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에 블로그에 썼던 것을 가져옵니다.

 
-존 로 타운젠드의 [어린이책의 역사]에서 20세기를 다룬 후반부 분량을 보고 있자니 새삼 ABE 전집의 셀렉션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타운센드가 '이것은 주목할 만하다' 라고 꼽은 작품들 중 많은 수가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타운센드가 다루지 못한 비영어권 국가의 작품들까지도 커버하고 있으니까요. 

 일단, 저 책에서 언급해서 생각난 김에 스코트 오델의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The Hawk That Dare Not Hunt by Day]를 다시 읽고, 이게 대체 정확히 무슨 이야기였는가를 파악해 보기로 했습니다.

 읽었다면서 무슨 소리냐...읽었다고는 해도, 당시 만 9세, 라틴어 성경의 영문 번역이 어떤 종류의 위협이 되는지를 정확히 깨달았을 턱이 없습니다. '혁명' 이라고까지 불리는 데는 글쎄...그러니까, 간단한 이야기예요. 헨리 8세가 왕이던 시절, 인쇄술의 힘을 입어 처음으로 영역 성서를 대량 배포하려 했던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저 성의 발음은 '틴들' 이 맞습니다) 후대에 끼친 그의 영향은 상당합니다. 흠정역 성서King James Version도 틴들의 번역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어쨌든 그 본인은 이단과 반역이라는 좀 알쏭달쏭한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당했습니다.



William Tyndale (1494-1536)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에서는 틴들 목사의 인생 후반, 성서를 번역하고 밀수(유럽에서 찍어서 영국으로 들여오기 위해) 하던 때에 초점을 맞추고, 성서 밀수를 돕는 소년 톰 바튼Tom Barton의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튼 소년은 어릴 때부터 삼촌 잭을 따라 항해를 다닌 터라, 기묘하게 세상 물정에 밝습니다-틴들 목사보다 더. 그러나 그 역시 영역 성서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상황을 잘 깨닫지 못하면서도 이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이야기의 중심이 어쨌든 윌리엄 틴들이라는 '좋은 사람', 진정한 크리스트교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실제로 틴들이 어떤 인품의 소유자였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21세기적 관점으로 바라보기에도 그가 한 일이 별로 나쁘지 않은-일부 특권계층을 제외한 사람에게는 심지어 좋은-것임은 확실합니다. 이 '좋은 사람' 에게 세상이 무슨 짓을 했는가와, 그 사실에 대한 바튼 소년의 반응이 이 소설의 핵심인데, 소년은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다가 마지막에 갑작스레 틴들 목사의 마음을 깨닫고 '어른이 됩니다'-즉, 원수라고 생각했던 틴들의 밀고자를 용서하게 됩니다. 아니, 실은 저 같은 좁은 사람으로써는 '어른이 되다' 정도로도 부족하고 인격자가 되었다고 해야 할 정도의 변화입니다만...윌리엄 틴들 목사가 사라져 간 세상에서 그가 행했을 법한 일을 대신 행하는 것이, 고인에 대한 소년의 사랑의 깊이를 보여 준다고 해야겠지요. 소년에게는 이제 삼촌도 없고 틴들 목사도 없으니, 그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책들이 많은 ABE 전집에서도,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의 어두운 터치는 각별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문학의 힘이란 굉장합니다. 극동의 나라에서 종교적 박해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이 살아온 소녀에게도 신교도 혹은 구교도에게 쫓겨 피신하는 힘든 여행길의 꿈-그러니까 악몽-을 꾸게 합니다!) 원래 아이에게 친절할 의도가 없이 씌어진 책들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ABE 전집의 책들인데, 그 책의 작가들 중에서도 스코트 오델은 각별히 '너 사실 애 싫어하지' 라는 혐의를 받을 것만 같습니다. :]

 [검은 진주The Black Pearl]는 오델의 그런 혐의를 더욱 짙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애...라기보다 소년을 싫어한다고 해야 할까요? 한 마디로 '젊은 혈기라고 일이 다 잘 되는 건 아니지' 라는 우울함이 여기도 서려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에이브 전집 27권, 아이반 사우스올Ivan Southall의 [여우굴The Fox Hole]뒤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미친 듯이 꼬이고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닥쳐오더라도 이 1인칭의 소년들은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어조는, 어쨌든 이 세상은 젊은애들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체념한 꼰대의 목소리입니다.

