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유형지에서 외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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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터다이크는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4장에서 이 책에 실린 카프카의 세 단편들 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최초의 고민, 단식 수도자 을 다룬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무슨 책을 읽어도 카프카는 나온다. 난 왜 카프카를 이제야 읽나 후회할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읽었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제라도 읽는 것이 맞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도 편하다. 그래도 15년만 일찍 카프카 읽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1917)

유럽인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빨간 페터가 자신이 원숭이였던 시절을 학술원에 보고한 글이다. 아프리카 골드코스트(가나)에서 총 두 발을 맞고 포획된 원숭이가 좁은 우리에 실려 배를 타고 유럽으로 실려오던 중에 순차적으로 배우게 된 인간 흉내 악수, 침뱉기, 파이프 담배, 코르크를 따서 브랜디를 마시고 병 던져 버리기 의 학습과정을 회상한다. 그의 인간모방 학습은 오직 우리로부터의 출구(the way out of the cage)를 찾기 위함이었는데, 이 출구는 탈출도 아니고 자유도 아니다. 탈출은 자살행위로 여겨졌고, 인간이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로 여기며 동경하는 자유를 그는 이미 느꼈지만 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유는 유럽에 도착한 후 그가 있던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를 타던 곡예사 인간들이 추구했던 것이다(212-213). 그리 적대적이지 않은 선원들을 관찰하면서 내적인 안정을 얻게 된 빨간 페터는 살려면 출구를 찾아내야 했고, 그 출구를 사람 흉내에서 찾았다. 그는 결국 사람들이 가르치지 않은 사람의 말까지 함으로써 우리에서 나오게 된다. 그 이후 그는 노력 끝에 새로운 창살에 불과한 동물원이 아니라 곡마단(서커스단)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으로부터 도망쳐 밖으로 뛰어나갔다”(219). 많은 선생들이 그를 가르쳤고, 피나는 노력 끝에 빨간 페터는 유럽인 평균 교양 수준에 도달한다.” 이는 자유를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단지 출구였을 뿐이다. 그는 이제 밤에는 공연을 하고, 매니저를 대동하며, 숙소에 오면 훈련 중인 여자 침팬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가 바란 것은 오직 지식을 넓히는 일이었고, 그 목표에 도달했다.

 

최초의 고민 (1922)

공중곡예사는 언제나 서커스장 천장에 매달려 완전한 기술을 획득할 목적으로 끊임없이 수련한다. 순회공연은 그에게 고역이고, 흥행주는 이런 그를 경주용 자동차에 태워 초고속으로 이동시키거나, 기차 한 칸을 통째로 그에게 배정하여 그 칸에 서커스장처럼 그물을 쳐준다. 기차 안에서 곡예사는 흥행주에게 눈물을 흘리며 부탁한다. 앞으로는 그네 두 개를 써야 하겠다고. 흥행주는 그러마고 약속을 하고 전보를 보내 그네를 하나 더 만들기로 하고 곡예사를 진정시킨다.

 

단식 수도자 (1923)

단식공연이 잘 나갔을 때, 단식 수도자는 온 마을의 관심을 받았다. 감시자가 혹시 그가 무언가를 먹지 않나 불철주야 감시했으며, 단식이 끝나면 관중들의 경탄 속에서 귀부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수련을 마쳐야 했다. 수도자는 단식을 계속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40일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단식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 못 마땅했지만 단식은 늘 40일만에 환호 속에 끝났다.


시간이 흘러 단식공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식어버렸지만, 다른 일을 찾을 수 없었던 단식 수도자는 흥행주와 헤어져 곡마단에 고용되어 공연 지속을 도모한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당최 단식 공연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가 있는 우리는 단지 마구간으로 가는 통로의 방해물신세로 전락한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수도자는 혼자만의 단식을 40일을 훌쩍 넘겨 진행하면서 자신만의 기록을 계속 갱신하다 밝견된다. 그를 발견한 감독이 그에게 왜 다른 일을 못하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단식을 하는 이유는 단지 맛있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긴 그는 "치워졌으며", 그 우리에는 표범이 새로 들어온다. 표범에게는 계속 먹이가 주어졌고, 사람들은 그 우리에 몰려들었다.

 

아스케시스: 자기에 대한 작업

슬로터다이크는 위의 세 단편들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밧줄을 타다 떨어져 죽은 곡예사 이야기와 연결시킨다. 슬로터다이크는 릴케처럼 카프카도 니체의 관점을 내재화하였다고 본다. 곡예사가 타던 밧줄과 카프카 단편의 주인공들의 삶은 모두 내재성에서 초월성으로의 이행을 형상화한 것이라며, 곡예주의(acrobatism)에 초점을 맞춘다. 세 단편에 대한 슬로터다이크의 해석은 일반적 독자의 시각보다 약간 더 심오하다.

 

그는 <학술원 보고>에서는 빨간 페터의 자발적 스토아주의에 초점을 맞춘다. <최초의 고민>의 공중곡예사는 세속세계와 단절하고자 하는 종교적 은둔의 패러디로 보면서, ‘예술가와 시민이라는 이중적 삶이 초래하는 긴장을 예술가의 삶에 집중함으로써 해소/회피하고자 하는 곡예사는 늘 그 수준을 높이려는 향상에 대한 압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처세에 능한 예술가는 진정한 예술인이 아니며, 이것이 일상이 되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는 사라진다. 이 점은 <단식 수도자>에서도 관찰되는데, 이들의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완수할 수 있는 것으로 상상한다. 슬로터다이크는 단식은 고전적 자기수련에서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자기수련 그 자체로서 능동적인 결핍 체험인데, 음식의 결핍은 보다 고귀한 것, 곧 신이나 깨달음에 대해 갈망하는 자들이 극복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냥 지나쳤지만 슬로터다이크는 반전을 지적하는데, 단식술사가 단식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지 입맛(taste) 때문였다는 것이다. 그는 맛있는 것이 없었고, 따라서 먹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에 굶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헐... 맥빠진다. 그런데 슬로터다이크는 이 영양섭취 거절을 나를 만지지 말라”(요한, 20: 17)보다 더 심오한 내 안에 넣지 말라(don’t enter me)” 또는 나를 꽉 채우지 말라(don’t stuff me full)”로 해석한다. 단식공연의 인기 소멸은 이제 부족한 것이 없는 시대의 도래에서 기원하며, 이는 신의 죽음과 동의어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카프카의 세 단편들을 신의 죽음 이후에 행해지는 참수당한 자기수련(beheaded asceticism)”의 모습으로 해석해낸다. 머리없는 토르소의 자기수련. 토르소를 보는 자는 토르소의 우월한 근육질 몸이 자신의 열등한 지방질 몸을 보고 있음을 느낀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뒤바뀐다. 토르소를 보던 자는 이제 토르소가 보는 자, 토르소의 시선을 느끼는 자로 바뀐다. 그는 위에서 하는 명령을 느끼게 되고, 이 수직적 긴장이 차라투스트라의 외줄타기 곡예사와 카프카의 세 단편의 주인공들로 하여금 출구와 향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했다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수직적 명령였다는 것이다. 우월한 것이 열등한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과 그 명령을 내재화하여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 이것이 아스케시스의 멘탈리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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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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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끝자락, 나는 비가 참 많이 오던 제주에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었다(https://blog.aladin.co.kr/eroica/12900997). 처음 읽는 해러웨이였고, 문제투성이 번역과 겹쳐 무척 힘든 책읽기 경험였다.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재미있었고, 해러웨이에게 매료되었다. 그 때의 경험이 예방주사였을까? 결코 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난 이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고, 그녀에게 설득되었다. 이 책은 상이한 시점에 작성된 세 글 사이보그 선언”(1985), “반려종 선언”(2003), 그리고 캐리 울프와의 대담(2014) - 로 구성되어 있고, 트러블과 함께하기와 함께 2016년에 출판되었다.

