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이유로 나는 이 책을 매해 읽는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지점에서 내가 웃고 또 새로운 지점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너무 여러번 읽어서 더이상 새로운 지점이 없지 않을까, 했는데도 또 새로운 지점들을 나는 찾아내고야 말았다. 이 책 속의 주인공 '에미'는 내가 아는 가장 '마음이 열린'사람인데, 그래서 나는 그녀가 나와 비슷하다고 처음부터 생각했다. '그녀는 열린 상태였다'라고 늘 생각해왔는데, 나는 마음을 닫고 싶었다. 나야말로 에미처럼 늘 열려있는 사람이었는데 닫아야겠다 결심하니,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환기도 시킬 겸, 최대한 활짝 열어놓아야겠다고 생각한거다. 마음을 열어둔 상태라는 게 무엇인가, 를 생각하면 어김없이 에미가 떠오르고 나는 그렇게 책장을 넘긴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책은 에미가 잘못 보낸 이메일을 통해 '레오'라는 남자와 소통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에미는 정기구독을 취소한다는 메일을 잡지사에 보내는데, 태어날때부터 왼손잡이인 그녀가 중간에 오른손잡이로 교정을 당해야 했고, 그래서 피치 못하게 왼손과 오른손이 싸우면서 키보드의 e 와 i 를 경쟁하듯 눌러대, 그녀의 메일은 엉뚱한 언어학자 레오에게 닿는다. 당연히 잡지의 정기구독은 취소되지 않았고, 그래서 에미는 재차 취소 메일을 보내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이번에도 역시나 경쟁하듯 e 와 i를 눌러 또! 레오에게 닿는다. 이에 레오는 너 아마도 스펠링 잘못 써서 실수하는 것 같아, 나는 잡지사가 아니라 사람이다, 하고 답을 보낸다. 에미는 그런 레오에게 알려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바로 여기서 이 메일의 왕복은 끝났어야 한다.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런 수순이다. 이런 일 자체가 흔한 건 아니지만, 만약 이런 일이 나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생겼다면, 이렇게 잘못을 인지하고 나서, 그래서 상대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나면, 그러면 더이상은 진행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이메일을 보낸 이력이 남아, 9개월후 에미는 또다시, 의도치 않게, 이런 메일을 레오에게 보내게 된다.
9달 뒤
제목 없음
즐거운 성탄절과 복된 새해 맞으시기를 에미 로트너가 빌어 드립니다. -p.11
에미는 홈페이지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었고, 고객들에게 이렇게 단체메일을 보낸 거다. 레오는(하하) 이 메일을 받고 그냥 넘길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대부분이 그냥 넘겼을 테지만, 이런 답을 보낸다.
2분 뒤
Aw:
에미 로트너씨, 우리는 아는 사이라고도 할 수 없는데, 이렇게 지극히 독창적인 단체메일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드리자면, 저는 제가 속하지 않은 집단 구성원에게 보내는 단체메일을 좋아하거든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레오 라이케. -p.11
하하하하, 나는 만약 레오로부터 저런 이메일을 받았다면 웃었을 것이고-이렇게 지극히 독창적인 단체메일!-, 그리고 역시 답장을 보냈을 것이다. 에미 역시 레오에게 답장을 보내고 그리고 그렇게 그들은 두어통쯤 왕복한 뒤에 또 끊어질 뻔했다. 끊어지는 게 역시나 더 자연스러웠겠지만, 우리의 에미는 38일 뒤에, 또다시 이메일을 잘못 보낸다.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는 에미를 좀 답답하게 생각한다. 이 부분만큼은 너무나 내 취향 아니다. 내가 이런 실수를 했다는 걸 안다면 나는 그 뒤에 '나는 여기서 실수했었지'라고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부러, 내 의지를 담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실수를 할 순 있지만, 스펠링 잘못 써서 이메일 자체를 잘못 보내는 일을 이렇게 여러차례 반복하는 건 정말이지 내 취향이 아니다. 나는 했던 잘못 또 하는 거 싫어하고 했던 실수 또 하는 거 싫어하고, 그래서 상대로 하여금 잔소리 하게 만드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기 때문에, 내가 상대에게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인거다. 나는 했던 말 또 하게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그런 일이 몇차례 반복되면 애정 자체가 식어버려서, 아무리 연애상대라고 해도 정나미가 떨어져버려. 반면 한 번 말했을 때 캐치하고 다시 그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설사 잘못을 했을지언정 고치려고 노력하는 점을 높이 사서 매우 애정이 증가하게 된다. 이런 부분은 상대와 내가 주거니받거니가 잘 되어야 되는데, 그런 점에서 과거 나의 어떤 연인은 매우 훌륭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가 어떤 잘못 혹은 실수를 했을 때 그 지점에 대해 그애게 얘기했고, 그는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너는 한 번 지적했으면 다시 말하지 않네' 라고 시간이 흐른 뒤에 얘기했었고 나는 그런 그에게 '한 번 말하면 니가 다 알아들으니까'라고 했었다. 그런데 또 이메일을 잘못 보내는 에미라니...
