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고 지성적이며 지혜롭고 검소한 남자와 선하고 지성적이며 지혜롭고 검소한 여자가 만나서 아이를 낳았더니 그 아이는 선하고 선하고 선하고 선하고 선하며 지성적이며 지성적이며 지성적이며 지성적이며 지혜롭고 지혜롭고 지혜롭고 검소하고 검소하고 검소하고 검소한 어른으로 성장해갔다. 자라는 동안 선한 아버지와 선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세상에 혼자 남은 고아가 되었지만 이렇게나 선하고 선한 인물에게 나쁜 일이 생길게 무언가. 그녀의 선함과 검소함과 지성은 모두의 칭송을 받고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부터도 존경을 받는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살게 해주기 위해 그녀는 기꺼이 소녀들의 교육에 힘을 썼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인물이 있나 싶을 정도의 인물들이 이 책 안에서는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보여지는데, 이 책의 저자인 '조피 폰 라 로슈' 는 선한 인물에 대한 어마어마한 판타지를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중간까지 읽으면서는 미덕 컴플렉스 있나, 미덕이란 말이 뭐 이렇게 나오나 할 정도였고, 이렇게 미덕과 미덕이 결합하여 미덕으로 탄생한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려고 이렇게 하나, 싶었다. 사실 자신이 가진 지위나 재산으로 더 낮은 지위의 자들에게 돈을 주어 돕고 교육을 시키고 하는 이런 행동들도, 분명 선한 의도에서 나온 거였지만, 그거 너무 잘 알지만, 그러나 신분을 없애기 보다 신분을 더 공고히 하는게 아닌가, 이것은 지위가 낮은 자들을 너무나 자기보다 하등하게 보는 시선이 아닌가 하는 불편함도 좀 느꼈고 말이다. 게다가 책 속의 목사 입을 빌어 여성이 남성의 미덕을 따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여자에게는 여자의 할 일이 있고 남자에게는 남자가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라고 말을 해서, 역시 옛날 작품이군...할 수밖에 없었단 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외로 슈테른하임 아가씨는 곤경에 처한다. 심지어 납치도 당해. 그것은 난봉꾼인 한 남자에 의해서인데, 그녀에 대해서는 다른 여자들과 다른 매력이 있고 그래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비밀 결혼까지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않자 해를 입히는 거다. 이토록이나 선하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남자에 의해서라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때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 작가는 전혀 그런 의도로 쓴 책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쩔 수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의 존재는 예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잘 알겠다.
1730년에 태어난 작가이니만큼 이 책 속의 사랑 이야기는 도무지 답답해 따라 읽을 수가 없다. 신분제 때문에 사랑을 속이는 거야 그렇다쳐도, 자기 사랑을 왜 자기가 말을 못하고 누가 대신 말해줘야 하고 누가 대신 청혼해야 할까. 그리고 감정이 되게 과잉되어져 있는데, 이런 것들을.. 견딜 수 없는 것은 내가 지금의 사람이라서인가. 내가 1730년에 태어나 작가와 같은 하늘 아래 살았다면 나도 이런 삶속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을까. 아무튼 미덕이란 단어는 이 시대의 소설이기 때문에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슈테른하임 아씨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당연히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여럿 생기는데, 공교롭게도 시모어 경과 또 시모어경의 사촌형인 리치경이 그녀를 사랑한다. 둘다 슈테른하임의 미덕, 지성, 영혼을 사랑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살면서 고민한 남자들도 이 둘이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두 명과 결혼할 수는 없고 한 명만 슈테른하임의 남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리치 경은 동생인 시모어 경에게 양보하는데, 그런 시모어의 마음을 자기가 대신 가 슈테른하임에게 전한다. 슈테른하임은 리치경도 나를 좋아하는데 어쩌나 했지만, 리치 경은 이제 슈테른하임을 여동생처럼 대하겠다고 한다. 내가 사랑한건 어차피 너의 영혼이었으니까 그게 가능해!