 [검은 진주]의 세계는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보다 한결 우화적이며, '소년이 바다의 군주로부터 훔친 진주가 불행을 불러온다'는 이야기의 줄거리는 동화 그 자체입니다.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이 좀 더 철학적인 이야기일지라도요. 어쩌면 진주를 바치지 않았어도 폭풍은 일지 않았을 지 모릅니다. 어쩌면 진주를 그대로 손에 쥐고 있었더라도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믿음에 관한 것이자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스스로 테두리를 치는 법을 깨닫게 되는 순간 소년은 어른이 됩니다. 

 Trivia
[검은 진주]는 1999년 [라몬의 바다] 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알라딘 도서 정보를 믿는다면 아직 절판이 아닌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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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
카르멘 포사다스 지음, 권도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책 읽다가 번역이 입에 좀 걸리면 그 출판사에서 전에 뭘 냈었나 찾아보는 습관, 저한테만 있는 건 아니죠? =_=; 힐끔 넘겨다보니 소설 중에 별로 인상적인 건 없군요. (다행히. ) 좀 걸리는 부분이 몇 가지 있어서,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마땅한 설명이 없어서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저는 이 책의 한국판이 당연히 영어 중역본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유래하는 걸림과(이를테면 저는 네스터와 같은 인종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 그 나라에서 운영하는 케이터링 서비스 업체의 이름이 "Mulberry & Mistletoe" 라고는 생각하기 좀 힘들기 때문에) 자잘한 무지(혹은 게으름)에서 오는 걸림은 이제는 그러려니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주인공 Nestor Chaffino의 이름이 '네스터 채핀치' 가 되었는지는 약간의 해명을 요구하고 싶은데요. :] 웹에서 제가 찾아본 모든 검색결과에서 Nestor Chaffino로 나타나고(오타로 추정되는 배리에이션은 좀 있음), '채핀치' 가 될 가능성은 아무래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Chaffino라는 이탈리아식 성을 '채피노'로 읽었더라도 좀 껄끄러웠을 텐데 너무 멀리 가 버려서 아예 그 점에 대해서는 의문조차 제기할 수 없는 상황. 그 와중에 정정이라도 있나 하고 가 본 출판사 홈페이지에는 이 책 정보가 아예 없습지요. OTL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껍지 않은 소설에는 확실히 뭔가가 있습니다! 애초에 읽기로 마음먹은 것은, "애거서 크리스티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완벽한 배합" 이라는 피가로 지 코멘트가 몹시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저게 대체 뭔 소리냐...=_=' 싶어 마음이 산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감상은, '저 평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입니다. 첫 장부터 주인공은 죽음의 문턱에 있고, 어째서 이런 격한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는가가 펼쳐집니다. 뻔한 암시, 등장인물들의 충돌하는 열정이 연극적 독백으로 서술되고, 한 챕터마다 비극의 실이 짜여...이미 닥칠 것을 알고 있는 비극까지 독자를 끌고 가는 솜씨가 절묘합니다. 여기서 [0시를 향하여] 를 언급하는 것은 너무 진부하겠고, [유니스의 비밀]을 언급하는 것은 너무 무겁겠지만 대략 그런 느낌을 연상해 주세요. 역시 이 소설을 묘사하라면 '연극적' 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해요. 내부에서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을 인용하고 있어서뿐만이 아니라...한 챕터가 끝이 날 때마다 연극의 한 막이 끝난 듯한 설레임과 기대감을 안겨 줍니다.
동기는, 그야, 비밀과 비밀과 비밀과 '비밀' 입니다. 마지막 비밀 역시 충분한 암시를 가지고 등장하지만, 그래도 이 결말에는 일종의 콕 쏘는 단편 같은 뉘앙스가 있어요. 좋은 마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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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희 2008-06-25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이 책을 번역한 권도희라고 합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지적하신 부분도 잘 봤습니다. 다른 부분은 각설하고, 해명을 바라시는 네스터의 이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제가 텍스트로 받은 책은 2003년 Black Swan사에서 출간된 Little Indiscretions 입니다. 웹에서 찾으셨다는 오타는 거기서 나온 것일 확률이 큽니다. 그 책에는 Nestor Chaffinch로 나와있으니까요. 서평을 보고 아마존에 들어가보니 미국판에는 지적하신대로 Chaffino로 되어있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런던판에 이름이 잘못 들어간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런던 판을 텍스트로 삼게 되어 문제가 된 것 같고요. 사족입니다만 번역을 하다보면 인명은 제일 신경이 많이 쓰이는 부분이자,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네스터 같은 경우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혼혈이라 어떻게 읽어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 런던판의 Chaffinch는 말이죠. 아무리 저라도 Chaffino로 되어 있었다면 말씀하시는 것처럼 너무 멀리 가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 정도면 해명이 되었을까요.

