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스프레소 캡슐커피의 캡슐은 재활용이 가능하다. 커피를 마신 뒤에 빈 캡슐을 네스프레소 매장으로 가져가거나 택배로 커피를 주문하면서 캡슐 수거해달라고 요구를 하면 된다. 선선한 가을날, 나는 그간 마신 커피 캡슐을 들고 네스프레소 매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천호동으로 향하면서 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교보문고에 가고 싶은데, 그러면 천호동에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잠실에 갔다가 잠실에서는 버스를 타고 집에 와야 하나, 그 사이 어디쯤에 까페에 가 책을 읽고 싶은데... 내 가방 안에는 내 책장에 꽂힌지 오래된 '어슐러 르 귄'의 [세상의 생일]이 들어 있었다.
천호동 현대백화점에 도착해 네스프레소 매장에 가 캡슐을 반납했다. 그리고 커피 몇 개를 더 샀다. 자, 이제 잠실로 가야하나, 좀 귀찮네.. 하다가, 앗, 천호동에도 교보문고가 있었지!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만세!! 잠실까지 안가도 된다. 야호~ 아니, 이게 왜 지금 생각나? 아니, 이게 지금이라도 생각나니 얼마나 다행이야? 나는 그렇게 슬렁 슬렁 걸어가 교보문고 천호점에 도착했다. 마침 베스트셀러 코너에 [벌새] 가 꽂혀 있어, 그 책 안의 정희진과 최은영의 글을 읽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여행책을 좀 훑어보았다. 흐음, 이정도면 됐다. 이제 세상의 생일을 읽으러 까페에 가자, 나 스벅카드에 잔고도 남아있고 텀블러도 있으니, 자, 가까운 스벅으로 갈까?
그러다가 나는 보았네. 교보문고 바로 앞의 까페를. 어? 여기 사람도 없고 조용한데? 책 읽기 딱 좋겠다! 그렇게 들어가려는데 이 까페에서 브런치를 팔고 있다는 게 아닌가. 게다가 다 예뻐.. 예쁜 브런치..나도 한 번 언젠가 먹어보고 싶었는데, 좋았어, 나는 이곳에 가서 브런치를 먹겠다! 사실 브런치 먹기에는 시간이..오후 세 시지만.. 뭐 어때, 나는 먹겠네, 브런치를. 그렇게 가장 예뻐보이는 프렌치토스트를 주문했다.
프런체 토스트는 13,500 원이고 이렇게 메인 메뉴를 주문하면 아메리카노는 2,000원 이었다. 그러니 위 상차림의 가격은 15,500원. 예뻤고 맛있었지만 너무 비싸... 나는 이 예쁜걸 보았고 먹었으니 아아, 이제 더는 안먹어도 되겠구나 했다. 비싸... 비싸다.. 아니 좀 비싸잖아요... ㅜㅜ
그리고 나는 어슐러 르 귄의 책을 읽는다. 서문 부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다른 행성의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아아, 나는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이 책은 단편집이고 서문에는 각 단편에 대한 작가의 짧은 소개가 실려있다. 나는 이런 글을 읽게된다.
<세그리의 사정>은 세그리라는 세계의 사회에 관해 오랜 세월동안 온갖 관찰자들이 쓴 보고서들의 요약문이다. 이 문서들은, 보고서에 관해서라면 견과류를 본 다람쥐처럼 구는 헤인 역사가들의 문서보관소에서 나온 것이다.
이 이야기가 처음 내 맘에 싹튼 때는, 세계,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인 지구의 일부 지역들에서 성별이 여자인 태아와 아기를 끊임없이 낙태하고 살해함으로써 성비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였다. 이런 곳들에서는 오직 남자들만이 온갖 수고를 무릅쓸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불합리하고 만족을 모르는 호기심에서, 나중에 이 이야기를 낳은 사고 실험에서, 나는 그 성비 불균형을 역전시킨 뒤 더욱 키우고 영구화시켰다. 세그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리고 그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하며 무척 즐겁긴 했지만, 실험 자체는 즐겁지 않았다. -서문, p.11
보고서라는 글의 형식은 쓰기도 읽기도 싫지만, 그러나 어슐러 르 귄은 이 보고서의 형식을 빌어 쓴 단편에 '여아들만 낙태하고 살해하는 사회'를 역전한 글을 실었다는 게 아닌가. 나는 이 두꺼운 단편집에서 이 단편을 당연히 가장 먼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작가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불합리한 기사를 접하고 그것은 안되잖아, 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다니. 그리고 그 글이 지금 이곳의 나에게 읽힌다.
