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 앤 나이트 블랙 캣(Black Cat) 3
S. J. 로잔 지음, 김명렬 옮김 / 영림카디널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저쪽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더라면 짤 기크geek 계급에 속했을 게 틀림없는 인간으로서는(nerd에 더 가까우려나요?) 미국식 틴에이저 계급제도 안의 자신을 생각하면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 당연한데, 그게 딱히 요즘 한국 고등학교 속의 자신보다 끔찍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학생을 대학에 쑤셔넣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아직도 공부인 것 같으니, 그럭저럭 해 나갈 수도 있겠지요. [여고괴담]이 더 나오지 않기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면 어이없다는 반응을 얻겠지만, 어쨌든 요 몇 년간 제게 더 익숙한 것은 한국 고등학교 사회보다 미국 고등학교 사회입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만큼 분위기가 빨리 변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본 미디어 안에서는 늘 기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영화 제작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작가에게 영감을 줍니다. 그 작가나 감독이 실제로 어떤 계급의 일원으로 학교를 다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이제 저는, [윈터 앤 나이트]를 처음 읽었을 때보다 이 책의 의미를 더 잘 압니다. 위에 썼다시피 이 책을 읽은 후로 한국 고등학교는 제가 알지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고, 접하는 미디어가 변하면서-이를테면 책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몇 년간 쏟아진 드라마의 러시도 있고, 읽게 된 블로그도 있기 때문에-상대적으로 미국 고등학교 사회에는 좀 더 가까워졌거든요.
 그러나 정작 가장 치명적인 계기는 한국의, 미디어가 아닌 현실이었습니다. 워런스타운이 얼마나 섬뜩한 곳인지를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은 지난번 대통령 선거를 겪은 탓입니다. 규모를 한 나라에서 한 마을로 줄이고 경제를 풋볼로 바꾸면 바로 워런스타운이 됩니다. 포털 사이트와 개인 블로그를 통제하는 대신 고등학교 신문부 기자를 두들겨 패고, 대운하를 파는 대신 운동부 애들을 스테로이드에 중독시키는 거죠. 근래 읽고 있는 소설들이 끊임없이 이런 문제를 제기합니다만, 아니면 제가 무의식적으로 이런 소설들만을 고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체 인간의 눈을 가리는 건 뭡니까? 그것에 정말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20년 전의 강간 피해자를 앞에 놓고서, 혐의가 입증되지도 않은 용의자의 부모를 고소하라고 부추기는 잔혹함은, 학살당한 희생자 유족들을 기념식에 초대해 놓고서 정작 묘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잔인성은 어디로부터 오는 겁니까?

 요즘 읽은 소설의 작가들은 하나같이, 흔한 이야기지만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제게 눈을 뜨고 있으라고 강요합니다. 그리고 석 달도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결심을 무색케 할 만한 피로가, 그냥 눈을 감고 싶어지는 피로가 몰려옵니다. 저는 이제 정말로 눈을 감고 싶습니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견디기가 힘듭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선동에는 재주가 없는 저도 S. J. 로잔과 같은 작가가 된다면,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현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을까요? 남을 변하게 하는 것보다도, 자신이 변하지 않기 위해 쓰고 싶습니다.

 이번 책 정리는 정말로 성공적이지 못하군요. 저는 몇 권의 책을 꺼냈고 연속해서 도저히 처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윈터 앤 나이트]는 장르의 '고전' 이 될 책입니다. 저는 이 책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테고요. 4년만에, 다시 읽으면서 너무나 착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독서 자체로는 극상의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묘사나 서술에 치중하다 대화가 허물어지는 것은 참 견디기 힘든 시련인데, 이 소설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윈터 앤 나이트]의 수많은 논쟁들은 빈틈이라곤 없고, 늘 긴장감이 넘치고, 심지어 아름답습니다. 책의 외관도 지금까지 손에 잡은 장르문학 번역본 중 가장 마음에 듭니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와 공동 1위일 거예요. 상당한 두께임에도, 아픈 손목에 들기에도 고통스럽지 않은 가벼운 무게와 촘촘하고 읽기 좋은 편집은 다시 봐도 마음 흐뭇합니다. 책장이나 책 옆구리와 모서리를 응시하고 있으면, 어떤 종류의 미가 분명히 있다, 바로 이곳에 존재한다는 기분이 들어요.

이제 빌이 말하는 리디아 말고 리디아가 말하는 빌을 보고 싶은 기분인데 번역본이 더 나오지 않는군요. 까짓거 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