 

리뷰를 쓰면서 몇 번을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일단 해러웨이가 명확하게(manifestly) 드러나도록 서술하려면 그녀의 지적 정체성(identity)을 실정적으로(positively) 재현할 수 있어야 할텐데, 이는 생물학(리처드 르원틴, 린 마굴리스, 에벌린 허친슨, 그레고리 베이트슨), 페미니즘(첼라 샌도벌, 케이티 킹,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 모니크 위티그 등), 정치경제학(리처드 고든), SF(오드리 로드, 어슐러 르귄, 옥타비아 버틀러), 부정신학, 인류학(애나 칭, 매릴린 스트래선), 철학(화이트헤드, 푸코, 에스포지토, 데리다), 카톨릭 코스모폴리틱스라는 실천과 결부된 과학철학(라투르, 스텡거스), 그리고 반려견 훈련에 대한 저작들까지 해러웨이가 섭렵한 지식들을 어느 정도 안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해러웨이 말고 누가 그럴 수 있을까? 또 세계를 진행 중인 세계(the world ongoing; worlding)로 바라보면서 불변의 동일성을 지닌 고정된 것으로 보기를 거부하는 해러웨이에게 어떤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가? 바람직한가? 잠정적으로는 가능하고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178, 327-333)은 어떤 현재진행형의 넘침(ongoing exceedingness)”이라는 양태에서 기인하는 무한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부정적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지만, 해러웨이는 유한한 필멸의 존재이다. 우리 같은. 그러나 우리와 다른 엄청 똑똑하고 해박한 인간이면서도 그 도저한 사유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겸손함을 갖고 있는 SF 리얼리스트이다. 그녀만큼 똑똑하지 않다면, 적어도 그녀만큼은, 아니 그녀보다 훨씬 더 겸손하기라도 해야 한다. 정성들여 읽었는데, 미래의 나를 위해 쓰자.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의 어떤 희망을 위해.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던 때 내가 1년도 채 못 되어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설득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과거는 현재 속에서 되살아난다. 어쩌면 미래에도.

 

1. 사이보그 선언 (1985)

1985년에 쓰여진 글이니 소비에트 연방이 아직 망하기 전이다. 두 해 전인 1983년 레이건 정부는 스타워즈 계획을 발표하였고 <스타워즈: 제다이의 귀환>이 큰 히트를 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이 첫 선언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자의 진지한 신성모독, 곧 이의제기이다. 무엇에 대한? 직접적으로는 맑스주의/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 “여성의 본질적 통일성은 없으니까!(30, 38) 그런 것을 말하는 우리백인 페미니스트의 여성범주가 순수하고 결백한 것이 아니니까(36). “소외이건 성적 대상화건 핵심 기제를 추상적으로 특권화하여 총체화시킴으로써 (인종처럼) 다른 중요한 적대의 문제에 침묵하니까(41). 또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비판대상과 거울 이미지이기 때문에! 비판대상이란? 맑스주의/정신분석학을 포함하여 총체성을 전제하는 전체론(holism)!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는데? 현재를 원죄 이전의 태초라는 과거와 묵시론적 종말이라는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으로 가정하고, 이 역사(History)의 전개는 세계의 총체성의 발원이자 귀결인 모순(contradiction)에 의해 작동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의 추동자로 자기동일성/정체성(identity)을 지닌 주체(Subject)를 상정하기 때문에! 이 주류 페미니즘들이 가정하는 여성 주체는,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해도, 그 하나의 주체로 동화불가능한 여러 목소리를 지닌(polyvocal) 여성들의 근본적 차이를 삭제해 버리기 때문에(40)! 이렇게 정리하고 만다면, 사이보그 선언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소위 포스트모던사상의 맑스주의에 대한 배교행위와 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선언의 뛰어난 점은 그 와중에 세계의 모습을 다시 그려내고, 가능한 실천양식들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진지하고 겸손하게, 냉소하지 않으며.

 

해러웨이가 보기에 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본원적 통일성을 가정하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에 의해 본의 아니게 오염되어 있다. 스타워즈 상황에서 탄생한 사이보그는 총체성이 아니라 부분성, 모순이 아니라 아이러니,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라 혼종성(결연과 연대), 전체론이 아니라 부분적 연결, 전위정당이 아니라 통일전선의 정치를 추구한다(20-22, 31). 사이보그는 아이러니를 통해 전자가 가정하고 있는 이원론적 경계를 붕괴시킨다. 1) 인간과 동물, 곧 문화와 자연의 경계, 2)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 3)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견고했던 경계는 이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사이보그 앞에서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23-26). 하이브리디즘의 이원론 비판이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보다 앞서 이 <사이보그 선언>에서 선보인다. 라투르보다 훨씬 더 역사적이고, 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난 라투르보다 해러웨이가 더 좋다.

 

새로운 산업 혁명의 신기술은 사이보그뿐 아니라, (당연히 여성이 포함된) 세계 노동계급을 재형성하며(53), 해러웨이는 이를 가사경제(homework economy)와 연동시켜 자본주의의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에 조응하는 가족 형태, 젠더, 페미니즘의 이념형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56-57).

 

<> 해러웨이의 역사 구분

자본주의 단계

지배양식

미학

가족 형태

젠더 / 페미니즘

상업/초기산업 자본주의

민족주의

리얼리즘

가부장제적 핵가족

19세기 앵글로-아메리칸 부르주아 페미니즘

독점 자본주의

제국주의

모더니즘

근대 가족

-페미니즘적 이성애주의의 만개

다국적 자본주의

다국적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가사경제의 가족

여성 가장 가정, 페미니즘의 다양화, 젠더의 강화와 붕괴


해러웨이가 수용하는 가사경제라는 시대 진단은 빈곤의 여성화(55), 3세계 여성 노동자의 증가(56), 구조적 실업(57), 기아(58), 민영화(58), 여성 과학기술자의 증가(61) 현상들과 연결되어 새로운 네트워킹, 집적 회로 속의 여성들로 표상된다. 그녀는 가정, 시장, 직장, 국가, 학교, 병원, 교회 등 여러 구분되는 영역을 관통하는 통합된 여성의 정체성 또는 가부장제의 총체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한다(63-68). 만약 그것을 꿈꾸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그/녀 역시 전체론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페미니즘의 언어가 여성 정체성/동일성 확립, 전위당, 순수성, 어머니라는 표상에 집착한다면, 진짜 삶을 살고자 하는 여성들을 타자화하게 된다. 마치 인간(남성)주의적 신화가 여성, 유색인, 자연, 노동자, 동물을 타자화하였듯(76).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집착, 곧 하나(One)가 되고자 함은 자율성을 갖는 것, 힘을 갖는 것, 다시 말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나가 아니라 타자(the other)가 되라고 말한다(77). 곧 다양해지라고, 변치 않는 경계를 꿈꾸지 말라고, 너의 실체를 고집하지 말라고, 물렁물렁해지라고! 젠더는 보편적 정체성이 아닐 수도 있다고(84).

