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철 (사회주의정치연합)
1. 글쓰기에 대하여
1-1. 장기계획으로 한국의 사회주의 정치운동사를 준비하고 있는 나로서는 본격적인 역사를 쓰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글은 1980년대 말부터 기금까지 공개 사회주의 정치운동에 참여한 관찰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느낀 단상을 거칠게 정리하고 문제 제시하는데 그친다. 나로서는 구체적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글이기 때문에 논쟁적일 수 있고 주관적일 수 있지만 역사적 글쓰기의 새로운 보기를 보이고 싶은 모험심도 있다.
(참고 글 : 1. 한국노동당의 ‘신전략’비판 2.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노동자 정치운동:정치조직을 중심으로 3. 사회주의 역사에서 배우자)
1-2.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 “민중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 연합 추진 위원회”, “민중당 창준위”, 민중당, 민중회의, 민중정치연합, 노동자정치연대,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 노동자의힘, 사회주의정치연합(준)에 이르는 15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1-3. 주체적 경험과 느낌 등의 단상으로 표현하면서도 몇 가지 평가 틀을 지닌다. 첫째, 혁명적 사회주의의 사상과 정치노선을 유지했는가의 문제 둘째, 대중투쟁과의 결합을 실현했는가의 문제 셋째, 의회와 선거에 대한 원칙을 견지했는가의 문제 등으로 구분하고 분석한다.
2. 혁명적 사회주의의 사상투쟁으로서의 합법 정치전술 평가
2-1. 70년대 초반 이후 80년대 초반에 걸친 맑스-레닌주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정파의 1세대에 해당된다. 이들은 학생운동을 거쳐 이전한 엘리트 사상집단이며 이들의 사상 이론적 기반은 대체로 맑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이론적 학습의 깊이와 폭은 레닌과 스탈린 저작, 소련에서 간행된 교재, 일본에서 간행된 저술들이었으며 혁명적 맑스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에 대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학습을 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하여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2단계혁명론이 군부파시즘의 암혹한 정세와 맞물리면서 혁명적 정세의 임박함에 긴박되고 고무되고 있기도 했다.
2-2. 이들 세력의 조직노선은 당연히 비합법 전위당 노선이었고 파시즘의 탄압 속에서 더욱 그 노선이 정당화 되었다. 흔히 PD, ND, IL로 표현되는 세 개의 큰 정파가 형성되었고 이들의 노선과 정세인식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어 생략한다. (참고자료 2참조)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주체사상과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전선론에 대한 비판, 그리고 보수야당 추종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특히 87년 대선 당시 독자 후보론의 입장에서 함께 했으며 (물론 CA가 주도하기는 했지만) 그러한 선거연합은 92년까지도 이어진다.
2-3. 87년 이후 선거전술을 넘어선 조직노선으로의 합법정당 건설론은 복합적 요인이 교직되어 나타났다. 첫째,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고 집약된 사회주의 진영의 합법공간으로의 진출의 필요성이라는 공감대의 형성 둘째,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사상적 동요와 혼란, 수정주의, 기회주의의 확산, 혁명의 포기로 인한 합법.개량주의의 합리화, 셋째. 92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정치주의자들의 욕구와 계산 그리고 이에 편승한 패거리 정치, 넷째, 노동운동을 포함한 대중조직의 성장과 발전 등이다.
2-4. 민중당의 창당은 바로 이러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비합법 정파가 개입 또는 적극적 결합을 했고 반군부독재 투쟁세력이 상층(일부 혁신계와 지식인 포함)은 주로 인민노련이, 사무국과 학생위원회는 CA를 포함한 PD정파들로 구성되었다. 중앙위원회는 인민노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 사회주의를 전략으로 포기하고 민중당을 전략당으로(혹은 그롤 준비하기 위한 단계로)인식한 세력이 주도한 당의 생명은 짧았다. (참고자료 1참조) 한국노동당 창당과 탄원서 사건(PT독재와 폭력혁명노선 폐기)이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또한 전술당으로 개입한 세력은 철수하거나 탈당하고 그 일부가 민중회의라는 정치조직을 건설한다.