eppie 2008-06-25 16:0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권도희 님의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상상하기 힘든 종류의 일이 일어났던 탓에, 본의 아니게 권도희 님께 비난으로 읽힐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를 퍼붓고 말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해 보면 설명이 부족했던 것이나 판본의 선정이나 모두, 번역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출판사의 기획 단계에서 벌어진 잘못이었던 것이 커 보입니다. 너무나도 예상 밖의 일이라 말이 좀 심해진 감이 있는데, 죄송합니다. 너무 마음 상하지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위에도 썼듯이 책 자체는 무척 재미있었고, 앞으로도 권도희 님의 번역으로 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 글 자체는 예전에 써 두었던 것입니다만, (가장 정확할) 번역자님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으니, 역시 혼자 끙끙거리는 것보다 알라딘에 올리기를 잘 했다고 생각중입니다.
 

-그를 아는 사람 중에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 제목을 보고 설마라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는데, 이 책은 정말로 에드워드 고리Edward Gorey 가 살던 집에 대한 책입니다. 작가  케빈 맥더못Kevin McDermott은 80년대 중반에 배우로서, 그리고 제작자로서 고리를 만났고, 2000년 고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집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게 됩니다. 이 책에는, 다른 사람의 손으로 정리되기 전 '코끼리 집' 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에드워드가 살았던 당시 그대로의 모습, 그가 모으고 늘어놓고 정리하고 쌓아두었던 그대로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집은 취향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통 어떤 사람의 집이 그 사람을 대변해 준다고 여겨지는 것 이상으로, 이 집은 너무나도 Goreyesque합니다. 에드워드 고리는 이 집을 손수 구입하고, 몇 년에 걸쳐 마음에 드는 대로 수리하고 보수하면서(그는 비용 문제로 한동안 수리를 보류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자신만의 집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고리는 고양이들과 함께 살면서 독신으로 지냈고,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혼수상태로 있다 세상을 떠났으니 이 책에 담긴 것은, 그의 생활의 생생한 절편일 겁니다.


그는 마룻바닥이 내려앉을 정도로 많은 책에 둘러싸여 지냈습니다. 수많은 장신구를 벽에 걸어 보관했습니다. 그는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Buffy the Vampire Slayer]의 팬이었습니다. TV를 보면서 자기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의 봉제인형을 꿰매고, 책을 읽으면서 운동용 자전거를 타고, 창문마다 아름답게 비치도록 색유리로 된 물건을 가져다 놓았지요. 문틀 위에 조그만 물건을 올려 놓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돌들을 주워 모으고, 그것들을 주의깊게 늘어놓고요. 그가 현관 계단에 올려놓았던 돌들은 이제는 치워졌을 겁니다. 그가 사랑했던 고양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책도 집만큼이나 Goreyesque합니다. 맥더못의 실내 사진과 설명 사이사이에는, 고리의 작품에서 인용한 친숙한 행들과 고리의 '코끼리' 그림들이 들어 있습니다. 표지에 씌어진 책 제목과, 각 챕터 제목-즉 방 이름-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원래는 그의 손글씨였던 바로 그 폰트입니다. 맥더못은 방을 설명하면서 그 방에 얽힌 고리의 유머러스한, 혹은 씁쓸한 일화들을 이야기합니다. 일화가 아니라 방 자체가 고리의 유머일 때도 있어요. 이를테면...이 집에는 Ball Room이라는 방이 있는데, 그게 정말로 들을 갖다 놓은 방인 거예요. 온갖 재질의. :]

 맥더못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의외일 정도로 감상적이 됩니다. 예전부터 '창밖을 바라보듯이' 창가에 세워져 있던 디킨즈의 흉상은,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이 집의 주인인 에드워드 고리의 모습이 됩니다. 창문에 비친 그 옆얼굴은 정말로 에드워드처럼 보여서, 그가 [The Object Lesson]의 마지막에서처럼 신비한 방식으로, 그 한 마디 "Farewell" 을 전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고요.

