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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e on My Mind (Prebind)
Garden, Nancy / Bt Bound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두 번의 쓴웃음을 짓게 됩니다. 대한민국에서 90년대 이전에 의무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을 무엇보다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미국의 보수성일 겁니다. 어렸을 때 미국 관련 미디어를 접하면서 그런 당혹스러움을 맛본 적이 없으셨나요? 이러한 혼란은 저 나라가 기본적으로 기독교 국가라는 점 이외에도(호머 심슨도 일단 교회에는 갑니다), 하나로 정의하기에는 인구가 너무 많다든지 나라가 너무 크다든지 하는 데서 유래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혼란은 이 나라가 그 모든 걸 다 쑤셔담고 있기에는 너무 작다는 데서 유래하는 것 같고요.
어쨌든,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도저히 80년대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종류의 갑갑함과 야만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려내는 호모포비아의 면면이 아무리 무지하고 야만적이고 찌질해도 현대 한국의 현실보다는 훨씬 관대하다는 데서 두 번째 쓴웃음을 짓습니다.
이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이 좀 닭살이 돋을 정도로 일반적인 로맨스의 정석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후반의 'inquisition' 이 씁쓸하게 부각됩니다. 명문 사립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인 소녀 라이자Liza와 이탈리아 인 이민자 가정의 소녀 애니Annie의, 운명적이고 문학적이면서 달콤한 러브 스토리거든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는 무려 미술관이고 그 때 애니는 무려 자작곡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건축가 지망생인 것 같지만 실은 몽상가인 라이자는 다소 격한 기질의 소유자에다 예술적인 감성이 풍부하고 역시 몽상가인 애니에게 단숨에 빠져들게 됩니다. 둘의 로맨스는 내내 기사 판타지 혹은 아서 왕 판타지를 동반하며...방과 후의 데이트, 여름에는 바다, 크리스마스에는 서로 '우연히' '매우 비슷한 느낌의' 반지를 선물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게이라니! " 하고 고민하는 종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애니는 물론이고 라이자도, 좀 흔들리기는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좀 지나칠 정도로 침착하고 확고한 자신감을 보여 줍니다. 일단 사랑하기로 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느낌으로, 둘은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그러나 이 바보스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찌질한 악의에 의해 갑자기 냉혹한 현실과 만나게 됩니다. 그 결과 라이자는 '법정보다는 종교재판 같은' 학교 청문회에 서게 돼요.
작가는 이 연인들에게 그렇게 가혹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해피 엔딩이에요. 둘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다시 만나고,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변 캐릭터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이자의 멘토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고, 샐리 자렐Sally Jarrell의 지나치게 교화되고 상처받은 영혼은 아마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오는 데 긴 시간이 걸리겠지요.
이 책은 2007년에 번역되었습니다만, [소녀, 소녀를 사랑하다] 라는 제목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네요. '내 마음의 애니' 라는 말을 중얼거릴 때 드는 작고 절실한 울림과 비교해 보세요. 원서로는, 제가 가진 책은 현재 품절인 것 같고 25주년 기념 페이퍼백이 나와 있는데, 표지가 참 예쁘고 현대적입니다만 제가 갖고 있는 일레인 노먼Elaine Norman이 그린 1992년작 그림의 우울한 표지가 더 마음에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