 

해러웨이는 여신이 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무의식을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말한다. 여신이 되기보다는 사이보그가 되라고. 총체화하지 말라고. 경계를 구성하되 다시 해체하라고. 기술을 악마화하지 말라고.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우리를 이루는 부분 모두와 소통하면서 일상의 경계를 재구성하라고. 공통언어로 말해지는 단결투쟁의 한 목소리가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각자의 언어로 터져나오는 이종언어(heteroglossia)를 꿈꾸라고. 이것이 그녀가 발휘하는 페미니스트 방언의 상상력이다(86).

 

2. 반려종 선언 (2003)

<사이보그 선언>의 이면에는 분노가 깔려 있다면, <반려종 선언>에는 사랑이 깔려 있다(271). 전자가 기술과학(technoscience) 속에서 타자(여성)의 타자들(유색인 여성)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들과의 부분적 연결 가능성을 모색했다면, 후자는 자연문화(natureculture) 안에서 함께 살과 침을 섞으며 면역을 갖추고,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어 공진화해나가는 이종간의 러브 스토리이다(“지저분한 발달성 감염”, 117). 트러블과 함께 하기를 읽으면서도 느낀 건데, 해러웨이 할머니는 음란마귀 농담을 좋아하신다. <반려종 선언>의 시작과 끝은 소프트 포르노로 되어 있다. <건축학개론>에서 납득이가 잘 설명했던 뽀뽀가 아닌 키스로 시작해서 15금 영화 수준에서는 최고로 찐한 러브씬으로 끝난다. 엄청 똑똑한 할머니가 하는 음란농담 - “생명력 넘치는 존재론적 안무”, “메타플라즘”- 은 너무 지적이어서 전혀 야하지 않다.

 

글의 구성은 참 어지러운데, 그 와중에도 일관된 스토리가 제시된다. <반려종 선언>은 로마 숫자가 붙은 다섯 개의 절 - 자연문화의 창발, 진화 이야기, 사랑 이야기, 훈련 이야기, 품종 이야기 로 구성되어 있는데, 해러웨이 자신의 메모라 할 수 있는 스포츠 기자 딸의 기록이 군데군데 네 번 삽입되고, 편지들도 끼어든다. (, 진짜 정리하기 힘들다. 한줄한줄 읽을 때에는 어떤 영감들이 떠오르는 듯했는데, 정리하자니 참 난감하다. 그래도 해야지.)

 

I) 자연문화의 창발

동거하는 인간과 개 간의 반려관계는 서로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 곧 소중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이라는 종()횡단적 사회성을 형성하고, 더 긴 시간 스케일에서는 양자의 공진화를 가능케 한다(121). 실재(reality)를 역동적 과정, 곧 능동태 동사로 보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요약되는데, 이것이 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이 공유하고 있는 헤겔-마르크스 계보의 총체성 가정에 대한 비판의 이론적 근거이자, 또한 최근에 해러웨이가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개념화한 촉수사유의 전제로 보인다(124-125). 존재는 관계맺기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123). 이질적인 존재 간의 관계맺음, 곧 어떤 우연한 기초위에서 맺는 부분적 연결에서 출현(창발)하는 새로운 의미들은 상대방을 자신에게 의미를 갖는 소중한 타자로 만들고 자신을 변화시키며 서로를 공구성한다(125-126, 130).

 

관계를 맺는 반려들은 살/육신(flesh)을 갖고 있는 존재이지만, 이들을 서로에게 의미(significance)를 갖는 소중한(significant) 타자로 묶는 매개체는 말(word)과 같은 기호(sign)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물질적(material)·신체적(corporeal/physical)일 뿐만 아니라, 기호학적(semiotic)이다. 해러웨이는 개인적 출신배경 아버지가 스포츠신문 기자인 가톨릭 집안 이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기호와 육신, 이야기와 사실”(138)은 언제나 함께 묶여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이 둘은 근대적 과학이 이질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절연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미사 중에 이 빵은 나의 몸이라는 신부의 이 밀떡을 성()로 변화시키는 신비(化體說, transsubstantiation)를 믿으며, 마감시간을 앞두고 야구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다음날 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로 만들어내야 하는 아버지를 보아온 도나에게 둘은 분리불가능한 것이다(Cf. 345). 심지어 그녀가 자리잡은 또 다른 구체적 상황인 과학의 영역에서도 이야기(story)가 필연적이었음을 주장한다. 이제 육신과 기표, 몸과 말, 이야기와 세계, 이 모두가 자연문화 속에서 결합된다”(141-142). 이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II절부터 V절까지의 제목에 이야기(stories)”가 붙는 이유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몸, 관계, 세계, 만약 그런 것들이 있다한들 기호로 바뀌어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곧 이야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전하지 않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의 의아함 팩트와 픽션의 분리불가능성 을 상당히 해소할 수 있었다.

 

II) 진화 이야기

최초의 가축인 개가 어떻게 종 간 사회화(152)를 통해 인간과 공진화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개 길들이기는 일방적 과정이 아니라 상호적 과정이며, 인간과 개뿐만 아니라, 그들과 다른 생물체의 몸을 왔다갔다 하며 양자의 면역체계를 상호구성하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까지 행위자로 참여하는 자연사이다.

 

III) 사랑 이야기

개에게 무조건적 사랑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고, 반려견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이 해러웨이는 좀 못 마땅하다. 사람을 공격한 적이 있는 개는 죽여야 하고, 그래야만 개와 인간은 서로에게 책임/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갖고 함께 살 수 있다. 사람은 개에 대해 사랑의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되며, 개는 맡은 일을 해야 한다(164).

 

IV) 훈련 이야기

도나, 마르코(도나의 대자), 카옌(도나의 반려견이자 마르코의 대견)은 함께 훈련하는 킨(kin) 집단이다. 이들 간에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은 결코 평등이 아니고 소중한 타자성인데 그것은 그들이 함께 추는 춤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168). 훈련하는 개는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사이보그 트럭이 아니고, 조련자는 개에게 사부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개와의 놀이를 진정 즐기지 않는다면 개 역시 눈치를 채고 만다는 것이다. 이종 간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넘어 소통하는 것, 이 상황 속의 부분적 연결에 적합한 이름은 존중”(177)이며, 그 존중이 타자를 의미를 지닌 존재, 곧 소중한 타자로 만든다(179). 인간과 개의 대화에서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다른 기호가 필요하다는 통찰이 나오는데, (dog)와 신(God)으로 말장난하는 부분은 재미있다(177).

 

V) 품종 이야기

시간스케일의 중층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해러웨이의 독특한 시간관이 드러나는 절이라 할 수 있다(193, 235). (1) 지구와 자연의 시간대인 가장 긴 진화적(evolutionary) 시간 스케일, (2) 대면 관계를 맺는 타자들과 의미를 생산하는 가장 짧은 개인적(personal) 시간 스케일, 그리고 (3) 그 중간의 역사적(historical) 시간 스케일. 이 서로 다른 스케일을 지닌 시간의 층들이 바로 우리의 "두터운 현재(thick now)"를 이룬다(277).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영원한 현재가 없듯, 영원한 과거도 없다. 여기에서 해러웨이는 앞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역사적 시간 스케일을 두 가지 견종의 역사에 대한 신화와 추정되는 실제(?) 역사를 상상력을 동원해 함께 실뜨기해낸다. [역자는 scale"척도"로 번역하였는데, 독자들이 그것을 시간의 다층성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스케일"로 그냥 음차하든가, 정 번역하고 싶었다면 "규모"로 직역하거나, "길이"로 의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이 시간의 다층성을 이해하면, 트러블과 함께하기에 나오는 "툴루세" 이야기를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세/자본세/툴루세 이야기는 캐리 울프와 함께한 반려자들의 대화에서 소개되고 있다(292-299, 363-366).