 이 사진은 책의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습니다. - 놀라운 일이에요, 4월의 녹색 위로 비친 그 옆얼굴은, 제게도 꼭 에드워드처럼 보였거든요. :]

Trivia

1. 케빈 맥더못의 홈페이지(링크)에서 이 책의 많은 사진들을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대인배네요! :D

2. 이 집의 이름이 왜 Elephant House인가...회색 지붕널이나, 집의 크기 때문이란 말도 있고, 결정적으로 고리가 이 집을 샀을 때부터 있던 코끼리를 연상시키는 모양의 변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고리는 나중에 이 변기를 직접 테이블로 만들었다고요. 책에는 그 변기...아니 테이블의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3.  이 책의 서문을 쓴 사람은 존 업다이크John Updike입니다. (생각해 보니 이건 트리비아가 아니다!)

4. 고리 자신과 그 사촌들에게서 [미치광이 사촌들The Deranged Cousins]의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군요. (...)

 

5. 엘리펀트 하우스는 현재, 일종의 에드워드 고리 박물관으로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근처에 가실 일 있으시면 들러 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홈페이지는 여기 입니다. 
 위키페디아 에서 외관 사진을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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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앤 나이트 블랙 캣(Black Cat) 3
S. J. 로잔 지음, 김명렬 옮김 / 영림카디널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저쪽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더라면 짤 기크geek 계급에 속했을 게 틀림없는 인간으로서는(nerd에 더 가까우려나요?) 미국식 틴에이저 계급제도 안의 자신을 생각하면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 당연한데, 그게 딱히 요즘 한국 고등학교 속의 자신보다 끔찍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학생을 대학에 쑤셔넣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아직도 공부인 것 같으니, 그럭저럭 해 나갈 수도 있겠지요. [여고괴담]이 더 나오지 않기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면 어이없다는 반응을 얻겠지만, 어쨌든 요 몇 년간 제게 더 익숙한 것은 한국 고등학교 사회보다 미국 고등학교 사회입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만큼 분위기가 빨리 변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본 미디어 안에서는 늘 기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영화 제작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작가에게 영감을 줍니다. 그 작가나 감독이 실제로 어떤 계급의 일원으로 학교를 다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이제 저는, [윈터 앤 나이트]를 처음 읽었을 때보다 이 책의 의미를 더 잘 압니다. 위에 썼다시피 이 책을 읽은 후로 한국 고등학교는 제가 알지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고, 접하는 미디어가 변하면서-이를테면 책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몇 년간 쏟아진 드라마의 러시도 있고, 읽게 된 블로그도 있기 때문에-상대적으로 미국 고등학교 사회에는 좀 더 가까워졌거든요.
 그러나 정작 가장 치명적인 계기는 한국의, 미디어가 아닌 현실이었습니다. 워런스타운이 얼마나 섬뜩한 곳인지를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은 지난번 대통령 선거를 겪은 탓입니다. 규모를 한 나라에서 한 마을로 줄이고 경제를 풋볼로 바꾸면 바로 워런스타운이 됩니다. 포털 사이트와 개인 블로그를 통제하는 대신 고등학교 신문부 기자를 두들겨 패고, 대운하를 파는 대신 운동부 애들을 스테로이드에 중독시키는 거죠. 근래 읽고 있는 소설들이 끊임없이 이런 문제를 제기합니다만, 아니면 제가 무의식적으로 이런 소설들만을 고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체 인간의 눈을 가리는 건 뭡니까? 그것에 정말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20년 전의 강간 피해자를 앞에 놓고서, 혐의가 입증되지도 않은 용의자의 부모를 고소하라고 부추기는 잔혹함은, 학살당한 희생자 유족들을 기념식에 초대해 놓고서 정작 묘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잔인성은 어디로부터 오는 겁니까?

