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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ㅣ 정희진의 글쓰기 1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평점 :
정희진의 글은 여전히 좋고 또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도 하지만, 이 책으로 가장 먼저 정희진의 글을 접한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정희진에 열광할 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간 정희진이라면 닥치고 읽어! 라고 마음먹었던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는 '여전히 좋지만 그렇게까지는 좋지 않네' 하였으니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정희진을 좋아할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정희진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 열광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저마다 약한 지점이 있다. 같은 사건, 같은 이야기에 그래서 더 건드려지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고. 열 개의 사건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다가도 열한개째에서 삐끗할 수 있는데, 정희진에 대해서라면 나는 한 칠십칠개쯤 열광하며 공유하다가 칠십팔개째에서 삐끗하는 것 같더니 그 다음에는 어긋나는 지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 같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전작 『혼자서 본 영화』에서도 영화 《무뢰한》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이 책에서도 무뢰한 너무 좋다고 또 언급하길래 그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말야? 나는 20분도 못보고 '이걸 다 볼 수 있을까..' 했다. 다 보고 나면 나도 좋아지려는지 모르겠어. 시작부터 걍 싫은 영화였다... 뭐, 더 봐야 알겠지만.
예전에 강연에서 정희진 쌤은 '나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은 책으로부터 얻는다'고 하셨던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니 '이 분은 그게 충분히 가능하시다!' 생각했던게, 읽는 책의 리스트도 남다를뿐더러, 좋은 책은 여러차례 반복해 읽는 거다. 이런식이라면 세상의 알아야할 모든 것들을 책으로부터 습득하는 게 가능하지 싶다.
알라딘에서야 보잘 것 없는 독서가라고 해도, 알라딘을 벗어나면 그래도 나름 책 좀 읽는다고 하는 사람이 난데, 그런 내가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책들도 정희진 쌤은 엄청 읽었더라. 목민심서, 도덕경, 신약성서... 정말이지, 나 따위..하찮은 독서가에 불과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이 다진다. 나도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책으로부터 얻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자. 빠샤!
최근에 한나 아렌트와 시몬 베유 읽으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이 잡히기도 했다. 한나 아렌트는...너무 인상적이었어 진짜. 한나 아렌트 전기 읽은 후부터 내 머릿속에서 한나 아렌트가 잠시도 떠나지를 않는다. 대단한 사람..
갑분한나아렌트..
마음, 표현도 번역도 어려운 우리말이다. 마음은 몸의 부위인데(뇌, 심장, 흉부……), 보이지 않는 의미(영혼, 마음 씀, 정신……)에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의 이분 논리가 문제의 근원. 마음 심(心) 자는 사람의 염통 모양을 본뜬 것이지만 실제 마음을 관장하는 기관은 뇌이고, 의미는 가슴(heart, 심장)으로 통용된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는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 P29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지젝이 만난 레닌-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읽어주고 싶다. 영어 원제(Revolution At The Gates)가 기가 막히다. 레닌 입문서로도 안성맞춤이다. 책 표지 문구는 왜 혁명이 인간의 영원한 신앙인지를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회귀가 아니라 그 안에 구현할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다는 것을, 그가 하지 못한 일을, 그가 놓친 기회를 반복한다는 뜻이다." 6백 쪽에 가까운데 문장마다 가슴이 뛴다. - P50
어떤 올바름은, 필연적으로 다른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보편적이고 일률적인 올바름은 없다. ‘PC‘는 불가능한 개념이자 문제를 한 가지 원인으로 축소하는 환원주의의 산물이다. 책에 따르면, 환원론은 실천 없는 이들의 무의식적 위치 이동이다. 어차피 안 될 일, ‘올바르게 보이는‘ 주장이나 해보자는 것이다. - P51
녹색당의 당비 납부율은 전체 정당 중 최고이며 여성 당원의 비중이 가장 높다. 나는 당비만 내는 당원이지만, 녹색당은 집에서도 24시간 정치를 할 수 있는 민생 정당이다. 나는 냉장고, 화장품, 핸드폰, 드라이기, 다리미, 자동차, 샴푸, 냉난방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의류, 신발도 구입하지 않는다.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최대한 축소된 삶을 살고 싶다.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 이런 생활 습관이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아니 아예 믿지 않는 독재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서다. - P57