 

3. 반려자들의 대화

독자 겸손하게 만드는 나쁜 인터뷰다. 앞에 실린 두 선언에 대한 친절한 해설을 기대하고 읽은 독자라면 당황할 법하다. 이 책은 2016트러블과 함께하기와 같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2014년에 이뤄진 해러웨이와 울프의 이 대화는 두 선언의 연관성보다는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배경 소개 차원에서 두 선언이 다뤄진다. 따라서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으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부분은 활자들일 뿐, 기호로서 다가가기 힘들다. 또 영문과 교수인 울프가 데리다를 너무 좋아해서인지, 데리다 문외한인 나는 바보스러움을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긴 문외한인 것이 데리다뿐이랴.

 

하지만 해러웨이는 그런 독자에게도 좋은 개념을 제시해주었다. “상황적 지식부분적 연결이라는. 내 상황에서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들과 부분적으로라도 연결이 된다면, 곧 나의 어떤 맥락 안으로 이 지식을 자리매김해서, 이후의 공부 계획에 영향을 끼친다면 좋은 책이다. 부분적 연결은 또 다른 부분과 연결이 되고, 나와 다른 상황을 알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일반화로, 어떤 총체성 부여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처음 읽었을 때의 황당함에 비하면, 나는 해러웨이와 더 친해지고 더 많이 안다. 그러면 됐다.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그래도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친해지고 싶다.

 

4. 생명의 정치와 죽음의 정치

이것저것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두 가지만이라도 거칠게나마 정리하고 싶다. 하나는 해러웨이와 푸코의 생명권력과의 연관성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국역서는 생명정치와 연관된 장을 누락, 출판했기 때문에 그 책을 읽을 때에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었다. 울프와 식육용 가축 사육의 문제를 논하는 부분(285-288)에서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을 쓸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면서 죽임과 죽게 만듦을 통해... 그리고 살게 강요하는 것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수를 죽이려고 살게 만드는자본주의에 대해 말한다. 이 부분에서 해러웨이는 푸코가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153-157)에서 과거의 군주권력과는 다른 생명권력의 등장을 말하는 부분을 인간의 생명에서 생명 일반으로 확장한 사유를 선보인다. 푸코는 죽이거나 살게 놔두는(let live)” 군주권력이 19세기에 생명을 양육하거나 (타인의 생명을 해친 이들의) 생명 보전을 허용하지 않는생명권력으로 이행했다고 말한다. 해러웨이는 이 문제의식을 연장하여 이윤을 위한 대량살육, 그리고 이를 위한 대량사육을 문제 삼고 있다. 이제 현대 자본주의의 식용육 생산 과정이 생명정치의 시야에서 고찰된다. 이 강요된 삶과 강요된 죽음은 생명정치(biopolitics)를 죽음의 정치(thanatopolitics)로 전화시킨다(279).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긍정의 생명정치[affirmative biopolitics, 여기서 affirmative긍정으로 번역해도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의 문제의식이 논의되는데, 에스포지토를 기억해둬야 할 것 같다. 또 생명정치와 생태정치를 교차시키겠다는 해러웨이의 지향에도 계속 관심을 기울어야 하겠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반성이지만, 고기를 마지못해 먹는 것이 아니라 좋아라 하는 나는....

 

5. 촉수사유: 화이트헤드와 우로보로스

<반려자들의 대화>가 이해가 쉽지 않은 와중에도 미덕이 있다면 해러웨이의 선언들이 내세우는 형상(figure)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사이보그(와 집적회로 속의 여성들, 그리고 나선형의 춤), (“육신이 된 말씀”, 소중한 타자와의 부분적 연결, 그리고) 생식과는 무관한 이종간 또는 비인간 동종-동성애의 형상은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는 크툴루라는 촉수를 지닌 지하 또는 수중 생명체의 형상을 띠고 나타나는데, <반려자들의 대화>에서는 진창 속에 존재하는 우로보로스의 모습을 띤다. 해러웨이는 육신이 된 말씀이라는 기독교적 은유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 위하여 이 새로운 형상의 은유를 채택한다(345). 해러웨이에게 촉수는 단지 감각, 감응, 소통, 공격하는 기관만은 아닌 것 같다. 두족류의 다리뿐만 아니라, 뱀의 형상을 한 것(우로보로스, 메두사, 고르곤), 곧 무언가 휘감을 수 있고 엉킬 수 있는 것들을 말하는 것 같다(364). <사이보그 선언>에서의 사이보그처럼, <반려종 선언>에서 나온 화이트헤드의 개념이라는 포착의 합생”(122), “운동 중인 매듭”(123)처럼 우로보로스와 크툴루는 전체론(holism), 총체성, 정체성/동일성, 이원론들, 그리고 해방의 전망을 부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복, 부분적 연결, 재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는 모두 촉수의 뒤얽힘 속에서 모든 것을 우리 식으로 재단하고 묶으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365-366). 


우리의 몸은 생명체들로 구성되어 있고내 몸은 다른 존재들의 몸과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휘감긴다그리고 퇴비(compost)가 되어 또 다른 촉수달린 존재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할 것이다내 촉수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진흙, 유기체, 퇴비... 시간의 중층성과 시간적 비동시성(297)... 과거, 현재, 미래의 공존, 사실과 픽션의 공존...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영감으로 가득찬 통찰들... 가까운 미래의 나는 이를 좀더 잘 정리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와 해러웨이의 다음 선언은 어떤 것일까, 그 선언에서 제시되는 새로운 형상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점을 같이 갖게 한다.

 

6. 번역

번역은 훌륭한 편이다. 나는 이만큼 잘할 자신이 없다. 역자는 한국말 감각이 뛰어난 분 같다.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운다”(299)는 표현이 나와서 원서에 뭐라고 되어 있나 보니까 목욕물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린다는 것을 이렇게 번역했다.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구중계를 보는 분 같지는 않다. 덴버 베어스 경기 상황에 대한 묘사는 정확한 번역이지만 주자 만루, 투아웃이라고 하지 않고 보통 “2사 만루라고 한다. 몇 가지 의문들이 있는데, 하나만 얘기하면 worlding세계화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세계-되기

다음은 나의 읽기.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

원서 쪽

황희선 옮김 (책세상)

대안적 번역 제안

20: 13-15

8

노동을 비롯하여 ~ 않는다.

노동, 또는 모든 부분들의 힘을 하나의 더 높은 통일성으로 가공하는 최종적 전유라는 유기적 전체성(wholeness)에의 유혹과 상대하지 않는다.

27: 1-2

13

반면 인간은 ~ 없다. 사이보그는

인간은 어디서든 물질이며 불투명하기 때문에 유동적일 수가 없다. 반면 사이보그는

27: 9-10

13

방어 작업을 ~ 거리 투쟁보다

방위산업에서의 일자리를 요구하는, 종래의 전투적 노동운동의 남성주의적 정치보다

44: 3-6

28

종래의 안락한 ~ 볼 수 있다.