어쩌면 에미도 이런 실수를 평소에 하지 않는 사람일런지도 모른다. 하늘이 혹은 신이 혹은 운명의 흐름이 그녀로 하여금 평소 하지 않던 실수를 또 하게 만들었던건지도 모르겠다. 에미의 인생 지금 이 시점에, 에미의 운명 지금 이 흐름에 맞춰 레오를 만나게 하기 위해. 네 인생 지금 이쯤에서 레오를 만나렴, 하고.
그리고 본격적으로 에미와 레오는 이메일을 주고 받기 시작한다. 그들의 메일은 서로의 나이나 직업을 추측하면서 진행되기도 하고 우습지도 않은 우스개 소리들을 늘어놓기도 하고 또 좀 관심이 생기려고 한다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오래전에 이 책을 읽고 매우 좋아하는 나의 다정한 친구는,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이 독일 소설이, 한국 번역가 '김라합'에게 단단히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했다. 제목부터 다정하게 바꿔놓아 그렇기도 하지만(원제는 '북풍'이다), 이런 문장들은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잖아.
당신은 '진부한 크리스마스 단체메일' 신경증을 앓고 계시는군요. 어쩌다가 그런 신경증이 생긴 걸까요? '즐거운 성탄절과 복된 새해'라는 말을 들으면 죽도록 마음이 상하나요? -p.27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죽도록 마음이 상하나요, 같은 표현은 너무 좋지 않은가. 나도 언젠가 꼭 써먹을테다. 언젠가 메일이나 문자로 혹은 내 목소리를 통해 상대에게 '죽도록 마음이 상해?'하고 놀려야지. 잊지 말아야 할 표현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서로의 나이도 잘 모르고, 싱글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거의 아는 게 없는 상태에서 주고받는 메일은 서로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킨다. 그리고 레오는 자신이 그렇다고 솔직히 인정한다.
에미, 변명부터 할게요. 사실 당신에게 날마다 메일을 썼어요. 보내지 않았을 뿐이지요. 아니, 보내지만 않은 게 아니라 다 지워버렸어요. 말하자면 제가 우리 대화에서 힘든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제가 당신, 신발 치수 37인 에미라는 여자에게 서서히, 그저 얘기 상대라는 틀에 맞는 선을 넘어 더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겁니다. -p.29
아마 대부분이 그런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관심있는 상대(뭐 이런걸 썸남이나 썸녀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겠다)와 주고받은 이메일이나 문자메세지를 허구한날 들여다보는 일. 시간만 나면 들여다보고 사실 누가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인데 피식피식 웃게 되는 일. 아마도 연애과정을 통틀어 가장 반짝거리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나의 경우는 그런 순간들이 너무 좋아서 그런 이메일이나 문자를 내버려둔다. 나는 아직도 2007년의 이메일까지 가지고 있다. 문자메세지 역시 마찬가지인데, 아이폰이 망가지면 다시 아이폰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는 건, 내가 유료서비스로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사람이고 간직하고 또 간직하는 사람이며 되새기고 또 되새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나와 같은 마음으로 오히려 지워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레오가 위에서 말한것처럼 차라리 다 지워버리는 사람이 있는 거다. 자꾸 들여다보게 되니까. 다른 일 해야하는데 자꾸 들여다보게 되니까 차라리 지워버리는 거다. 볼 걸 없애버리는 거야. 이것도 너무 귀엽지 않나. 하하하하하. 지워야만 보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쪼꼬미 의지랄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에게도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자꾸 들여다보게 돼서 부러 다 지워버린다고 했던 남자가 있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귀여워. 밥은 먹고 다니니? 오늘 누나는 동태탕에 곤이를 추가해서 먹었어. 아주 맛이 좋았단다. 밑반찬들도 오늘은 다 너무 좋았어. 오이고추도 쌈장에 찍어 맛있게 먹었는데, 아이고 두번째 고추는 맵지 뭐니?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언젠가 모든게 괜찮아지면 동태탕에 곤이 추가해 사줄게. 아마도 그간의 인생이 어땠는지를 얘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주도 좀 시켜야 할 것 같구나. 회사 앞으로 와....동태탕 맛집 있어. 알도 좋아해? 나는 알은 좀 싫어. 그 많은 생선의 후손들이 뱃속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잔인해도 너무 잔인해지는 것 같아서 말이야.....