 요즘 읽은 소설의 작가들은 하나같이, 흔한 이야기지만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제게 눈을 뜨고 있으라고 강요합니다. 그리고 석 달도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결심을 무색케 할 만한 피로가, 그냥 눈을 감고 싶어지는 피로가 몰려옵니다. 저는 이제 정말로 눈을 감고 싶습니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견디기가 힘듭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선동에는 재주가 없는 저도 S. J. 로잔과 같은 작가가 된다면,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현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을까요? 남을 변하게 하는 것보다도, 자신이 변하지 않기 위해 쓰고 싶습니다.

 이번 책 정리는 정말로 성공적이지 못하군요. 저는 몇 권의 책을 꺼냈고 연속해서 도저히 처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윈터 앤 나이트]는 장르의 '고전' 이 될 책입니다. 저는 이 책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테고요. 4년만에, 다시 읽으면서 너무나 착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독서 자체로는 극상의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묘사나 서술에 치중하다 대화가 허물어지는 것은 참 견디기 힘든 시련인데, 이 소설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윈터 앤 나이트]의 수많은 논쟁들은 빈틈이라곤 없고, 늘 긴장감이 넘치고, 심지어 아름답습니다. 책의 외관도 지금까지 손에 잡은 장르문학 번역본 중 가장 마음에 듭니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와 공동 1위일 거예요. 상당한 두께임에도, 아픈 손목에 들기에도 고통스럽지 않은 가벼운 무게와 촘촘하고 읽기 좋은 편집은 다시 봐도 마음 흐뭇합니다. 책장이나 책 옆구리와 모서리를 응시하고 있으면, 어떤 종류의 미가 분명히 있다,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는 기분이 들어요.

이제 빌이 말하는 리디아 말고 리디아가 말하는 빌을 보고 싶은 기분인데 번역본이 더 나오지 않는군요. 까짓거 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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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장석 그 비밀과 추리
월장석 동서 미스터리 북스 8
월키 콜린즈 지음, 강봉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예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리뷰를 가져옵니다)

-'고전' 에 속하는 이 소설을 이제야 읽었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변명을 하자면, 워낙 지루하다는 평을 많이 들어서요.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지루하다는 평을 한 사람들의 다른 취향에 대해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감안했어야만 했어요. 그 사람들이 호평한 미스터리들(주로 엘러리 퀸의 작품)을 제가 좋아하느냐? 그럴 리가요. -_-; 제가 싫어하는 게 있다면 엘러리 퀸과 히가시노 게이고(와 제가 담은 김치-_-)... 그 점에 생각이 미쳐서, 시대정신을 고취할 겸 읽어 보았습니다.

 ...뭐야, 역시 재미있잖아. ^ㅁ^;
 
 가장 놀란 점은 이 소설(1868년작)이 얼마나 현대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요즘의 미스터리가 무척 복고적이 되어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고요. [월장석]이 '탐정이 모든 진상을 파헤치는 무지막지한 일직선적 구도의 추리소설'로 가기 전의 과도기적 작품이며, 요즘 미스터리들이 지금까지 나온 여러 가지 새로운 기법을 시도해 가다가, 영문학의 귀엽고 우아한 기법(제인 오스틴의 조그만 수수께끼를 계승하는!)을 재발견하는 시기를 겪고 있다고 해석하면 대략 들어맞습니다. 무엇보다 첫 번째 화자이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베린더Verinder가의 집사 가브리엘 베터리지Gabriel Betteredge의 서술과 그 성격은, 디킨즈적 유쾌함을 넘어서서(윌키 콜린즈는 진짜로 디킨즈의 친구였다고 합니다.) 거의 라이트노벨적 현란함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순히 시대상에서 나온 거라고만 볼 수 없는 골때리는 서술이 너무 많이 나오기에, 맞은편에 앉아있던 친구(시대물, 빅토리아시대 상복 광. 한마디로 엄청난 변태)한테 '이건 시대상 탓일까? ' 라고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그냥 '나만의 세계' 아냐? "



 영문판 표지 중 하나.