편안하고 오래된 위계적 지배에서 무섭고 새로운 지배의 정보과학으로의 이행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인데, 이 이분법은 다음의 표로 나타낼 수 있다.

51: 1

35

현실의

실재의

63: 20 64: 1

47

유토피아적 공동체 ~ 냉소적 이론들

유토피아 이론이나 그에 준하는 공동체에 대한 냉소적 이론들

65: 1

48

자본주의적인

자본가의

67: 2

50

개혁과

재형성과

67: 3

50

남성의 산업노조에서는

남성 중심 산별노조에서는

67: 11

50

허위의식 또는

허위의식처럼 보이거나 또는

73: 4

55

종말을

묵시록을

73: 9

56

소통과 통신을

통신(소통)과 첩보(지능)

75: 11

58

정초한다.

좌초시킨다(ground).

75: 18

58

좌초해왔다.

묶여 있었다.

76: 17

59

자율성에 덜 좌우된다고

자율성이 부족하다고

77: 15 22

 

지배되지 않는 주체 the One이며 ~ 사라지는 것이다.

자아는 지배받지 않는 하나의 존재(the One)이며, 타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로 인해 그 사실을 안다. 타자는 미래를 부여잡고 있는 하나의 존재(the one)이며, 자아의 자율성이 거짓임을 알려준 지배의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안다.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되고, 강력해지며, 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환상이며, 타자와 함께 묵시록의 변증법에 연루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가 된다는 것은 해져서 올들이 드러난 소매 끝처럼 분명한 경계가 없고 하나의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 곧 여럿이 되는 것이다.

86: 9

68

갇혀

묶여

133: 18

106

범주가 생물학적

범주가 실제적인[real, 누락!!] 생물학적

138: 19

110

세례 요한의

요한 복음의

138: 20 - 22

110

베어스가 ~ 않을까?

기사 마감 5분 전, 베어스가 2점차로 지고 있는 9회말 2사 만루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40: 2-3

111

팩트는 논문이 ~ 설정해왔다.

팩트들이 다음날 신문에 실리기 위해서는 마감을 지켜야 한다.

140: 14, 15, 17

141: 1

112

수사

비유(trope)

140: 15

112

문형figure of speech

비유()

141: 5

112

방향이

의도가

141: 13

112

취향도

흥미(관심)

150: 3-9

119

인본주의적 기술 ~ 수립했다.

인간주의적 기술 예찬론자들은 가축화(가축으로 길들이기)를 남성 한부모의 혼자 낳기의 전형적인 행위(the paradigmatic act of masculine, single-parent self-birthing)로 묘사하는데, 이는 마치 남성이 그의 도구를 발명(창조)하는 것처럼, 남성이 가축화를 통해 자신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가축은 인간의 의도를 그 몸 안에 체현한 것, 곧 자위행위가 개의 몸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성은 (자유로운) 늑대를 잡아 (복종하는) 개를 만들고 그로써 문명의 가능성을 수립했다.

152: 6

120

늑대를 동경하던 개들이

개가 되고 싶었던 늑대들(wolf-wannabe-dogs)

178: 2

141

방식으로 아는

방식으로 신을[누락!!] 아는 것

179: 6

142

연결-속의-타자성에

연결-속의-소중한 타자성에

181: 15-16

144

개를 ~ 솔직하게 배우기란

개에게 진심으로 복종하기를 배우기란

184: 1

146

걸린 듯 뚫어지게

걸린 듯 그 던지는 사람을 뚫어지게

194: 21 이후

155

척도

스케일

209: 7

167

설문조사에서

조사에서 / 서베이에서

218: 14

175

개의 이빨이 달린

송곳니(canine teeth)가 있는

223: 2 이후

178

개 전체

완전한 개(whole dog)” / 만능 개 / 엄친개 ?

225: 17 226: 1

180

이 둘 모두에서 ~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 둘 모두는 나를 근대화라고 점잖게 부르는 것의 자연문화로 딱 이끌었다.

227: 10

181

약재 시장

마약 판매 지역 (drug sale zone)

231: 22

185

이데올로기적 개선

개선이데올로기들

236: 5-6

189

통해 백인 중산층적 ~ 세계의 사람들은,

통해 피레니즈와 오시 세계에서 백인 중산층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253: 1

204

인종주의적 구성체

인종 공동체들

274: 8

221

둘 다/또한의

둘 다 맞는 상반된 이야기의

280: 18

227

확립된

공유된

281: 10

227

생명-우선

생명존중/낙태(임신중지)반대(pro-Life)

281: 15

227

-생명-우선

-낙태반대

286: 15-16

232

지속을 분절하는

살아있는 섬유를 칼로 자르는

295: 11

239

단위가

사물이

300: 2

243

자본주의자

자본가

308: 11

250

확장되면서

자체적으로 펼쳐졌다 다시

342: 4

277

유형적인 인지를 실제로 실행시키는

신체의 인지적 실천을 실행하는

 

 

7. 맺으며

언제나 재미있는 책은 정리를 해도 쓰고 싶은 말들이 남아 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 읽은, 그러나 여러 번 읽고 또 읽은 해러웨이의 책, 기대 이상였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는데, 해러웨이의 다른 글들도 좀 보고, 여기에서 인용되는 다른 이들의 책들도 보고 싶다. 재미있는 책은 읽고 나면 누구랑 같이 얘기도 좀 하고 해야 하는데... 훗날의 대화를 위해 정리해둔다.

 

읽고 싶은 저작들 (우선순)

1) 해러웨이의 글: “상황적 지식”(1988)과 하나의 세계로서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글들

2) 인류학적 저작들: 특히 스트래선

3) 생물학, 생태학 관련 저작: 마굴리스

4) SF 소설들

5)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볼 수 있을까? 읽는다 해도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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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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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2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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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4판 나남신서 136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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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군주의 권력을 특징짓는 특권의 하나는 생살여탈권(the right to decide life and death)이었다. - P153

생살여탈권은 ... 비대칭적 권리이다. 군주는 죽일 권리를 행사하거나 죽일 권리를 보유함으로써만 생명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뿐이고, 그가 요구할 수 있는 죽음에 의해서만 생명에 대한 권력을 갖는다. "생살여탈권"으로 표명되는 권리는 사실 죽게 ‘하거나‘ 살게 ‘내버려둘‘ 권리(the right to take life or let live)이다. - P154

그런데 서양에서는 이러한 권력의 메커니즘이 고전주의 시대부터 크게 변화했다. ... 그때부터 죽음의 권리는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의 요구 쪽으로 옮겨가거나 적어도 이 요구에 기대고 이 요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따르는 경향이 있게 된다. ... 이 무시무시한 죽음의 권력은 이제 생명에 대해 실제로 행사되는, 생명을 관리하고 최대로 이용하고 생명에 관해 정확한 통제와 전체적 조절을 실행하려 시도하는 권력의 보완물로서 주어[진다]. ... 이제 전쟁은 보호해야 할 군주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모든 이의 생명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고, 국민 전체는 생존의 필요라는 명목으로 서로 죽이도록 훈련받는다. - P155

죽게 ‘하든가‘ 살게 ‘내버려두는‘ 오래된 권리가 ‘생명을 양육하거나‘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권력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One might say that the ancient right to take life or let live was replaced by a power to foster life or disallow it to the point of death. - P157