2-5. 민중당 내에서의 사상투쟁은 주로 강령 건설 과정에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강령위원회는 정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강령작성으로 이어지는데 민중당의 경우는 교수위원회(당에 교수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비상식적이지만 진보적 지식인의 집단적 결합이 지니는 의미 때문에 두게 되었다)가 강령위원회를 구성하고 강령작성을 했다. 교수위원회에 소속되지 않은 교수들(대부분 사민주의자들)은 정책위원회의 자문을 하고 있었다. 민중당 강령은 최대 강령은 아니었지만 이행기 강령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민중민주주의 강령의 틀을 원칙적으로 담아냈다. 강령이 확정되기까지 교수위원회와 정책위원회의 대립이 있었고 학생위원회는 원칙적으로 교수위원회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참고자료, “개혁사회주의에 대한 환상과 회의와 좌절을 넘어서서” 참조) 민중민주주의를 민중주체의 민주주의로 수정하는 웃지 못 할 결과가 민중당 상집에서 있었고 실제로 민중당 강령은 사문화 되었다.
2-6. 민중당과 한국노동당의 합당, 통합민중당, 그리고 소멸은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경과하면서 양분화 되고 사회민주주의를 전략당으로 표현하려는 세력과 합법정치전술로서 지속적으로 구사하려는 세력으로 구분되었다. 이념적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사민주의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합법.개량주의 반대 투쟁 전선으로 구획되었다.
2-7. 그 이후 제파와 사노맹 모두 조직사건으로 탄압받다 해체되었다. 민중회의 시절 사노맹과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사노맹은 합법정치부대로 사회당(추)을 만들었고 1992년 대선 이후 민중회의와 통합하여 민중정치연합을 만든다. 제파는 전국노련으로 편입되거나 한노정련으로 진로를 잡는다. 그리고 대중조직의 활동가로 분산된다. 이 시기의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의 투쟁의 중심은 사상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보듯이 수정주의와의 투쟁이 가장 중요한 투쟁이다. 노동계급에 부르죠아 사상이 침투한 것이 수정주의, 특히 사민주의이며 우리 사회의 대중운동의 투쟁과 역행하는 청산주의적 합법개량주의 세력과 투쟁하는 것, 즉 맑스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복원시키고 세워내는 것이었다. 반합법정치조직으로 존재하고 있는 조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상을 보위하고 선전-선동하려는 과정의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대신 “근본변혁”이라는 용어가 대체되었고 당 건설 투쟁은 장기적 과제로 미루어졌다.
2-8. 92년 대선은 위와 같은 정세에 놓여 있었다. 하나는 ‘사회주의는 망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는 계급대중의 패배주의나 일반대중의 우경화의 이데올로기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선전 선동할 수 있는 공간을 얻어내고 그것을 당면한 대중투쟁과 결합시킬 수 있다는 계기로서 대통령선거였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강령을 구체화된 선거강령으로 만들고 투쟁하는 것이었고 92년 백선본 강령은 90년 민중당 강령의 연장선에 있었다. 조직사건의 검찰 기소문을 보면 92년 선거강령을 주로 언급하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또 하나는 선거투쟁의 공동투쟁을 기반으로 흩어져있는 사회주의 세력을 연대.통합하는 성과를 남겨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진정추(인민노련)는 통합에 응하지 않고 민중회의와 사회당(추)가 통합하여 1993년 민중정치연합을 결성한다. 전국노련(제파)의 경우 대중운동으로의 산개와 이론연구운동의로의 우회로뿐만 아니라 경제주의적 성향이 강한 특성 때문에 사회주의정치운동세력과 함께 할 수 없었다.