왜 동태탕을 얘기하고 있지?
다시, 에미로 돌아가면.
나는 에미가 더 큰 행복을 바랐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에미는 현재 행복했다. 남편과 아이들과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일도 있었고 정해진 일상이란 것도 있었으며 남편과 역할분담까지 익숙하게 되어 있었다. 누가 묻는다면 에미도 거리낌없이 나쁘지 않은 인생이라고 할것이고 누가 보기에도 에미는 나쁘지 않은 삶을 산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과 타인이 보는 것 다 무슨 소용일까. 우리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점에 '그러나 더 행복해지고 싶다'고 요구하기도 하지 않는가. 나는 에미가 잠정적으로 더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신을 활짝 열어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신을 열어두면서 즐겁거나 기쁜 일이 다가오려고 할 때, 거기에 대한 방어책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에미가 이메일을 실수로 보낸 것은, 말그대로 의도치 않았던 실수였지만, 하필 그 메일이 레오에게 날아들었고, 그리고 레오가 답장을 보냈고, 그리고 그 뒤의 일들이 일어난 것, 에미가 레오의 이메일을 결국 죄다 출력해 가지고 있게 된 것, 그 모든 것은 그 순간순간 에미가 원하던 바였고 에미의 의지였다. 에미는 레오를 알고 나서, 레오와 이메일을 주고받고 나서부터는 레오와 이메일을 주고 받는 시간을 행복해했다. 남편 베른하르트가, 차라리 쟤네 둘이 만나는게 이걸 끝내는 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에미와 레오는 이메일에 집중했다. 이메일을 보내고 답메일이 오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중심이었다. 에미는 결코 불행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더 큰 행복을 원하는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고, 그리고 무언가 자신에게 찾아들려고 할 때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낚아채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요구하고 원하고 바라는 게 무언지 아는 사람은, 그래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게 무엇인지도 아는 법이다. 베른하르트도 레오도 다 에미에 대해 판단 실수를 할 때, 에미만큼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에미는 레오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자신이 지금 하는 게 뭔지 분명히 알고 있다. 에미는 열려있고, 열려 있었다.
자, 뭐든 와봐, 뭐가 됐든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거라면, 나를 더 즐겁게 만들거라면, 기꺼이 받아주마.
라는 마인드가 장착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에미가 좋다. 에미는 레오를 좋아하면서 한 순간도 비굴해지지 않는데, 그건 에미가 에미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미는 어느날의 레오의 이메일을 받고서는 이 이야기 좋네요, 라고 말한다. 레오의 지난 시간에 관한 메일. 여자친구를 만나고 헤어지게 된 메일. 이 이야기 좋네요, 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려주는 얘기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아마도 더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다시 읽어도 너무 재미있고 즐겁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는 만세만세 만만세다.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을 준비를 한다. 일단 활짝 열고서.
열어야, 닫을 수 있으니까.
밤새 방안엔 눈이 많이 쌓였어
난 자장가에 잠을 깨어 눈을 떴지만 넌 이미 없었어
밤새 마당엔 새가 많이 죽었어
난 종이돈 몇장을 쥐고 전화를 걸어 천국을 주문했어
노래는 반쯤 쓰다 참지 못하고 태워버렸어
나는 재를 주워 담아 술과 얼음과 마셔버렸어
오 - 미안 오 - 이제 작별 인사를 해야지
내 마음을 닫을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