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20대 초반의 여자동료와 밥을 같이 먹었다. 우리는 연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료는 고등학생 때부터 연애를 해왔고, 지금은 비연애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말하길, '혼자 있는 지금이 제일 편하고 좋은데 사람들은 연애가 좋다고 말한다'는 거였다. 고등학생 시절 싱글이었을 때, 그렇게 말하는 게 너무나 당연시 되어 있어서 '나 싱글이야 외로워 ㅠㅠ' 라고 했지만, 사실 자기는 외롭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싱글은 외로워야 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분위기라 남들이 그러니 나도 그래야 하는 것 같았고, 연애를 하지 않으면 어딘가 부족한 상태로 보기 때문에 연애를 하기도 했다는 것. 그러나 연애가 자신에게 진짜 행복한 상황도 아니었고, 이제와 생각해보니 자기가 강요된 분위기에 자기도 모르게 휩쓸려 연애를 한 것 같았다는 거다.
나는 동료의 이 말에 동의했다. 전적으로.
내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있다.
싱글이었을 때 결혼한 여자친구가 내게 얼른 연애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다. 내 연애를 니가 왜 바라지? 나는 '하고 싶으면 할거야' 라고 답했는데, 그 때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니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내가 친구의 이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와. 비연애 상태는 불행이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지? 내가 싱글이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은, 대체 왜 때문에 튀어나오지? 물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중일 때 굉장히 행복했고, 주변에서도 행복해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연애중이지 않다고 해서 나는 세상의 끝으로 떨어진 것도 아니었고, 불행하지도 않았다. 나는 도넛츠와 커피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사람이고, 계절이 바뀌는 걸 실감하면서도 행복해지는 사람이다. 하늘이 좋으면 하늘이 좋아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행복한 사람이야. 혼자 와인 따라 놓고 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면 얼마나 행복한데. 나는 내 나름의 행복한 삶을 충실히 살고 있는데, 내가 싱글이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지금 현재 불행한 처지에 놓여있다' 라고 생각하고 안쓰럽게 보았다.
친구 한 명은 연애중일 때 다른 친구로부터 '그 사람과 결혼할 것도 아닌데 왜 시간낭비해?' 라는 말을 들었다며 기분 나빠했다. 인생은 결국 결혼이란 목적지로 가는 것인가? 연애를 해야 행복하고 결혼을 해야 완성되는 것이 삶의 흐름이란 말인가?
아주 오래전에, 이십대 후반쯤. 직장 다니며 적금을 붓고 있을 때, 엄마는 내게 결혼하라고 했다. 엄마는 내 모든 연애를 알지 못하고, 내가 연애중인지 비연애중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남자를 소개 받아서라도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거다.
"엄마, 내가 지금 결혼하려면 내가 지금 모은 돈을 다 써야 되잖아?"
"그치, 그러려고 돈 모으는 거지."
"너무 억울한데? 내가 힘들게 직장생활해서 모은 돈으로 결혼하란 말이야?"
"다 그렇게 살아."
"엄마 너무 이상해. 결혼하려고 돈을 모으면서 산다고?"
그때의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페미니스트에 대한 고정관념만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거다. 인생이 너무 억울한거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해서 스트레스 받으며 일하고 녹초가 되어 퇴근하고, 그러면서 월급 받아 적금을 부었는데, 그걸 차곡차곡 쌓아서 결혼을 하란 말이야?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이거슨 억울하다. 그때의 나는 남자를 너무나 좋아하였는데도 그것은 억울했다. 신해철이 넥스트로 발표한 노래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이건
이건
잘못됐어
뭔가
뭔가
잘못됐어
제목은 기억이 안나니까 패쓰.
그렇지만 돈을 모아 결혼하는 삶.. 나는 그것이 너무나 이상하여요.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어릴 때부터 나는 그것이 너무 억울하였고, 그래서 지금 나는 이렇게 산다..
온 세상이 모두 하나가 되어서 로맨스를 강요하고 이성애를 강요하고 결혼을 강요한다. 궁극적 행복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할 때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십대의 여자여도 육십대의 여자여도 마찬가지. 진정한 행복은 남자와 함께해야 찾을 수 있어요~ 한 마음으로 외친다.
며칠전에 영화 《북클럽》을 보았다. 와, 이렇게 살면 너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완벽한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노년의 여자 넷은 오래전부터 북클럽을 결성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었는데, 멤버들이 돌아가며 책을 선정하는 거였다. 다들 개인적으로 자신의 확고한 위치도 있던 터라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고 시간적으로도 여유있었으며, 북클럽 만남이 있어 넷이 모두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앞에 두고 이야기도 나누는 거다. 오래 함께한 사이니만큼 서로의 사정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고 또 지금 현재도 함께 같은 책을 읽으니 책에 대한 감상도 나눌 수 있다.