2-9. 사노맹이 해체되고 약화되면서 민정련은 당 건설 경로를 둘러싼 노선대립(민중연대안과 정치연합안)으로 분화되고 진정추와 사회당계열이 통합되는 진보정치연합으로, 민중회의 계열이 노동정치연대로, 그리고 계급해방그룹이 노진추(노진추는 단지 인민노련의 탄원서 사건만을 문제 삼았다)로 분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회당 계열이 기존의 사노맹 노선과 달리 전략수정을 하고 전략으로서의 합법당으로 선회한 것이고 노진추 역시 그와 유사한 입장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이 세력은 민주노동당내에서 사민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민중회의의 일부였던 청년그룹은 청년조직을 만들고 그 후 청년진보당 그리고 사회당을 만든다.
2-10. 각 정치세력은 각개 약진하면서 세력보존과 확장을 한다. 96-97 총파업의 공동투쟁전선이 복구되면서 사회주의 세력은 연대 틀을 형성하고 또 한번 정치연합을 모색한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가 그것이다. 정치연대는 테제 형식을 빌려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는 입장을 정리하였지만 임박한 대선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합법개량주의, 사민주의 세력은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국민승리21을 결성하였고 일부 민족주의세력 역시 합법정당전술에 입각하여 사민주의 세력과 연대하고 있고 노동자 민중진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정치연대 운영위원회는 다수가 대선 불참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선대본 출범하기 몇 일전 정치연대 대표였던 나는 선거 참여조건을 직접 작성하여 권영길 대표와 담판을 하게 된다. (중도 후보 사퇴 불가, 대중투쟁과 함께하는 선거투쟁, 계급적 관점의 견지 등) 공개된 합의문을 놓고 정치연대는 선거참여를 결정하게 되고 일부가 정치연대를 탈퇴하고 청년진보당을 창당하게 된다.
2-11. 합의문의 이행여부를 놓고 (선거강령 내부 투쟁, 종이정당 사건,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 등) 선대본 내에 문제제기를 하고 나는 선대본 공동대표를 사임하게 되고 강령위원회에서 철수, 서울 선대본을 중심으로 한 내부투쟁(일어나라 코리아 포스터 철거 등)을 한다. 정치연대의 사후 평가에서 선거참여 결정이 문제가 있었음을 결론짓게 된다. 96-97 노동계급의 정차파업의 성과를 그대로 개량주의 세력에게 넘길 수 없다는 판단, 대선 이후 사회주의세력의 조직 건설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판단 등이 참여 결정의 근거가 되었지만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할 사건이었다.
2-12. 정치연대의 후신인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새정조)에서의 논쟁은 이념 논쟁이 아니라 조직노선을 둘러싼 쟁점이었다. 민주노동당의 결성과정에 좌파블럭으로 개입하자는 견해(노동조합, 현장 그리고 노진추 등)과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의 독자적 정치조직화를 주장하는 견해가 대립되었고 노진추 그룹이 탈퇴하고 좌파블럭론이 안을 철회함으로서 노동자의힘(준)이 결성되었다. 새로운 정치조직의 이념과 상이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이념 논쟁은 이때부터 본격화 될 수밖에 없다. 쌩디칼리즘이나 무정부주의, 사민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가 혼합된 정치운동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계급정당 건설을 말하기보다 이념논쟁을 선행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희화화되어 버렸고 혁명적 맑스주의,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공동담론으로 소통하고 연대하고 단결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정치신문의 형태로 세력을 표현하고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은 이념적 소통, 혁명적 정치조직과 혁명적 대중조직의 건설을 위한 연대에 적극 나서야 한다. (참고 : [전진]기본노선, 사민주의의 좌익적 언사)
3.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대중투쟁과 선거 투쟁 평가
3-1. 10년 주기의 공황으로 볼 때 1987년, 1997년, 2007년 전후의 주기를 들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호황에는 대중투쟁의 소강상태로 불황에는 대중투쟁의 고양으로 표현된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대통령 선거와 맞물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87년 7, 8, 9노동자 투쟁, 96-97정치총파업은 우리 노동운동의 질적 양적 발전을 이룩하는 결절점이기도 하다.
