은 크게 가져야지!
너무 커서 이룰 수 없으면?
이룰 수 있는 꿈을 꿔야지.
꿈을 크게 가지라며?
크게 가져야지!
이룰 수 없으면 어떡해?
이룰 수 있는 꿈을 꿔야지.
를 무한반복하던 산책길이었다. 올림픽공원이었다. 이 날이었는지 다른 날이었는지, 언젠가는 엄마와 올림픽 공원을 산책하다가, 그러니까 이건 아주 오래전 얘기인데, '엄마, 나는 그 남자를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이렇게 잊을 수가 없지?'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엄마가 내게 말했다.
"너 그 남자랑 뽀뽀했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대꾸를 하지 못하고 그냥 터져서 웃기만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왜냐면 정말 뽀뽀했기 때문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또 터지네.
아, 근데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꿈 → 엄마 → 산책 → 뽀뽀 또 이렇게 되어버렸네. 이긍..
삶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것도. 목표를 두고 그것을 이루고자 하노라면 삶의 모든 순간의 선택이 그 목표를 보고 달려가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이루어냈을 때는 내 안에 충족감이 또 한 칸 쌓이고. 그렇게 삶의 만족도는 높아지고 또 높아진다. 그렇게 오늘은 오늘의 목표를 이번 해엔 이번 해의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는 일은 삶에 있어서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내 인생의 목표를 세웠을 때는 나에게 기한을 주진 않았더랬다. 나는 스트레스에 취약한 편이라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한다고 정해버리면 거기에 갇혀서 스트레스를 왕창 받기 때문이다. 대신 '살면서 이건 이루자'고 기한을 무한정 주는 편이다. 그 방향을 보고 가되 치열하지는 말자, 스트레스에 갇히지 말자,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굵직하게 세워두었던 것들을-남들이 보면 작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비슷하게 이루면서 살아왔다. 이를테면 뉴욕에서 살겠다는 게 그중 하나였는데 여행을 세차례 다녀왔고 뉴욕에서 살 순 없겠다고 깨닫게 되었다. 내가 뉴욕에 처음 갔던 스물아홉에, 내 주변인들은 내게 '그렇게나 가고 싶다고 하더니 정말 다녀왔네' 라고 말을 했다. 완전히 꼭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나는 삶에서 추구하는 것들을 이루면서 살아온거다.
내가 이 목표들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목표가 '나 혼자' 해낼 수 있었던 것들이었던 영향이 크다. 아니 그게 전부라고 봐도 된다. 만약 내 목표가 '내가' 하고자 하는게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을 이루는 것은 매우 힘들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도 된다. 그 누군가는 나와 완전히 같은 걸 바랄 확률이 매우 희박하므로.
'무라카미 류'의 《55세 헬로라이프》의 단편중에는 은퇴한 남자가 아내와 함께 여행하며 살기 위해 캠핑용 트럭을 구입하는 이야기가 있다. 읽은지 오래되어 기억은 희미하지만(독서공감에 이거 쓴것 같다), 남편은 그게 자신의 꿈이었던 만큼 아내도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기 그런 제안을 받은 아내는 당황하고 기분 나빠한다. 자신은 자신의 삶이 있는데 갑자기 차를 타고 여행을 하자니... 남편은 그런 아내를 보고는 '아니, 이 좋은 걸, 내 꿈인데, 왜 안좋아하지?'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다.
나는 포틀랜드에 가고 싶다. 이걸 이루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코로나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지만, 혹여 안정적인 시기가 온다면, 나는 비행기표를 사고 호텔을 알아보고 시간을 내어 훌쩍 포틀랜드로 날아가면 된다. 포틀랜드에 호텔을 잡아두고 여유롭게 눈을 떠서 아침에 20분간 요가를 하고 슬렁슬렁 한가하게 도시를 산책하고 싶다. 관광지를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호텔 주변을 슬렁슬렁 다니다가 까페에 들어가서 차도 마시고, 맛있는 밥을 사먹고, 책을 읽고, 공원 벤치에 앉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이것은 나에게 이루지 못할 꿈이 아니다. 시기를 알 수 없을 뿐,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얼마전에 포틀랜드를 티비에서 보고 아 좋다, 역시 가고 싶어, 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특정인을 생각했다.
