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누구나 악플을 들어요, 엄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요. 그냥 무시해 버려. 그럼 가 버릴 거야.˝
이 말은 아주 많은 관점에서 날 미치게 한다. 마치 인터넷이 가공의 인물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라는 듯이. 마치 우리가 애초부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듯이.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반사적으로 안전을 추정하는 말은 저렇게 어린 수컷이나 하는 말이다. 여자들은, 래니 나이 정도 되는 소녀조차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세상이 정말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맹목적이며 특권적인 무지를 드러냈다.
- P53





지나는 자신의 어린 딸과 아들을 사랑하지만, 자신이 안전에 대해 가진 두려움 그리고 피해의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이 '어린 수컷'이기 때문임을 안다. '맹목적이며 특권적인 무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남자사람들도 당연히 어떤 두려움들을 갖겠지만 여자들은 거기에 남성이란 성별이 내게 가할 위험에 대한 두려움까지 추가해야 한다. 낯선 남자 혹은 익숙한 남자, 늦은 밤, 술자리.. 모르겠다, 남자들도 나름대로 꽃뱀을 만날까봐 두려워서 여성에 대한 특별한 두려움이 있을지. 아니면 스타벅스 가는 여자에 대한 두려움? 명품백을 사는 여자가 내 돈을 다 쓸까봐 갖는 두려움? 자기관리 하지 않는 뚱뚱한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책속에서 지나는 자신에 대한 스토킹을 의심한다. 그녀의 많은 걱정, 초조함, 불안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의식으로 보일 수 있다. 또한 지나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일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스토커는 진짜로 있었다. 그녀가 짐작한 스토커는 가짜가 아니었다. 그녀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녀가 가진 두려움은 실재 일어날지도 모를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범죄는 그녀의 남편이 저질렀는데, 도망은 그녀가 치고 있다. 그녀는 범죄를 저지른 남편으로부터도 살해 협박을 받고, 남편의 추종자들로부터 살해협박을 받고, 그리고 그녀의 무죄를 믿지 않은 세상의 모든 남자들로부터도 살해 협박을 받는다. 그녀는 남편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몰랐는데. 그러나 그녀는 계속된 죄책감을 갖고 있다. 남편이 살인을 저지르는 걸 모르는채로 그의 아내로 살아서. 살인을 도운 것도 아닌데, 살인한다는 사실을 자기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한다. 그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도 저것도 다 이상했는데. 그러나 그녀가, 한 남자의 아내로 살고 또 아이들의 엄마로 살면서 그 남자의 살인을 눈치채지 못한게, 그래서 피해자들을 만든게, 그녀가 이렇게 도망다니고 숨고 두려워하고 강박증에 걸릴만큼 잘못인가. 애초에 그녀의 잘못이 있기나 했나? 그녀 역시 피해자였다. 남편은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정상가족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에게 평범한 가장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는 이 점을 이용했다. 그녀는 이용당했다. 살인자에게 이용당했다. 그녀 역시 피해자였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자기 가족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는프로포즈 받았던 순간부터 함께 살며 겪었던 순간순간들이 '그게 그게 아니었구나', '그건 잘못이었어'를 깨닫는다. 그녀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이용당했다. 그녀는 철저한 피해자였다. 그러나 이제 신분증을 위조하고 이름을 바꾸고 보안에 철저한 신경을 써야 한다. 아이들까지 지켜야 한다. 범죄는 남편이 저질렀는데 고통받고 우울하고 도망치고 초조한건 아내의 몫이다. 



왜 잘못은 남자가 했는데 도망은 여자가 쳐야할까?



범죄에 있어서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쉬쉬하고 욕먹는 일이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터다. 룸싸롱에 다녀온 코로나 확진자보다 스타벅스 다녀온 코로나 확진자가 더 욕을 먹는다. 성폭행 가해자보다, 그 성폭행 가해자에게 '꼬리친' 혹은 '같이 술마셔준' 여자가 욕을 먹는다. 세상은 어떻게든 여자를 욕하기 쉽고, 그렇게 욕먹은 여자는 꼬리표를 오래 혹은 평생 달고 다닌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 세상 쌍년이 된다.

범죄에 있어서만 그런것도 아니다. 우리는 무수히 들어오지 않았나. 학교에서, 동아리에서, 회사에서 사귀다가 헤어졌을 경우(혹은 결혼했을 경우)관두는 건 거의 대부분이 여자였다. 연애를 하다가 헤어지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피하는 건 여자가 해야 했다. 같이 있던 자리에서 누군가 나가야 한다면, 그건 대부분 여자의 몫이었다.