내가 사랑했던 것은 레이디 시모어의 영혼이요, 정신이었습니다. 그녀가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 쓴 글들이, 그녀가 자신의 능력에 있는 최고의 것을 내게 선물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내 성품에 대한 진실한 존경, 진정한 신뢰, 내 행복에 대한 사랑스러운 기원이 들어 있지요. 한 번 품었던 좋아하는 마음의 풀 수 없고 수수께끼 같은 고집이 오랫동안 자신도 모르게 그녀 마음의 성향을 옭아매었지요. 그녀 영혼의 높은 가치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우정은 어떤 다른 사람의 포옹보다 더 사랑스럽습니다. 이제 내가 처한 인생의 가을이 나를 우정의 순수하고 달콤함을 모두 조용히 누리게 할 것입니다. 난 이 행복한 사람들 곁에 살 것이며, 둘째 아들은 리치 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내 마음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매일 나는 레이디 시모어와 이야기할 것이고, 그 정신의 아름다움은 내 소유가 될 것이며, 나는 그들의 행복을 위해 기여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사랑하는 시모어에 대한 내 결심을 축복해주셨고, 내 행복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존경스럽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달려 있지요. 친구요, 곧 나는 그녀를 보고 그녀와 말하게 될 겁니다. -p.386
하아.... 이게.....이게 어떻게 가능해....이게 어떻게 가능해.... 내가 사랑한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물론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사람 곁에서 그사람과 대화하며 그 사랑스러운 영혼을 매일 보면서 사는 삶이 어떻게 가능해.. 그것도 평생... 정말 괜찮아? 하아. 나만 속물이야? 나만 욕망의 동물이야?
그런 한편,
부럽다.. 정말 부러웠다. 비록 내 옆에서 나랑 함께 잠들고 내게 팔베개를 해줄 순 없지마는... 그래도 눈뜨면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어. 사랑, 애정이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대화로 완성되는 게 아니던가. 너의 생각과 의견 내가 듣고 나의 감상을 또 너에게 말하고... 결혼, 함께 산다는 것은 육체적 사랑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텐데, 사실 나이 들면서..섹스 같은 거 없어도 살 수 있고 안해도 사는데 지장 1도 없으며, 오히려 임신에의 공포로부터도 멀어질 수 있어. 그렇다면, 영혼의 파트너가 되는 것, 게다가 그것도 매일 만나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넘나 부럽지 아니한가. 궁극적인 행복의 목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베스트프렌드가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랑의 상대 따로 있고 베스트프렌드 따로 있는 것은 또 그대로 나쁘지 않잖아. 친구, 친구로 지내는 것은 이렇게나 좋을텐데. 아싸리 멀어져버리는 것보다 친구로 만나는 것이라면, 길지 않은 인생, 그걸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거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내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 때 티비 드라마중에 남녀고등학생들이 주연인 학교물이 있었고, 제목이 전혀 생각안나고 다른 등장인물 전혀 생각안나는데, 어쨌든 남자 주인공은 '이민우' 였다.이민우에게는 베스트프렌드 여사친이 있었는데, 어느날 이 동네에 공부 잘하고 예쁜 부잣집 여학생이 전학을 오고, 그 전학생과 이민우는 사귀게 된다. 이에 여사친은 자신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던 이민우가 이제 그런 시간을 여자친구에게 투자하게 되니 서운하고 속상해한다. 잘 기억은 안나는데 어쩌면 여사친은 이민우를 이성으로도 좋아했기 때문에 속상했던걸까? 그런데 불분명한 기억에 의지하자면, 전학생의 부모가 이민우를 싫어했던 것 같고, 그렇게 이민우와 전학생은 사귀는 사이었다가 헤어지게 된다. 이 때 왜 오지랖넓게 이민우의 여사친이 그 전학생을 만난건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그 때 '네가 좋아하는 이민우와 사귀었다'고 으스대는 전학생에게 여사친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이민우와 사귀었다고 으스대지만 결국 헤어져서 이제 다시 볼 수 없지. 그렇지만 나는 그의 친구로 남아 앞으로도 오래 옆에 있을 수 있어."
그때 고개 끄덕이며 그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이 드라마 때문은 아니고, 나는 어쨌든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좋아하는 상대와는 사귀기 보다는 친구가 되자고 마음 먹었던 사람이다. 내게 연애는, 사귀는 것은 언제나 끝을 생각하게 했기 때문에, 사귄다는 것은 언제든 헤어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했고, 그래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는 그 헤어짐이 오지 않을 친구 상대이고 싶었던 거다. 오, 나여... 나는 도대체 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이 오기도 전부터 헤어짐을 생각하고 고통스러워 하는가....