'내가 앞으로 살면서 죽는날까지 그 사람이랑 포틀랜드에 함께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그건 이룰 수 없는 일이겠지' 라고 그 불가능을 점쳤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불가능이 구십구프로였다. 그 상대와 나의 사이가 이제 친근하지 않을 뿐더러, 그 사람이 포틀랜드에 가고 싶어하지 않을 확률이 더 높으니까. 설사 친근하고 포틀랜드에 가고 싶다고 해도 우리는 시간을 맞춰야 하고, 가서 보내는 일정 자체도 우리의 뜻이 일치하지 않을 확률이 크다. 결정적으로 나는 포틀랜드에 가고 싶지만 당신도 가고 싶은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거다.
모든 목표가 이렇겠구나, 생각했다. 모든 목표에 누군가를 끼워넣는다면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나 혼자만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 상대와 의논해서 우리의 욕망을, 시기를, 에너지를 맞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 목표가 공간 자체를 타국으로 이동하는 것이라면 더 그렇다. 내가 베트남에 가 장기체류 하고 싶다고 하면 그것이 나 혼자뿐일 때는, 여러가지 준비과정을 거치고 고된 시간이 분명 따라오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러나 '당신과 함께 베트남에 가고 싶다' 라고 하면 어려움은 배가 될 것이다. 결정적으로 '나는 베트남에서 살기 싫은데?' 라고 하면 나는 상대에게 결코 강요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모든 목표가 이렇겠구나, 이루고 싶다면 나는 그 모든 것을 '혼자'로 방향 설정해야 해. 혼자로 제한해야 이룰 가능성이 높아진다. 당신과 함께 포틀랜드에 가는게, 당신과 함께 베트남에서 사는 게, 당신과 함께 오로라를 보는게 이번 생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겠지만, 그러나 내가 포틀랜드에 가고 내가 베트남에 살고 내가 오로라를 보러 가는 것은 어떻게든 이번 생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일 것이다.
내가 그 모든 것을 혼자 꾸는 꿈이라 해서 삶이 슬프다거나 불행하다거나 하지는 않다. 나는 삶은 기쁨들로 가득 채워져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왜 이 긴 글을 썼냐면, 그건 루시 바턴 때문이다.
루시 바턴은 맹장을 떼어내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는데 원인 모를 합병증으로 입원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남편은 병원을 싫어해 아내가 입원한 병원을 자주 찾지 않고, 여섯살 다섯살 딸 아이는 '아이는 없는 지인'이 돌보아주고 있다. 어릴 때 무척 가난하게 살아서 친구들로부터 냄새 난다는 놀림을 받았고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잘 알 수 없었던 루시는, 입원해있는 동안 문병온 어머니와 과거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자신의 친구들도 떠올리면서 그 시간을 보낸다. 자신을 진찰해주는 담당의에게 사랑을 느끼고(이건 올리브 키터리지도 그랬는데!), 퇴원해 집에 가서 아이들을 보고 싶은 그리움에 가득차기도 한다. 그러나 삶은 계획한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서, '아이는 없는 지인'은 루시가 입원한 사이에 루시의 남편과 사랑에 빠진다. 결국 루시는 남편과 이혼하고 남편도 루시도 재혼을 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특유의 조용한 감정으로 독백되는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너무 좋다. 나는 몇해전에 이 책을 이미 읽었는데도 다시 읽으면서 어느 부분은 아 맞아 그랬었지 했고 대부분의 내용에서는 아니, 이런 내용이? 하며 새로워했다. 어차피 책을 읽어도 다 기억하지 못할거라면 책은 왜 읽는담? 회의도 했다.