나는 몇 번의 연애를 했다. 모두 이성이었다. 일하다가 만나면서 사귀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온라인 활동을 하면서 만나게된 경우도 있었다. 자주 보고 만나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을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능하지만 랜선으로 만난 인연으로도 가능했다. 당연히 아주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후회되는 만남들도 역시 가지고 있다.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 왜 내가 그런 사람과 사귀었을까, 하는 후회도 하지만 이럴 줄 몰랐는데 했던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요며칠간은 온라인에서 만난게 잘못일까, 를 오래 생각했다. 온라인이 문제인걸까. 내가 온라인으로 남자를 만나서 이렇게나 오래 힘들어야 하는걸까, 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온라인의 문제인가?


아니었다. 호감을 가지는 것은 어떤 식으로 만나든 어떻게든 시작될 것이었다. 어떤 수단이 당신과 나 사이에 있을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서는 거다. 내 친구는 학교 동창과 사귀었고 또 어떤 친구는 데이트앱으로 사귀었다. 어떤 친구는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강력계 형사(!)를 만나 결혼했고 또 어떤 친구는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알게된 남자와 결혼했다. 어떤 수단이 되었든 사귀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그게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온라인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만해도 온라인을 통해서 사귀게 된 남자를 아주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그는 벼락같이 내게 내려진 기쁨이라고도 생각했으니까.




오래전에 헤어진 남자친구가 헤어졌음에도 나를 끊어내질 못한다. 문자를 보내길래 핸드폰에서 번호를 차단했다. 왓츠앱을 보내길래 왓츠앱에서 차단했다. 트윗에서 멘션을 보내길래 차단했다. 인스타를 팔로잉하길래 차단했다. 네이버 블로그에도 댓글을 달길래 내가 히스테릭한 증상을 보였더랬다. 아주 사적인 글들은 그래서 그곳에 감춰가며 쓰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차단할 수 있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차단한 셈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알라딘에서 그를 차단하지 못했다. 알라딘에는 차단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끔 내게 알라딘에 댓글을 단다. 내가 다른곳에서 차단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댓글을 단다. 그래서 생각한거다. 온라인이 문제인걸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온라인의 문제는 아니다. 온라인으로 사귄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다만, 온라인으로 만나 사귀게 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가 용이하다.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되고 그저 컴퓨터나 핸드폰 앞에 앉아서 주소만 치면 되니까. 온라인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니까. 어쩌면 즐겨찾기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글을 읽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가 얼마나 내 글을 자주 읽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때에는 다정한 댓글을 달지만 어떤 때에는 비꼬는 댓글을 단다. 이번에는 화가난 것 같았다. 여러곳에서 차단을 당했음에도 글을 읽는 걸 절제하지 못하고 글을 읽으면 반응하지 않는 것을 이루어내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나는 그로부터 댓글을 받으면 손이 덜덜 떨린다. 너무 두렵다. 그와 내가 사귀었던 사이이기 때문에 두렵다. 나의 어떤 사적인 면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렵다. 내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이 내 글이 그를 흥분시키기 때문에 두렵다. 너무 두려워서 정말로, '이럴거면 그냥 다시 그를 만나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그와 다시 만나야 하는건 아닐까''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게 아닐까' 를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면 싫다는 내게 자꾸 말을 거는 게 아니니까. 너무 싫어서 그런 생각까지 했다. 어쩌면 그게 나은걸까, 를 묻는 내 말에 친구들이 나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말했다. 그와 헤어진후 빈번하게 고민했다. 알라딘을 탈퇴해야 할까? 알라딘에서만 탈퇴하면 나에게 말을 걸 수 없을 터였다. 물론 다른 SNS 를 하는 이상, 그는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차단했다고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차단했지만, 그는 아마 다른 계정으로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알라딘을 탈퇴해야 할까? 알라딘에서 친구에게 공개로만 글을 써야 할까? 내가 그래야 할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이곳에 계속 글을 쓰고 싶다. 알라딘에 차단 기능이 없지만, 나는 알라딘에 차단 기능이 나 때문에 생기기를 원하지 않을 뿐더러, 궁극적으로는 '차단으로' 이 모든일을 해결하고 싶지가 않다. 이것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의지가 필요하다. 내가 알라딘을 탈퇴한다면, 그것이 헤어진 남자친구가 두려워서가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헤어진 남자친구가 두려워서 내가 오래 글을 써온 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내가 이곳을 떠난다면 다른 이유여야 했고, 모두에게 건강하게 작별인사를 말한 뒤여야 했다. 나는 헤어진 남자가 댓글 다는 게 너무 끔찍해서 이곳을 떠나는 걸 하고 싶지 않다.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어느 한 곳 만큼은 모두에게, 대상을 가리지 않고 보이는 글을 쓰고 싶다. 그것이 처음에 알라딘이었던 것처럼, 나중까지도 알라딘이기를 원한다.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면 그가 내 글을 읽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데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는가. 나는 그러고싶지 않다. 내가 책을 읽고 내가 글을 쓰는데, 그럴 때마다 '혹시 그를 자극해서 댓글다는 건 아닐까?' 같은걸 걱정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항상 머릿속에 내가 말할 상대가 있고 그 상대에게 말하면서 글을 쓰는데, 거기에 그런 걱정 따위를 끼워넣고 싶지 않다. 그의 댓글이 달렸을 때 손을 덜덜 떨면서 심호흡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언젠가 내게 '너는 나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두렵다. 대체로 남자들이 '~하겠다' 하는 말들은, 대부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나는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지 않다. 나는 숨고 싶지 않다. 나는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내 공간에서 그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가 내 공간에 오는 일은, 온라인이기 때문에 너무 쉽다.