이런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면서 다정한 친구들과 오래오래 함께하는 삶. 정기적으로 만나서 같은 책을 읽은 감상을 나누는 것도 너무 좋을 것 같았다. 이번에 내가 고른 책은 이 책이야, 라고 말하고 한달 동안 그 책을 읽어오는 것. 그렇게 만나 술과 안주를 함께 하면서 그 책 어땠어? 감상을 묻고, 자 이번에 내가 고른 책은 이 책이야, 하면서 다른 책을 다시 읽으로 일상으로 복귀하는 삶. 너무 좋지 않은가!
그러나 이 영화는 이렇게 이미 완벽한 삶을 너머 더 행복한 삶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것이 노년에도 찾아올 수 있다, 그럴 때 기회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행복해져야 한다, 고. 그 메세지는 이성애를 통해 표현된다. 오래 그리워했던 남자가 찾아오고,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남자를 만나고, 데이트 앱을 통해 남자를 만나고, 소원했던 남편과 오해를 풀고... 그렇게 노년의 여자 넷이 모두 남자와의 사랑을 이뤄내는 것. 오, 해피엔딩!
섹스도 남자도 필요없다고 했던 연방판사가 직업인 여자조차도 데이트 앱을 통해 데이트 상대를 만나고. 하아-
어쩌면 그렇게 여자 넷이 똑같이 남자를 사랑하고 그 남자랑 함께하는 것이 행복인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인가...
틈틈이 그 개인들의 사정도 보여지지만, 어쨌든 궁극적 행복은 남자와의 연애, 사랑, 섹스....
책 읽고 친구들과 얘기하며 맛있는 것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는 궁극적 행복을 만날 수 없는 겁니까?
너무 아쉬운 거다.
그리고 나는 이런 문장을 성의 변증법에서 만난다. 1969년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쓴 글.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에,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요된 이성애를.
사랑을 다루지 않은 급진적 페미니즘에 관한 책은 정치적으로 실패작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출산 보다도 훨씬 더 여성 억압의 주축이기 때문이다. (p.183)
'남성들이 걸작품들을 창조하는 동안 여성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라는 지겨운 질문은, 여성은 문화에서 금지당했고 어머니의 역할에서 착취당했고, 또는 역으로, 여성은 자녀들을 창조했기 때문에 작품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는 명백한 대답 이상의 가치가 있다.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심층적인 방식으로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여성이 그들의 에너지를 남성에게 쏟기 때문에 남성은 생각하고, 글을 쓰고, 창조한다. 즉, 여성은 사랑에 몰두하기 때문에 문화를 창조하지 않는 것이다. (p.183-184)
만일 여성이 남성 경제의 주변부에 의지해 사는 기생적인 계급이라면, 그 반대 역시 진실이다. (남성)문화는 호혜성reciprocity 없이여성의 감정적 힘을 먹고 자라는 기생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이 문화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한 전체의 절반만 제시하는 편협한 것임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문화의 구조 자체가 모든 점에서 남성 사회의 이익 안에서, 남성 사회의 이익을 위해, 남성 사회의 이익에 의해 운영될 뿐만 아니라, 성적 양극성sexual polarity 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전체의 절반인 남성이 문화의 모든 것이라고 불리지만, 남성은 여성의 '감정적' 절반이 있음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은밀하게 그것으로 산다. 그들 안에 있는 여성을 거부하는 싸움의 결과로서(우리가 설명해온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그들은 사랑을 문화적 문제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랑이 '여행과 모험'의 커다란 남성 세계에서 사내다움을 증명하려 작정하고 덤비는 모든 남성의 약점이듯이, 사랑은 (남성)문화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여성은 남성이 사랑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이 필요를 부정하는지 언제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여성이 보편적으로 남성에게 느끼는 특이한 경멸("남자들은 완전 멍청해")을 설명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성은 그들의 남성이 외부 세계에서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184-185)
그녀는 그의 연극에서 또 다른 자아Alter Ego, 내 자녀의 어머니, 가정부, 요리사, 동반자라는 다양한 역할을 하며 가장 다재다능한 여배우로 지명되었던 것이다. 그는 삶의 빈 공간을 채우려고 그녀를 샀다. 그녀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다른 여성과 같아지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지배계급의 일원의 부속물인 한에서만 그녀의 계급으로부터 상승한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지위를 상승시키지 않는 한 그는 그녀와 결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유로워지지 않았고, '집 안에서 일하는 흑인 하인'으로 승진되었으며, 다른 방식으로 이용되기 위해서만 격상되었을 뿐이다. 그녀는 속았다고 느낀다. 그녀는 사랑과 인정을 얻은 것이 아니라 소유자 신분possessorship과 통제를 얻었다. 이것이 그녀가 수줍은 신부에서 마누라로 변형하는 때이고, 아무리 보편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라 해도 각기 남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변화이다. ("당신은 내가 결혼했던 여자가 아니야.") (p.205-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