다시 읽기 위해 이 책을 꺼냈는데 포스트잇 북마크가 붙여져있지 않아 아, 인상적 구절이 없었나? 했는데, 읽다보니 내가 책장 모서리를 접어 두었더라. 아 이거 읽을때는 포스트잇 꺼내기가 귀찮았구나, 했다.
그렇게 다시 읽는 책에서는 접혀 있지 않은 부분의 책장을 접어야 했다. 바로 이 부분이었다.
가족들과 야구장에 갔던 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루시 바턴이다.
야구장! 내가 야구장을 보고 감탄했던 게 기억나고, 선수들이 안타를 치고 달리던 게 기억나고, 관리인들이 밖으로 나와 흙을 판판하게 고르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가장 생생한 기억은 해가 지면서 햇빛이 근처 빌딩들, 브롱크스 지역의 빌딩들에 가 닿던 장면이다. 그렇게 햇빛이 그 빌딩들을 비추고 나면, 이어 여기저기 도시의 불빛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내 앞에 그 세상이 돌연 펼쳐진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다. -p.203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내내 좋다고 생각했지만, 위의 부분을 읽으면서는 가슴 가득 행복이 폭발할 것 같았다. 저 때 루시가 느꼈던 행복은 옆에 있는 누군가가 준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루시 혼자서만 오롯이 느낀 것이었다. 해가 지는 풍경, 빌딩들에 빛이 가 닿던 장면들은 온전히 그 순간 루시만의 몫이었다. 그리고 도시의 불빛들이 켜지는 걸 목격하는 그 길지 않은 순간, 그 아름다운 광경을 몸소 느끼는 것은, 루시니까 가능했다.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루시였다. 이 장면에서 마치 내가 루시가 된것마냥 지는 햇빛과, 도시의 불빛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자 내 가슴 가득 뻐근함이 밀려드는 거다. 너무 좋았다. 정말이지 너무 좋아서, 저 부분만 읽고 또 읽었다. 아니 바보처럼, 왜 처음 읽을 때 여기를 접어두지 않았어? 책을 꼭 끌어안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고보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이런 작가였다. 맞아, 이런 작가였다. 일상의 작은 기쁨을 포착해낼 수 있는 그런 작가였다. 지는 해를, 도시의 불빛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순간을 잡아내는, 그런 작가였어. 나는 이 장면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장면을 나 역시 언제고 경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일어나기 싫다고 혼자 속으로 징징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길을 나서면서 새벽이 아침으로 바뀌는 풍경을 나는 몹시 좋아하지 않았던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거 싫지만 이런 거 보는 거 너무 좋아, 여름이 좋지만 겨울에는 같은 시간에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지, 하면서 나는 행복해하는 거다.
루시가 야구장에서 만난 풍경에서 느끼는 그 감정이 그래서 나는 뭔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너무 좋았다. 이런 건 내가 느끼는 꼭 그만큼의 크기를 누군가 동시에 함께 느끼는 것이 쉽지 않다. 불가능하지 않지만 쉽지 않다.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작은 행복들이 누군가와 함께 이루어내고 만들어가고 경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은 혼자일 때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행복의 크기를 느낀 사람과는 좀 특별한 관계가 되는게 아닐까.
여러가지로 지쳐있지만 지친 틈에서도 나는 이렇게 아침 풍경을 감상하고 커피를 내린다. 가방에는 초콜렛도 있었다. 커피와 초콜렛을 함께 먹으니 좋았다. 토요일에는 점심 저녁으로 무얼 먹을지 이미 다 정해두었다. 일요일 점심도. 그렇게 작은 목표들을 세우고 또 이루어내면서 삶의 만족도를 높인다. 여동생은 이런 내게 먹는 것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계획이 철저한 사람이라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동생의 말은 틀림이 없다.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