3-2.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관철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확장되었지만 노태우 정권에 시작되어 김영삼 정권에서 그 기반을 구축하고 김대중 정권에서 본격화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을 볼 때 자본과 자본가 권력의 노동운동에 대한 전략 전술이 한국사회에서는 압축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사 파시즘 아래에서 억압, 착취당했던 노동계급이 어용의 굴레를 벗고 생산의 주체로 올라오는 대중투쟁의 시기,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의 시기 10년, 정치총파업을 통하여(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정치의 주채로 나서는 8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아마도 2007년쯤에는 역사의 주체, 혁명의 주체로 도약하는 계기를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3-3. 그러나 이러한 성장, 발전기도 불구하고 개량주의화 관료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경향도 함께 보이고 있다. 1991년 전노협이 내세웠던 깃발인 평등세상건설과 노동해방은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 퇴색하고 사무.전문직 노동운동의 개량주의에 묻혀버렸고 총연맹과 연맹, 그리고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관료주의의 만연은 조직 형식주의에 매몰되어 혁명성, 계급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노동자정치운동의 개량주의와 맞물리면서 노사협조주의와 교섭주의로 변질되고 있다.
3-4. 사회주의정치세력이 지금까지 대중투쟁의 정치적 지도부의 역할을 할 만큼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부분적 개입과 상층 및 현장에서의 부분적 영향력밖에 행사하지 못하였다. 또한 선거와 맞물리는 상황에서는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의 결합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결국 선거주의에 빠지는 과오를 범하였다.
3-5. 합법정치전술로 민중당을 규정한 세력과 전략당으로 규정한 인민노련의 경우를 보기로 들어보자. 91년 강경대 열사 투쟁이 고양될 때 보수야당(김대중과 김영삼)은 지자체 선거가 있자 투쟁본부에서 이탈하였고 민중당 역시 선거 참여를 결정하면서 대중투쟁을 방기하였다. 나는 유일하게 선거 보이콧을 주장하였고 결국 민중당을 탈당하였다. 92년 5월 총선에서 보여준 민중당 후보의 모습은 보수야당의 선거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6. 96-97 노동법, 안기부법저지범대위가 광범위하게 구성되기 전까지 민중운동탄압범대위가 존재했을 뿐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연대.단결하여 대중투쟁에 결합하여 투쟁을 성공으로 이끈 예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쟁의 주체인 노조와 그 상급단체인 총연맹인 민주노총의 주도권 하에서 대우자동차투쟁, 삼호중공업투쟁 등 몇몇 사회주의 세력의 적극적 개입의 성과를 보여준 투쟁이 있었으나 역시 부분적 성과에 지나지 않았다.
3-7. 사회주의 세력의 정치적 지도력의 결여는 혁명사상 이념의 불철저성(사민주의 세력 등)에도 기인하지만 정파이기주의와 가족주의로 인한 사회주의연대의 분절성도 큰 원인중의 하나이다. 대중조직이 정치운동을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대중조직을 장악하려는 선거주의(조합권력이 되었건, 현장권력이 되었건, 중앙권력이 되었건 간에)가 판을 치고 (지금까지의 총연맹 위원장 선거에서의 연합전술, 특히 이번 금속 선거에서의 3차 연합전술) 총파업 투쟁에서의 비공식적 개입과 결과에 대한 무책임 등은 그를 주도한 특정 정치조직의 책임이며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의 신뢰를 깨뜨리는 작풍이었다.