<세그리의 사정>은 세그리라는 행성, 세그리라는 사회의 이야기다. 작가가 예고한 대로 이곳에서는 여성의 성별이 훨씬, 훨씬 많다. 남자아이들은 잘 태어나지 않고 태어나서도 어른이 될 때까지 사는 일이 별로 없다. 일정 나이가 되면 성 안에 들어가 살게 되고, 성 안에서만 생활하게 된다. 남자들에게는 대학 교육이 허락되지 않고 여자들과의 결혼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중에 우수한 남자들만이 '씹집'이란 곳에서 여자들에게 씨내리만 해줄 수 있을 뿐이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결혼하고 어머니와 딸들과 함께 살 수 있으며 아이를 갖고 싶어지면 씹집에 가서 임신할 수가 있다.
남자아이가 열한 살이 되면 사람들은 남자아이를 여자들에게서 떼어내 성으로 데려가고, 어엿한 남자로 교육시킨다. 우리는 아이가 그렇게 여러 의식과 축하 속에서 성으로 데려가지는 것을 보았다. 남자아이는 유산될 확률이 크다고 하며, 그렇게 태어나 아낌없는 보살핌을 받고서도 많은 남자아이들이 유아기에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보다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을 인지하지 못하는 자들, 진정한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빛을 보지 못하는 완고한 불신앙자들이면 무릇 그러하듯, 이 종족이 '신'의 저주를 받았음을 본다.
여기 남자들은 예술에는 거의 무지해서 펄쩍거리는 춤을 추는 게 고작이며, 과학 지식은 야만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p.59-60)
비참한 삶처럼 들린다. 열한 살이 넘으면 해도 된다고 허락받는 일은 모두가 성 안의 게임과 스포츠에서 겨루는 일뿐이고, 열다섯 살 정도가 넘으면 돈과 씹하는 횟수 그리고 기타 등등을 놓고 씹집에서 경쟁하는 일이 전부다. 그 이상은 없다. 다른 선택권도 없다. 직업도 없다. 뭔가를 만드는 기술도 없다. 큰 게임에서 시합할 때가 아니면 여행도 없다. 그 어떤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 대학에 갈 수도 없다. 나는 지적인 남자가 대학에 와 공부하는 것조차 안 되는 이유가 뭐냐고 스코드르에게 물었고, 그녀는 그런 배움이 남자들에게 아주 해롭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배움은 남자의 명예에 대한 감각을 흐리고, 근육을 흐물거리게 하고, 성교 불능으로 만든다. 스코드르가 말했다. "'고환으로 갈 것이 뇌로 간다'라는 말이 있지요. 남자들은 자신을 위해 교육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해요." (p.71-72)
여자들은 걱정 말라고, 우린 남자들이 서로 죽이게 두지 않는다고, 우린 남자들을 보호한다고, 남자들은 우리의 보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무술 시합 입체영상에서 남자들이 서로를 무시무시하게 이리저리 집어던지다가 뇌진탕으로 실려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 "숙련되지 않은 선수들만이 다칩니다." 참으로 안심되는 말씀이다. (p.73)
이 단편에는 '씹집' 과 '씹'이란 단어가 빈번하게 나오는데, 원서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길래 씹집 이란 용어로 번역된걸까, 이 단어를 볼 때마다 거북했다. 돈을 주고 성관계를 맺는 장소이며 동시에 임신하기 위한 성관계를 맺는 장소인데 씹집.. 이라는 표현이라니. 이렇게밖에 번역할 수 없었던걸까? 어슐러 르 귄이 선택한 단어 자체가 씹집의 분위기를 주는 단어인건가? 씹집이라니... 이런 단어를 대체 누가 사용하나... 어쨌든.