구체적으로 생명에 대한 권력은 17세기부터 두 가지 주요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 먼저 형성된 듯한 극의 중심은 기계로서의 신체였다 (규율권력) ... 다소 늦게 19세기 중엽에 형성된 두 번째 극의 중심은 종(種)으로서의 신체(the species body), 생명체의 기계론에 의해 검토되고 생물학적 과정에 대해 매체의 구실을 하는 신체, 즉 증식, 출생률과 사망률, 건강 수준, 수명, 장수와 더불어 이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다. 이것들을 떠맡는 것은 일련의 개입과 ‘조절하는 통제‘ 전체, 즉 ‘인구의 생명정치‘이다.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화는 신체의 규율과 인구의 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 P158

... 18세기에 서양의 ... 자본주의 발전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 정확히 생명이 역사에서 정치 기술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게 되는 현상이었는데, 이 현상으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라는 종(種)의 생명에 고유한 현상이 지식과 권력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 P161

서양인은 생물계에서 살아 있는 종이라는 것, 신체, 삶의 조건, 생명의 개연성, 개인의 건강과 집단의 활력, 변할 수 있는 체력, 체력이 최적의 방식으로 배분될 수 있는 공간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차로 터득한다. 아마 역사상 처음으로 생체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에 반영되었을 것이다. 살아가는 행위는 더 이상 죽음의 우연과 숙명성 속에서 때때로 떠오를 뿐인 그 접근 불가능한 기반이 아니라, 지식의 통제와 권력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일정 부분 넘어가는 것이 된다. 이제 권력은 법적 주체, 즉 권력의 최종적 권한이 죽음인 법적 주체뿐만 아니라 생명체를 다루게 되고, 권력이 생명체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지배력은 생명 자체의 차원에 놓이게 된다. - P162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해한대로 정치적 존재로서의 부가적 역량을 지닌 살아 있는 동물로 남아 있었지만, 근대인은 이제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이다. ...
인간의 문제가 생명체로서의 특수성, 그리고 다른 생명체에 대한 관계 아래 드러나는 특수성의 측면에서 제기된 이유는 역사와 생명의 새로운 관련 양태에서, 즉 생명을 생체의 주변으로서의 역사 외부에 놓고 동시에 지식과 권력의 기술이 스며든 인간의 역사성 내부에 두는 이중의 입장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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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김은주 지음 / 봄알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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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즉시 이해 가능하게 쓴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책이다.


이들은 타자와 소수자의 문제를 철학적 문제로 성찰하고, 타자를 동일성의 범주로 판단해버리지 않고, "즉시 이해 가능하지 않은" 겸손한 지평에서 타자와 맞닿았다. 말을 길어 올려 새로운 사유를 끌어낸 그들로부터 알게 된 것은, 동일자로 호명되어온 인간이 실은 이방인이며, 타자라는 사실이다. - P13

해러웨이는 소위 ‘객관적 지식‘의 전제가 죽은 백인 유럽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음을 폭로하면서,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개념은 모든 사람(그룹)의 비전이 그 사람(그룹)의 시시각각 변하는 정체성에 의해서 구성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상황적 지식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참인 것이 아닌,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의 한계 인식을 포함하는 지식이다.

모든 지식은 부분적이며 상황적이다. 오히려 인식의 객관성은 자기 지식의 부분성과 상황성을 성찰적으로 비판하는 데서 연원한다. 이 지식 모델에서 해러웨이는 자연의 실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며,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은 구별할 수 있고,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자연현상의 물질적 분석과 이를 둘러싼 문화적 분석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客觀이란, 지나가는 손님(客)의 시각일 뿐이다. 따옴표 안에 있는. - P108

상황적 지식이란 겸손한 목격자의 지식이다.

‘목격‘이란 보는 것이고, 증언하는 것이며,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보고 기술한 바를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보고 기술한 바에 심적으로 상처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격은, 목격하는 사람들의 구축된, 그래서 결코 완전하지 못한 신뢰성에 의존하는, 집합적이고 제한적인 실천이다. 목격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하는 존재들이고, 틀리기 쉬우며, 무의식적인, 부정적인 욕구들과 두려움들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 pp. 245-246]

겸손한 목격자는 자신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과학기술에 자신의 세계가 기입되어 있다는 전제를 이해한다. "겸손한 목격자는 상황적 지식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겸손한 목격자는 자신의 영향력, 권력 한계를 인식한다. - P109

이 때 겸손은 자기소모적인 낮춤이나 무능력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은 오히려 하나의 특정한 재주인데, 그것은 자신이 처한 위치와 목격상황이 그 자체로 어떤 유산이자 복합적 구성물임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위치성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겸손한 목격자의 상황적 지식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대문자 지식이 아니며, 역사를 초월하거나 역사 밖에 있는 진리가 아니다. 상황적 지식은 역사적이며 태어남과 죽음의 조건하에 있다. 상황적 지식은 틀릴 수 있다는 것, 조건에 기반한 해석이란 발생하고 예약되고 우발적이며 어쩌면 속임수에 빠지기도 쉬운 참여방식임을 이해하고 뛰어드는 것이다.

속지도 속이지도 않았다. 지나갔고, 다르게 해석되고, 다르게 기억되고, 다르게 잊혀진다...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 P109

사이보그를 통해서 해러웨이는 질문한다. 정말 ‘여성‘이라 자연스럽게 묶일 그러한 본질과 범주가 존재하는가? 실상 젠더, 인종, 계급 같은 단일한 정체성은 가부장제, 식민 자본주의의 모순된 사회 현실들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된 성취다. 이때 ‘우리‘로 묶은 이는 누구이고, 그 ‘우리‘에 속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 ‘단일한 우리‘라는 묶음으로써 이득을 누리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라고 불리는 강력한 정치적 신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여성) 정체성들을 이용했는가?

이 점에서 사이보그들은 백인 (여성)의 단일한 정체성과 무관하다. 사이보그에게 묶음이 있다면 이주노동자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일 것이다. 사이보그 개념은 본질적 정체성과 이를 구획 짓는 경계에 대해 묻는 개념이다.

김은주는 사이보그 선언이 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해러웨이의 blasphemy라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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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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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고, 매료되었고, 이번에는 설득되었다!!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 모두 <트러블과 함께 하기>에 나왔던 사고와 개념들의 발생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트러블과 함께 하기>의 kin은 <사이보그 선언>에서는 결연집단(affinity group)으로 언급되고, "카밀 이야기"의 플롯의 재료들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비롯한 여러 페미니스트 SF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30, 78-83).

또 <트러블...>에서 나오는 "촉수사유"는 화이트헤드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모든 명사는 문어보다 발이 더 많이 달린 동명사"(123).


<반려종 선언>의 마지막 장에서 해러웨이는 시공간 스케일(time-space scales)의 다층성에 주목한다(193-194, 235). 페르낭 브로델 같다. 

(1) 지구와 자연의 시간대인 가장 긴 진화적(evolutionary) 시간 스케일, (2)개인이 면대면으로 만나는 타자들과 의미를 생산하는 가장 짧은 개인적(personal) 시간 스케일, 그리고 (3) 그 중간의 역사적(historical) 시간 스케일. 

이 서로 다른 스케일을 지닌 시간의 층들이 바로 우리의 "두터운 현재(thick now)"를 이루는 것이다(277).