왜 온라인으로 만난 남자를 사귀었을까. 주말 내내 나 자신을 자책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자책하고 있어서 속상했다. 왜 나는 그것이 마치 내 잘못인양 생각하는가. 그와 사귄 일, 그와 헤어진 일, 그리고 계속 이곳에 글을 쓰는 일이 나의 잘못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자꾸 내가 잘못한 걸 떠올린다. 일전에도 친구를 만나 '어디서부터 잘못한걸까', '뭘 잘못한걸까'를 얘기했더니, '니가 니 탓을 하는 게 잘못이야' 라고 했다.



이렇게 버티는 게 무슨 소용이야, 그냥 친구공개로 쓰거나 다른 계정을 만들거나 플랫폼을 옮기는 게 최선일거야, 를 빈번하게 고민했지만, 더 오래 생각했다. 아니, 그러지 않을 거라고.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 떠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헤어진 남자 무서워서 이곳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온라인으로 관계를 시작하는 일은, 이제 내 인생에 없도록 하자고. 여전히, 아직까지도, 조금은, 나는 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한다. 온라인으로 만나지 말걸 그랬나, 글을 너무 쎄게 썼나. 자꾸 내게 묻는다. 그게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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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0-04-13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이 글 쓰기까지 얼마나 용기를 끌어모으셨을지 감도 안잡히네요. ㅠㅠ 응원합니다!!

다락방 2020-04-13 10:43   좋아요 0 | URL
네. 등록하기까지도 많이 망설였고 쓰고 나서 지금까지도 계속 생각해요. 혹시 이 글이 나에게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요.

진심으로 잊히고 싶어요.

moonnight 2020-04-13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ㅠㅠ; 제발 좀 내버려두라는데 그게 왜 안 되는지ㅠㅠ;;;;; 다락방님 용기 존경합니다ㅜㅜ

다락방 2020-04-13 17:3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를 좀 무시했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단발머리 2020-04-1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다락방님이 내 잘못일까... 생각하는 그 순간이 너무 속상해요.
속상합니다, 너무너무 ㅠㅠ
글을 쓰고 용기내는 다락방님, 존경합니다!!!

다락방 2020-04-13 17:36   좋아요 0 | URL
저는 몇해전부터 도덕 코르셋을 그렇게나 없애자고 제 입으로 얘기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자꾸 내 잘못인가, 내가 어디에서 잘못한건가를 돌이켜보게 돼요. 살아온 습관이 이렇게나 무서운 것 같아요.

피곤합니다.

2020-04-13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13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psyche 2020-04-18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락방님이 얼마나 힘들게 이 글을 쓰셨을까. 너무 마음아프고 속상해요.ㅜㅜ

다락방 2020-04-19 19:46   좋아요 0 | URL
이제 이렇게 여기에 글 쓰는 것 말고 더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