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에 블로그에 썼던 것을 가져옵니다.
-존 로 타운젠드의 [어린이책의 역사]에서 20세기를 다룬 후반부 분량을 보고 있자니 새삼 ABE 전집의 셀렉션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타운센드가 '이것은 주목할 만하다' 라고 꼽은 작품들 중 많은 수가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타운센드가 다루지 못한 비영어권 국가의 작품들까지도 커버하고 있으니까요.
일단, 저 책에서 언급해서 생각난 김에 스코트 오델의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The Hawk That Dare Not Hunt by Day]를 다시 읽고, 이게 대체 정확히 무슨 이야기였는가를 파악해 보기로 했습니다.
읽었다면서 무슨 소리냐...읽었다고는 해도, 당시 만 9세, 라틴어 성경의 영문 번역이 어떤 종류의 위협이 되는지를 정확히 깨달았을 턱이 없습니다. '혁명' 이라고까지 불리는 데는 글쎄...그러니까, 간단한 이야기예요. 헨리 8세가 왕이던 시절, 인쇄술의 힘을 입어 처음으로 영역 성서를 대량 배포하려 했던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저 성의 발음은 '틴들' 이 맞습니다) 후대에 끼친 그의 영향은 상당합니다. 흠정역 성서King James Version도 틴들의 번역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어쨌든 그 본인은 이단과 반역이라는 좀 알쏭달쏭한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당했습니다.
William Tyndale (1494-1536)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에서는 틴들 목사의 인생 후반, 성서를 번역하고 밀수(유럽에서 찍어서 영국으로 들여오기 위해) 하던 때에 초점을 맞추고, 성서 밀수를 돕는 소년 톰 바튼Tom Barton의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튼 소년은 어릴 때부터 삼촌 잭을 따라 항해를 다닌 터라, 기묘하게 세상 물정에 밝습니다-틴들 목사보다 더. 그러나 그 역시 영역 성서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상황을 잘 깨닫지 못하면서도 이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이야기의 중심이 어쨌든 윌리엄 틴들이라는 '좋은 사람', 진정한 크리스트교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실제로 틴들이 어떤 인품의 소유자였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21세기적 관점으로 바라보기에도 그가 한 일이 별로 나쁘지 않은-일부 특권계층을 제외한 사람에게는 심지어 좋은-것임은 확실합니다. 이 '좋은 사람' 에게 세상이 무슨 짓을 했는가와, 그 사실에 대한 바튼 소년의 반응이 이 소설의 핵심인데, 소년은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다가 마지막에 갑작스레 틴들 목사의 마음을 깨닫고 '어른이 됩니다'-즉, 원수라고 생각했던 틴들의 밀고자를 용서하게 됩니다. 아니, 실은 저 같은 좁은 사람으로써는 '어른이 되다' 정도로도 부족하고 인격자가 되었다고 해야 할 정도의 변화입니다만...윌리엄 틴들 목사가 사라져 간 세상에서 그가 행했을 법한 일을 대신 행하는 것이, 고인에 대한 소년의 사랑의 깊이를 보여 준다고 해야겠지요. 소년에게는 이제 삼촌도 없고 틴들 목사도 없으니, 그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책들이 많은 ABE 전집에서도,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의 어두운 터치는 각별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문학의 힘이란 굉장합니다. 극동의 나라에서 종교적 박해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이 살아온 소녀에게도 신교도 혹은 구교도에게 쫓겨 피신하는 힘든 여행길의 꿈-그러니까 악몽-을 꾸게 합니다!) 원래 아이에게 친절할 의도가 없이 씌어진 책들만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ABE 전집의 책들인데, 그 책의 작가들 중에서도 스코트 오델은 각별히 '너 사실 애 싫어하지' 라는 혐의를 받을 것만 같습니다. :]
[검은 진주The Black Pearl]는 오델의 그런 혐의를 더욱 짙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애...라기보다 소년을 싫어한다고 해야 할까요? 한 마디로 '젊은 혈기라고 일이 다 잘 되는 건 아니지' 라는 우울함이 여기도 서려 있습니다. (이 작품은 에이브 전집 27권, 아이반 사우스올Ivan Southall의 [여우굴The Fox Hole]뒤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미친 듯이 꼬이고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 닥쳐오더라도 이 1인칭의 소년들은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어조는, 어쨌든 이 세상은 젊은애들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체념한 꼰대의 목소리입니다.
[검은 진주]의 세계는 [매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보다 한결 우화적이며, '소년이 바다의 군주로부터 훔친 진주가 불행을 불러온다'는 이야기의 줄거리는 동화 그 자체입니다.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이 좀 더 철학적인 이야기일지라도요. 어쩌면 진주를 바치지 않았어도 폭풍은 일지 않았을 지 모릅니다. 어쩌면 진주를 그대로 손에 쥐고 있었더라도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믿음에 관한 것이자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스스로 테두리를 치는 법을 깨닫게 되는 순간 소년은 어른이 됩니다.
Trivia
[검은 진주]는 1999년 [라몬의 바다] 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알라딘 도서 정보를 믿는다면 아직 절판이 아닌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