5장 "품종 이야기"는 앞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역사적 시간 스케일을 두 가지 견종의 역사에 대한 신화와 추정되는 실제(?) 역사를 상상력을 동원해 함께 실뜨기해낸다. 

여기에서 역자는 scale을 "척도"로 번역하였는데, 독자들이 그것을 시간의 다층성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을까? "스케일"로 그냥 음차하든가, 정 번역하고 싶었다면 "규모"로 직역하거나, "길이"로 의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이 시간의 다층성을 이해하면, <트러블과 함께 하기>에 나오는 "쑬루세" 이야기를 보다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개 품종 이야기와 시간의 다층성 이야기를 통해서 해러웨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236쪽에 나오는 말에 나는 그것의 핵심이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개 키우면서 사는 백인 중산층 사람들(개인적 시간대)은 그들의 조상이 그 개의 조상들을 동원하여 정복하고 파괴하고 만들어낸 것들(역사적 시간대)의 현재적 귀결에 책임감, 곧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갖고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316). 

"소중한 타자"로 번역된 것, 곧 "함께 살며 서로에게 의미를 갖는 타자"와의 부분적 연결 안에 거주하는(inhabiting) 우리는 나와 타자가 이렇게 존재하게 만든 유산들에 대해 깊게 성찰해야 하고, 함께 살 만한 세계를 다시 만들기(reworlding)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236, 276). 


이것이 나와 타자가 함께 추는 나선형의 춤, 존재론적 안무, 더불어 되기(becoming-with, 274)인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구체적인 것"을 "포착의 합생"("the concrete" as "a concrescence of prehensions")으로 기술했다. 그는 "구체적인 것"을 "실제의 사건"으로 이해했다. 실재(Reality)는 능동태 동사이며, 모든 명사는 문어보다 발이 더 많이 달린 동명사처럼 보인다. 존재자들은 서로를 향해 뻗어나가며 "포착"이나 파악을 통해 서로와 자신을 구성한다. 모든 존재자는 관계에 선행해 존재하지 않는다. "포착"에는 결과가 있다. 세계는 운동 속의 매듭이다. 생물학적 결정론과 문화적 결정론은 모두 잘못된 곳에서 구체성을 구성한 사례들이다. "자연"이나 "문화"와 같은 잠정적이고 부분적인 추상 범주를 세계로 착각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잠재적 결과를 선행하는 기초로 오해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리 구성된 주체나 객체는 없으며, 단일한 근원이나 단일한 행위자, 최종 목적과 같은 것은 없다. 주디스 버틀러의 표현을 빌리면 "잠정적 기초"밖에 없다. - P122

기호와 육신, 이야기와 사실. 내가 태어난 집에서는 이 생산적인(generative) 커플이 별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둘은 항상 왈왈거리면서도 떨어질 줄 몰랐다. 성인이 된 내 안에서 문화와 자연이 내파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내파가, 명사로 유통되지만 사실상 동사인 반려종을 말하거나 그 관계를 직접 살아갈 때보다 더 큰 폭발력을 발휘한 적은 없다. 요한 복음의 "말씀은 육신이 되었다"는 말의 뜻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기사 마감 5분 전, 베어스가 2점차로 지고 있는 9회말 2사 만루 투 스트라이크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P138

어원학적으로 팩트(사실)는 이미 이루어진 수행, 활동, 행위, 간단히 말해 업적을 일컫는다. 팩트는 과거분사이며, 이미 한 것, 끝난 것, 고정된 것, 입증된 것, 수행된 것, 성취된 것을 뜻한다. 팩트들은 마감을 지켰기 때문에 다음날 신문에 실린다. 픽션(서구)은 어원학적으로 팩트와 매우 가깝지만, 품사와 시제가 다르다. 픽션은 팩트와 마찬가지로 활동을 일컫지만 가장이나 속임수뿐 아니라 형태를 만들고 구성하며 발명해내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픽션은 현재분사에서 유래했고, 진행 중이며, 아직 문제로 남아 있고, 마감되지 않았으며, 사실과 어긋날 가능성이 남아 있고, 아직 진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알게 될 것을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동물들과 함께 살고, 그들/우리의 이야기에 거주하면서 관계의 진실을 말하려 애쓰는 것, 진행 중인 역사 속에서 공존하는 것. 이게 바로 반려종의 일이며 반려종에게 가능한 최소 분석단위는 "관계"다.
- P139

trope: 수사 -> 비유
figure of speech: 문형 -> 비유(어)
- P140

141: 5: 방향이 -> 의도가
141: 13: 취향도 -> 흥미(관심)도

육신과 기표, 몸과 말, 이야기와 세계, 이 모두가 자연문화 속에서 결합된다.
Flesh and signifier, bodies and words, stories and worlds: these are joined in naturecultures.
메타플라즘은 실수나 헛디딤, 몸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비유를 의미할 수 있다. ...
의미의 전도, 소통 중인 신체들 간의 자리 이동, 개형, 개조, 진실을 말하는 방향 선회. 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들만 말한다. 컹.
Inverting meanings; transposing the body of communication; remolding, remodeling; swervings that tell the truth: I tell stories about stories, all the way down - Woof. - P141

나는 <반려종 선언>에서 소중한 타자의 관계 맺음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짝을 이루는 이들은 이 관계를 통해 육체와 기호 모두에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다. 뒤에 나오는 진화, 사랑, 훈련, 종류 및 품종과 관련된 이야기는 인간이 이 행성에 자신과 함께 출현한 무수히 많은 종과 더불어 시간, 신체, 공간의 그 모든 척도 속에서 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볼 때 도움이 된다. 내가 제시하는 설명은 체계적인 형태로 되어 있지는 않다. 그 대신 색다르고 시사적이며 신중하기보다는 과격하고, 명석판명한 가정보다는 우연한 근거(contingent foundations)를 따른다. 여기서 개는 반려종이 이루는 거대한 세계에서는 하나의 행위자에 불과하다. - P146

이 선언이나 자연문화의 삶에서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마릴린 스트랜선이 말한 "부분적 연결"을 찾고 있다. 이와 같은 연결 속에서는 자기 확실성이라는 신의 속임수나 불사의 성체(deathless communion)을 택할 수 없고 반직관적인 기하학 및 부적합한 번역이 필요하다. - P147

3행 이후:
인간주의적 기술 예찬론자들은 가축화(가축으로 길들이기)를 남성 한부모의 혼자 낳기의 전형적인 행위(the paradigmatic act of masculine, single-parent self-birthing)로 묘사하는데, 이는 마치 남성이 그의 도구를 발명(창조)하는 것처럼, 남성이 가축화를 통해 자신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가축은 인간의 의도를 그 몸 안에 체현한 것, 곧 자위행위가 개의 몸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남성은 (자유로운) 늑대를 잡아 (복종하는) 개를 만들고 그로써 문명의 가능성을 수립했다. 그렇다면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견이라고 보면 될까? 개를, 길들인 동식물 전체의 상징으로 만들고 인간의 의도에 복종하게 만들되, 점차 진보할 것인지 타락할 것인지는 각자의 취향에 맡기면 될 것이다. 심층생태론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문화로 추락하기 전에 있었다는 야생의 이름으로 혐오하기 위해 기꺼이 믿는다. - P150