건강하고 활기차고 대학에 가고 온갖 직업을 차지하는 게 모두 여자들의 몫이다. 씹집에 가 돈을주고 남자와 섹스를 하는 것도 여자들의 몫이고. 그러나 남자들에게 진정으로 사랑을 주지도 않고 결혼 상대로 생각하지 않으며 진지하게 아내를 맞이하고 싶을 때는 여자들과 결혼하는 여자들. 여자들은 아내를 맞이하고 아내가 되어준다. 그러니 결혼하면 아내에게 아내가 생기게 되는 것. 오, 이건 성반전이구나, 이 단편은 [이갈리아의 딸들]보다 먼저 쓰여진걸까? 싶어 찾아보니, 이 단편은 1994년에 발표된 단편이고 [이갈리아의 딸들]은 1975년 작품이다.
이 단편에서 머리를 풍성하고 길게 길리는 것도 남자이고 여자에게 선택받기를 원하는 것도 남자이다. 모든 직업과 교육은 여자의 몫이라 대부분의 것이 지금 여기, 즉 지구(?)와 성별역할이 다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그리와 지구(혹은 대한민국)의 남자가 공통된 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중요한게 섹스라는 것과, 맞춤법에 무지하다는 거였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데 남자들 맞춤법 잘 틀리는 거 너무 웃기다. 여자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남자친구가 맞춤법 너무 틀려서 스트레스 받는다고들 하는데,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같은 나라에서 교육을 받는데, 어째서 유독 한쪽 성별은 맞춤법에 약할까? 왜그럴까? 웃겨..
이 나라 남자들도 다 그냥 세그리 가서 살았으면........... 이 나라 남자들에 넘나 맞춤한 곳인데............
결국, 토드라의 감미로운 사랑의 말에도 불구하고, 토드라는 남자였다. 그리고 남자에게 씹은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여자에게 씹은 사랑과 삶의 한 가지 요소일 뿐이었다. (p.97)
곧장 토드라에게서 답장이 왔다. 제발 와서 함께 얘기하자고 간청하는 편지였다. 편지는 철자법이 엉망이고 글자마저 읽기 힘들었지만, 변함없는 사랑의 공언으로 가득했다. (p.98)
너무나 날카로운 작품이다. 단순히 모든 역할을 역전시킨 게 아니라 중요한 특성은 또 가져가게 두었으니. 그러나 이 소설을 쓰면서 '실험 자체는 즐겁지 않았다'고 한 르 귄 님의 말이 계속 맴돈다. 그래, 어느 한 쪽에게 더 많은 권력이 실려있는 일이 유쾌하고 즐거운 일은 아니지.
표제작인 <세상의 생일>도 내처 읽고 싶지만, 오늘 어슐러 르 귄은 이만큼만 읽어야겠다. 왜냐하면 읽기 욕망에 휩싸인 나는 또 이만큼의 책을 꺼내가지고 책상 위에 쌓아뒀기 때문이다. 나의 육체가 다섯개라면 이 다섯 권을 동시 읽기로 진행할 수 있을텐데, 아, 너무 안타깝다..
책상 위에 이만큼의 책을 쌓아뒀는데 벌써 일요일밤 아홉시반이라니 너무 슬프다. 날더러 어쩌란 말인지..나는 과연 이중에서 얼마만큼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흙 ㅜㅜ
시도 외워야 되는데 ... 시집은 꺼내오지도 못했네. ㅜㅜㅜ
굿나잇.
아자크는 흐늘흐늘한 남근에 심하게 거부감을 느꼈고, 그래서 하룻저녁에 서너 번씩 자신을 궤뚫지 못하는 남자는 주저없이 쫓아버렸다. - P90
그 사람은 제드르라는 젊은 여자였는데, 제조소에서 기계 수리 전문가로 일했다. 제드르는 키가 크고 잘생겼다. 아자크는 제드르가 자유롭고 힘차게 걸으며 서 있는 자세도 당당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96
에마드르는 나처럼 씹집의 전문성을 혐오했고, 우리는 언제나 수줍고 짧게 사랑을 나눴다. 그 점이 진정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게 욕망의 달성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증거라서였다. 우리가 함께 누워 얘기하고, 서로에게 자기 삶이 어땠는지를 말하고, 우리가 남자와 여자에 대해, 서로에 대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는지를 말했고, 자신의 악몽에 대해, 꿈에 대해 말할 때, 우리의 진짜 열정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끝없이 얘기했고, 그 영적 교감을 나는 평생 소중히 간직하고 기릴 것이다. 두 젊은 영혼이 자신들의 날개를 찾고, 오래는 아니어도 높이 함께 날았던 일을.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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