그래서 내가 기어코 기어코 사귀지 않으려고 했던 내 인생의 사랑을 나는 그렇게나 친구로 두려고 했었다. 그러니까 연락도 이메일로만 하고 싶었다니까? 아니면 문자메세지나? 그런데 왜 매일 전화를 해가지고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 내가 분명히 내 생각도 전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하고 헤어지는 거 싫어서 나는 사귀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니가 먼저 옆구리 콕콕 찔렀잖아, 그래도 한 번 가보자고, 왜 끝을 생각하냐고, 그렇게 옆구리 콕콕 찔러가지고 내가 안그럴라고 안그럴라고 했는데 사귀었고, 그러다보니까 헤어져서 이제 영영 안보는 사이가 되었잖아, 이 쌍놈아... 내가 그래서 헤어지고 나서 혼자 일자산을 오르면서 엉엉 통공을 했더랬다. 거봐, 내가 안사귄다 그랬잖아, 왜 사귀자 그래가지고 아예 존재 자체를 내 옆에 없게 만들어, 그냥 가끔 연락하는 친구 사이었으면 우리가 계속 연락하는 친구 사이로 지낼 수 있었잖아, 왜 그렇게 그 누구보다 가깝게 옆에 와가지고 아예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느냐고, 왜, 왜, 왜, 왜.......
그래서 리치 경이 부러웠다. 그러고도 살 수 있냐고 묻고 싶지만, 그렇게 살 수 있다니 부러웠다. 어쩌면 리치 경과 슈테른하임 사이에 섹스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성인 남녀라면 누구나 알고 있잖아요. 몸을 섞은 사이는 몸정..도 있고 몸이 몸을 기억해서.... 뭐 그래서 이성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면 좋은 친구 관계 될 수 있지마는..그것은 케바케고 사람나름이라 나는 ... 아니 그래도 지금은 또 나이도 들고 체력도 떨어지고 뭐 여차저차 이러저러해서 친구 할 수 있으니까... 우리의 섹스 잊으면 되니까, 그러면 되니까, 나도 리치경처럼 좋은 영혼의 단짝 되어서 그렇게 매일 안부를 주고 받고 생각도 주고받고, 무엇보다 뒷담화 함께 까고... 뒷담화, 정말, 어떤 뒷담화는 너여야만 되는게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이해 못해줘도 너만 이해해주는 그런 게 있단 말이다... 나 잘난척도 하고 싶고 뒷답화도 하고 싶고 그런 영혼의 파트너... 있어서 좋겠어요, 리치 경... 나는 미덕이 부족해서, 지성과 지혜와 검소함이 부족한 욜로족이라서 영혼의 파트너가 없는건가요... 내가 안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하아 그러면 지금쯤 그 누구보다 영혼의 파트너 되어서 베프 되어서 사이좋게 살 수있었을텐데..
그러나 시간을 돌려서 나에게 다시 선택하라고 하면 그 때도 나는 아마 그 순간 눈을 질끈 감고 친구를 택하는 대신 아마도 그 불길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겠지. 팔베개를 선택했겠지. 누드 팔베개... 인생....... 친구란 무엇이고 연인이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이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다음주 점심 도시락 반찬을 만들기 위해 진미채를 사왔고, 여동생으로부터 레서피를 받아 진미채볶음을 만들기로 했다. 우선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써는 걸로 시작해야 한다.
그릇에 진미채를 쏟고 가위를 들어 조솨버릴라고 하는데 엄마가 빽 소리를 지르시며 지금 뭐하냐고, 하나씩 들어서 얌전히 잘라야 한다는거다. 그냥 조솨버리면 안돼? 했더니 그러면 안된다고, 다 고르게 자르지도 못할뿐더러 또 섞인다고, 제발 차분히 앉아서 하나씩 자르라고 한다. 나는 그래서 앉아서 차분히 하나씩 들고 가위로 자르기 시작하는데... 아아 차라리 책을 읽는 게 낫지, 이런 단순노동은 나에게 명상의 시간을 가져다줄줄 알았건만, 과거의 시간을 붙들어와 하나하나 후회를 하게 만든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 말은 왜 했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한숨을 거듭 거듭 쉬었고, 엄마는 옆에서 너 도대체 왜 한숨 계속 쉬냐고 했고, 나는 엄마, 이렇게 가위질을 하노라니, 내 인생의 오점들이 떠올라...했다. 아, 인생의 오점이여. 거기에서 사라지렴. 왜 거기 있는거니. 이렇게 진미채 자를 때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면 내가 곶통...
그리고 만들었다. 진미채를!
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어서 좀 짜게 됐지만 그런대로 맛있는 진미채가 완성되었다. 다음주의 점심 도시락은 월요일도 진미채 화요일도 진미채 수요일도 진미채 목요일도 진미채 금요일도 진미채가 될것이다.
이제 포장주문한 족발을 찾으러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