..."집사쯤 되는 사람이 저따위의 '나만의 세계'를 가져서 어쩌려구 ;ㅁ; " 라고 항의했더니, 다시 "집사라는 직업이야말로 '나만의 세계' 그 자체일 것 같은데..." 라는 대답. 좋습니다. 항복합니다.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더라구.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만장 일치로 이 책에서 가장 매혹적인 캐릭터로 베터리지를 지목할 겁니다. 파이프 담배와 [로빈슨 크루소]에 집착하며, 마님과는 계급을 넘어선(*넘어서지 않습니다) 우정을 유지하고 있고, 아름다운 메이드 딸을 두고 있으며, 탐정열에 들뜬 자신을 책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두근거리며 커프 경사Sergeant Cuff(*이 시대의 Sergeant를 그냥 '경사' 로 번역해도 될지 모르겠군요. 참고로 저 동서미스터리판에서는 '형사부장' 이었습니다)를 따라나서는 집사...현대적입니다, 심하게 현대적입니다! 설명만 보면 디킨즈 시대 캐릭터인지 라이트노벨 캐릭터인지 모를 것 같습니다.  


 또 놀란 점은-[북풍의 등에서] 이야기를 쓸 때 얼핏 언급했습니다만-이 책이 또 하나의 걸출한 캐릭터 드루실라 클랙Drusilla Clack 양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지금처럼 과학과 종교가 얼렁뚱땅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든 더욱 격렬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 생각도 들고요(역시 [북풍의 등에서] 이야기를 쓸 때 슬쩍 언급했지만, 킹즐리를 높이 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열렬한 기독교인이자 '전도 몬스터'라고 표현해야 할 미스 클랙의 서술은, 자기 입으로 자기의 우스꽝스러움을 줄줄 털어놓게 만든다는 데서 잔혹할 정도로 통렬한 풍자의 기미를 담고 있습니다. 막무가내 전도꾼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이 이미 150년 전에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허탈한) 웃음이 나오더군요. 아 좀, 이 나라도 어떻게 안 되는 거야? ;ㅁ;

 전체적으로 담고 있는 정보의 양이 많고, 캐릭터의 조직도 훌륭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죠. 베터리지는 '상류 계급 취미'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품고 있습니다. 딱히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개 뭔가 할 일이 없을까 찾아다니는 일'로 이루어진 생활을 하는 지체 높은 분들Gentlefolks, 곧 '날마다 빈 약상자를 들고 나가 작은 양서류 및 곤충을 잡아와서 학대하는 박물학에 취미가 있는 도련님 및 아가씨들'에 대한 베터리지 식 재치있는 서술이 두 페이지 가량 이어집니다. 전문 인용하고 싶은데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여기 실린 원문이라도...


 그리하여 그는, 프랭클린 블레이크Franklin Blake와 레이첼 베린더Rachel Verinder에게 어디까지나 사랑과 존경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벌이는 행각만은 도저히 존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할 줄 아는 프랭클린씨'가 만든 용제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취가 풍겼고(It stank.), 저 두 사람이 못쓰게 만든 것은 '공평하게 말해 문밖에 없었습니다'. 그 문 장식의 도안은 그리핀, 새, 꽃, 큐피드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완성본을 본 가브리엘 베터리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 '그리핀이며 큐핏이며 그밖의 여러 꽃들과 다른 도안들이 수가 너무 많고 자세가 혼잡하여 다 보고 난 뒤에는 머릿속에 불쾌감이 언제까지나 남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보기에는 대단히 아름답다는 것을 나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리고 이 문짝이 완성되는 순간까지 그는 그들의 작업을 '문을 망치는 일' 이라고 지칭합니다!


뜬금없이 라파엘 작품이 등장하는 이유 : 베터리지에 의하자면 저 도안은 라파엘의 그림을 베낀 겁니다. 그리핀은 없지만 큐피드와 죄많은 아기천사 그림을 통해 참극의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 봅시다. ^_^;

사건의 여러 면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서술시키는 방식은 제가 몹시 좋아하는 것이고, 탐정 말고 다른 캐릭터도 중시하는 점 역시 그러합니다. 미스터리를 시도했다고 해도 여전히 '사람'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까닭인지, 제가 싫어하는 납작한 여성 캐릭터나 겉멋든 (역시 납작한) 탐정이 없습니다. 프랭클린 블레이크, 가브리엘 베터리지, 커프 경사, 에즈라 제닝스Ezra Jennings 네 사람은 모두 탐정이면서 자기만의 맹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고, 정확히 그런 인물이 볼 법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위화감이 없습니다. 집사 베터리지 씨부터 '모험물'의 겉멋든 젊은이 프랭클린 블레이크나 현대물이라면 분명 모에캐릭터가 되었을 에즈라 제닝스까지, 디킨즈와 이런 캐릭터 이야기를 주고받는 윌키 콜린즈를 생각하면 즐거워집니다.