3-8. 최근 사회적 합의주의 노사정 담합 분쇄를 위한 전국 노동자투쟁위원회(전노투)의 결성은 여전히 참여세력에 대한 불신, 공동투쟁체에 대한 상과 성격에 대한 견해 차이, 주도권 다툼 등의 갈등적 요인이 있기는 하나 모처럼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연대하여 일상적 대중투쟁을 촉진시키고 책임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사상.실천적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세력 사이의 노선투쟁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 오류에 대한 반성을 근거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상설적인 공투체를 지역 중심으로 건설하고 투쟁하는 업종(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현장투쟁위원회를 만들어간다면 산별과 연맹에만 목을 매는 관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3-8. 선거와 의회를 통한 집권전략을 가지고 있는 사민주의세력(민주노동당 등)을 제외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은 합법정치전술로서의 합법당의 필요성(혁명정당건설 이전에)을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부르주아선거에도 사회주의자 연대를 통하여 전술을 공동 결정해야 한다. 92년 사회주의 사상투쟁의 교두보 구축의 방어적 투쟁은 사회주의 세력의 불안정한 통합,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확대로 유실되면서 97년 양날개론으로 더욱 강화된다. 민주노총을 등에 업는 민주노동당의 출범은 민족주의 세력과도 연합하면서 사회주의 세력은 고립화된다. 97년 대선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전망을 가지지 못한 채 몇 가지 선거투쟁을 조건으로 권영길 선본에의 결합은 96-97 정치파업의 성과를 기반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 진영의 오류였다.
3-10. IMF관리체계를 경과하면서 주기적 공황에 접어들고 신자유주의 압살에 변혁적 노동운동이 압살당하고 개량주의와 관료주의가 만연되면서 맞게 된 2002년 대선에서 사회주의 진영은 결정적 과오를 범하게 된다. 99년 이후 최대의 정파로 성장한 노동자의힘은 계급정당건설을 목표로 내걸었으나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확고한 강령과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면서 민주노동당을 전술적 개입으로 판단하는 이중 잣대를 보이고 있으며 운동내부의 선거정치에서 중앙파와 국민파와 끊임없이 연합하려는 기회주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기반위에서 2002년 대선 공투본 전술과 경선 전술을 채택하였다. 이 전술은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당 건설이라는 전략이 전제되지 않은 전술이라는 점 둘째, 사회주의 진영의 광범위한 논의와 소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셋째,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사민주의, 민족주의 세력과의 공동선거 투쟁에 대한 환상과 그에 기반한 지분을 구축하려는 대중추수적 노선이 착종되어 있었다는 점 넷째, 그 지분을 기반으로 2004년 총선에 연합하려는 욕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결국 실패하였다. 사회당의 경우 87년부터의 민중후보전술에 집착함으로서 당 건설 보다는 합법적 선거주의와 의회주의에의 편향, 사회주의의 상업적 대중화, 노동계급운동의 부문운동화 등이 작용하여 노동자의힘과 합의가 무산되자 사회주의정치연합(준)과의 합의를 깨뜨리고 독자 대응함으로서 역시 실패하였고 왜소화 되었다.
3-11. 돌이켜보면 가장 강조해야할 사상투쟁과 선전 선동을 소홀히 하고 그 혁명 사상을 담지 할 조직건설(당)에 대한 확고한 전망과 실천을 게을리 한 채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거부하면서 가족주의와 종파주의에 매몰되어 대중운동과 정치운동의 선거주의에 기회주의적으로 편승하는 근본적 오류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계획과 사업이 부르조아 선거일정에 맞추어 역산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보기이다. 글과 말은 현란한 혁명적 언사를 구사해도 몸으로의 실천은 중도주의적 활동에 그치는 모습이 지금까지의 사회주의 공개운동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3-12.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복원을 위한 연대와 소통이 노선투쟁과 토론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혁명적 대중투쟁이 끊임없이 고양되도록 하는 혁명적 대중조직과 현장조직의 건설, 그리고 일상적 투쟁을 담지 할 투쟁체 건설이 선행되면서 혁명정당 건설의 상과 성격 및 경로를 결정하고 그에 따른 투쟁전술, 선거전술을 세우는 것이 순서이며 이것이 사회주의정치운동 15년의 결산이다. 과거의 과오를 반성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힘차게 연대단결하는 운동이 펼쳐지지 않는 한 어느 한 세력과 정파의 행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