몇 달 전 거리에서 "자연의 섭리"를 외치며 "짐승도 그 짓은 안 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동성애 반대 서명운동을 하는 이들을 만났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연의 질서를 지키려면 환경운동이 먼저 아닐까요." 실제로 ‘짐승도 안 하는 짓‘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성애자 남성이다. - P69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옵니다."(<루가복음> 23장 34절) 이 구절은 상대방과 말이 안 통할 때 위로가 된다. 나는 주로 남들이 ‘사소하다‘고 하는 일에 분노하는 편이라 이 말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억울하고 분할 때 "쟤는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참았다. 대화한들, ‘가르친들‘, 설득한들 알까? 소통 불가능 상황에서 최선의 지혜는 기대를 접는 것이다. - P79
《몸의 일기》는 구구절절하다.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 한 줄의 인생. 개미가 성(城)을 공략한다. 가장 급진적인 개미는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다. ‘이등 시민‘이 몸의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 문명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사회가 이들이 말하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다. 저자는 여성의 일기가 몹시 궁금하다고 했지만, 여성의 일기는 "엄마 배 속에서 죽었어요."(여아 낙태)로 시작될 것이다. - P136
흔한 대화. "환자분, 통증이 1부터 10까지로 쳤을 때 어느 정도 아프세요?" 고통을 수량화한 척도(尺度) 질문인데, 고통이 계량화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은 필요하지만 환자를 위한 말이 아니라 치료자를 위한 것이다. - P161
연령주의적 표현이지만 두 사람 모두 인생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젠더는 명확했다. 1948년생 여성이 1925년생 남성보다 나이듦, 죽음, 치매, 돌봄에 대한 염려와 사유가 훨씬 깊다. ‘여자의 정년‘은 생물학적 나이인 마흔, 남자의 정년은 사회적 일을 그만두는 시기다. - P174
《이야기 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여성주의 철학자인 저자 자신이 겪은, 살인 미수를 동반한 성폭력을 계기로 삼아 자아 개념을 재해석한 빼어난 책이다. 번역은 유려하지만 우리말 제목에는 약간 아쉬움이 있다. 원제는 《여진(餘震)-폭력과 자아의 재구성(Aftermath:Violence and the Remaking of a Self)》. 모든 문장이 깊고 지성이 넘친다. 그래서 치유적이다. 대개 치유를 마음의 평화나 감정적 위안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치유는 사고 방식의 근본적 변화, 인간 행동 중 가장 인지적인 과정이다. 종교든 인문학이든 일시적 ‘부흥회‘로는 치유가 불가능한 이유다. - P180
어떤 이에겐 평화로운 것이 어떤 이에겐 부정의일 수 있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건의 효과는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무엇을 걱정하는가?"보다 "이 걱정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 효과적이다.(257쪽, 만들어진 우울증) 한국 사회가 싫어하는 인간형은 진보다 여성주의 이런 쪽(?)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문제 제기, 정확한 질문이 많은 사람도 공격적이라고 기피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모나거나 어두운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는 것 같다. 사유는 인간 본성(호모 사피엔스!). - P215
‘평화주의자‘들은 이에 반대한다. 대화와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노를 관리하라고 권한다. 타임 아웃, 나 전달법, 분노 조절 프로그램 따위가 그것이다. ‘평화주의자‘인 내 생각은 다르다. 이 말은 분노와 무관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정의의 기본 법칙이다. 분노의 시작은 억울함이다. 물론,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문제는 "누구의 억울함인가, 정당한 억울함인가?" 이다. 분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부정의하다. 가해자의 피해의식이나 권력자의 분노는 규범이고, 약자의 억울한 감정만 분노로 간주된다. 분노를 표출해도 되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은 대개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다. ‘남성‘은 이런 의문 자체가 없다. 자기 뜻은 분노가 아니라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226
권력은 다수의 억울한 마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멘토, 치유자를 자청하는 자들을 불러(?) 고결한 가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비열한 폭력인 용서와 화해 이데올로기로 약자의 상처를 짓이기고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죄의식과 자책까지 떠넘긴다. 그래서 우아함은 가진 자의 성품이요, 흥분과 분노는 약자의 행패가 되었다. - P227
유교의 장례인 삼년상(三年喪)은 ‘好‘, 즉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 …… 일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느낌에 주목하는 것. …… 상실감의 고통, 황폐한 심정, 다시 만날 수 없는 공허감을 느껴보길 촉구하는 의례가 삼년상"(63쪽, 한 칸의 사이)이다. 어미와 자식이 껴안고 있다가 한 사람이 사라졌다. 부정하고 싶은 이 상황을 실감하는 과정이 삼년상이요, 시묘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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