 저는 메인 '트릭' 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분명 굉장히 미심쩍습니다만 고룡무협의 추리적 요소들도, 쿄고쿠도 이야기들도 그 세계 안에서 납득이 간다면야 아무튼 딴지걸지 않기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이니까요. 진정 여기서 무릎을 치게 할 대목은 그 행동이 '무엇으로 이어졌느냐' 이고, 그것은 논리와 우연과 기회라는 모순되는 개념이 하나 되어 피어나는 꽃입니다. 그리고 후배 미스터리 작가들이 한동안 쫓았던 것도 그 꽃이었지요.

Trivia
1. 동서미스터리의 악명높은 중역, 그 피해상이 격렬하군요. 상식적인 표기법에 들어맞게 써 놓은 이름은 '레이첼'과 '프랭클린 블레이크'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_-; '돌시이러'라니 심각하게 창의적입니다! (원문은 위에도 썼다시피 Drusilla)

2. 저는 4장 첫머리의 'dinner'를 '저녁식사'로 해석하면 7장까지의 시간감각이 터무니없이 이상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요크셔의 저녁이 칠순의 집사와 외국 여행에서 막 돌아온 사람이 저녁식사를 팽개치고 야외에서 낮잠을 즐겼다는 핑계가 통할 정도는 분명 아닐 텐데요. 게다가 저녁식사 시간에 도착한 것이 '4시간 일찍' 온 거라면 프랭클린 블레이크는 대체 원래 몇 시에 도착할 작정이었던 겁니까, 친척이라고는 해도 남의 집에!

3. '비둘기 알만한 루비'나 '물떼새 알만큼 커다란 다이아몬드'라는 게 어느 정도 현실감이 있는 사이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저 말은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한 도시인들에게는 이제 비유로써의 생생함마저 상실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_-;

4. 알라딘의 이 책 페이지에 실려 있는 어느 분의 2005년 1월자 리뷰는 좀 눈물겨웠습니다. 저어, 21세기에 출판되는 책은 모조리 21세기에 씌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_^; 게다가 심지어, 틀렸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도인들은 모두 고귀한 신념을 가진 '신사' 들이고 동시대 영국의 짐승들보다 훨씬 나은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_-;

5. 웹 여기저기에 원문 전문이 있습니다 : Project Gutenberg | Bibliomania

6. WILKIE COLLINS INFORMATION PAGES

 


 William Wilkie Collins (1824-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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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30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ppie 2008-06-04 15:46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일단 인사를 드리고...
댓글을 늦게 읽어서, 지금도 있는지 열심히 가 봐야겠군요. ㅠ_ㅠ 지난 번에 헌책방 검색을 돌렸을 때는 그 당시 찾던 것 중 이것만 없었는데(대신 스코트 오델의 [푸른 돌고래섬]을 구했습니다) 이번에 사야겠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시장미 2008-06-04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 유익한 페이퍼군요. 와우.. 눈 돌아가요 으흐

eppie 2008-06-05 12:58   좋아요 0 | URL
앗, 초면에 대뜸 단 덧글을 보고 와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

최상철 2008-07-2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홈피에 덧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까지 문스톤이 한자 그대로 월장석인줄 알았네요;; 이 글을 보자마자 놀랄만한 지식에 읽으면서 자꾸 깜짝깜짝 놀랩니다! 미처 제가 발견하지 못한 점까지 발견하셨네요. eppie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eppie 2008-07-29 14:42   좋아요 0 | URL
앗, 주제넘은 덧글을 달아 버린 건 아닐까 염려했는데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ㅜ.ㅠ 지식이라기보다는, 검색벽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니 대단한 것은 실은 상철님이지요. :] 저도 좀 더 젊은 나이에 [The Moonstone]이나 그 외 다른 재미있는 것들을 읽었더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답니다.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부탁드릴게요. ^_^

수아 2012-01-12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녕하세요ㅎㅎ 좋은 정보 많이 얻고가네요^_^ㅋ 우와
이 많은 걸 어떻게 정리하셨어요? 저는 못할텐데~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