6행: 늑대를 동경하던 개들 -> 개가 되고 싶었던 늑대들 (wolf-wannabe-dogs) - P152

개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생물학적인 것으로 보면서 목축 및 농경 사회의 출현처럼 인간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는 문화적 변화라고 본 뒤 공진화 사례에서 제외하는 것은 실수다. 나는 인간 유전체가 적어도 개와 같은 반려종이 감염되는 병균에서 유래한 분자적 기록을 매우 많이 간직하고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자연문화에서 면역계는 사소한 부분이 아니다. 사람을 포함한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할 가능성을 결정하고 함께 살 수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규정하기 때문이다. 인간, 돼지, 가금류, 바이러스 사이에 공진화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인플루엔자의 역사를 상상하기 힘들다. - P155

네덜란드의 환경여성주의자인 바버라 노스케는 고기를 생산하는 "동물-산업복합체"의 스캔들로 우리의 시선을 돌린 사람이기도 한데, 동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SF에 나오는 "다른 세계"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애컬리는 튤립의 중요한 타자성/차이들(significant otherness)을 흔들림 없이 지지했던 경험을 곱씹으며 노스케의 주장을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튤립은 중요했고, 바로 이 점이 둘 모두를 바뀌게 했다. 애컬리 역시 튤립에게 중요했다. 이 중요성은 언어적이든 아니든 모든 형태의 기호학적 실천에 특유한 헛디딤을 통해서만 읽어낼 수 있다. 오인(misrecognition)은 극히 드물게 발생하는 적중의 순간만큼 중요했다. 애컬리의 이야기에는 몸으로 부대끼는 세속적 사랑에서 경험하기 마련인 것, 즉 육감적(fleshly)이면서도 의미를 생산하는 세부 사항이 매우 많이 나온다. - P160

남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용납하기 힘든 신경증적 환상이다. 반면, 골치 아픈 조건들을 맞춰가면서 사랑을 지속하려는 노력은 아주 다른 문제다. 친밀한 타자를 더 잘 알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별수없이 겪게 되는 우습고도 비극적인 실수들은, 그 타자가 동물이건 인간이건 또한 무생물이건 간에 내 존경심을 자아낸다. 애컬리와 튤립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 P161

헌과 개릿은 한 꺼풀만 벗기면 피로 맺어진 자매다.
이 근친 교배의 핵심은 두 사람 모두 개가 자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핀다는 점이다. ... 방법에 관한 한, 행동주의 조련사와 헌 사이에 중요한 견해차가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하지만 대부분의 반려종 관계에서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넘어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상황 속의 부분적 연결이 중요하며 (Situated partial connection is what matters;) 그 결과로 개와 인간이 실뜨기 놀이(game of cat‘s cradle) 속에서 함께 출현한다. 놀이의 이름은 존중이다. 좋은 조련사는 중요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의 기호 아래 반려종으로 관계 맺는 훈련을 한다. - P176

아담은 범주 노동으로 일을 간편하게 처리했다. 대꾸가 돌아올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고 그를 그로 만든 것은 개(dog)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 그대로 그를 창조한 신(God)이었다. ... 그 모든 말들은 철학적으로 미심쩍을 수는 있어도 누군가가 자신과 함께 일하는 동물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계속 의식하기 위해서는 이 말들이 필요하다.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누구인가는 영원한 질문으로 남을 것이다. - P177

핵심은 타자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없지만, 관계 안에서 누구와 무엇이 출현하고 있는지를 항상 질문하는 것이다. [The recognition that one cannot know the other or the self, but must ask in respect for all of time who and what are emerging in relationship is the key. -> 타자나 자신을 알 수 없지만, 관계 안에서 누가 그리고 무엇이 출현(창발)하는가에 대해 언제나 존중심을 갖고 물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과 관계 없이 진정한 사랑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다. - P177

신학자들은 "부정의 방식으로 신을 아는 것"(the "negative way of knowing" God)의 힘을 이야기한다. 존재하는 것 또는 존재하는 자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서는 유한한 존재란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곧 [온전한 존재] 그 자신의 자아의 투사물이 아님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한 "부정적인" 앎의 종류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나는 개에 대한 앎, 특히 훈련 같은 하나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면서 개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을 이해할 때 이 신학적 고려가 설득력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 관계가 사랑이라고 부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 P178

반려 "동물의 행복": 노력, 일, 가능성의 충족을 통해 얻는 만족의 능력. ...
반려동물의 다양한 소질은 훈련이라는 관계적인 일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 헌(Hearne 1991)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이와 같은 행복은 근본적으로 "적중(getting it right)", 곧 성취를 통한 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윤리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개와 개를 다루는 사람은 훈련의 노동 속에서 함께 행복을 발견한다. 이것은 창발한 자연문화의 사례다.

이와 같은 유형의 행복은 탁월함을 열망하는 것, 범주적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존재자가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탁월함에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관련된다. 모든 동물이 비슷한 것은 아니다. 각 동물이 지닌 구체성 - 종류와 개체의 구체성 -이 중요하다. 추구하는 행복의 구체성이 중요하며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창발해야 한다. 헌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제퍼슨적인 행복을, 짝을 이룬 유한한 존재로서 동물-인간이 번영하는 것으로 번역해낸다. - P180

관례적인 인본주의는 사이보그 이후 탈식민의 세계에서 소멸했지만, 제퍼슨적 견본주의는 아직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헌은 토머스 제퍼슨을 개집으로 불러들이면서 분리된 채 앞서 존재하는 범주적 정체성이 아니라 헌신적인 관계에 권리의 기원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개는 훈련 과정에서 특정 인간에 대한 "권리"를 확보한다. 개와 인간은 관계를 통해 서로에 대한 "권리"를 구축한다. 이 권리는 존중, 배려, 반응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헌은 개 복종 훈련을 개가 인간에게 권리를 주장할 권력을 강화하는 장소로 서술했다. 자신이 키우는 개에게 진심으로 복종하기를 배우기란 주인에게 벅찬일이다(Learning to obey one‘s dog honestly is the daunting task of the owner). ... 이런 권리는 상호소유(reciprocal possession)에 기반한 것으로 해체되기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권리 요구는 파트너 모두의 삶을 바꾼다 - P181

다른 이와 나누는 애정, 헌신, 솜씨에 대한 열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비키 헌이 말한 의미에서의 훈련 같은 애정 행위는, 연쇄를 이루며 창발한 다른 세계들을 배려하는 애정 어린 행위를 낳는다. 이것이 내 반려종 선언의 핵심이다. 나는 어질리티를 그 자체로 특정한 선이자 더 세속적일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경험한다. 즉 좀 더 살만한 세계를 만드는, 모든 규모에 속한 소중한 타자성이 요구하는 바에 더 민감해지는 것이다. 늘 그렇듯, 문제는 세부에 있다. 연결 고리도 세부에 있다. ... - P191

훈육된 자발성(disciplined spontaneity)라는 모순어법을 목표로 ... 개와 조련사 모두가 활동을 익혀야 한다. 일관성 없는 세계에서 일관성을 충분히 지님으로써 육신 속에, 경주 속에, 코스 위에, 존중과 응답을 빚어내는 공동 존재의 춤에 참여하는 것이 과제다. 그리고 모든 척도에서, 모든 파트너와 함께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기억하는 것. - P193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역사적 자연문화를 통해 피레니즈와 오시 세계에서 백인 중산층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 개들의 일로 유지되던 목축경제가 파괴한 초원 생태와 삶의 방식을 다시 상상하는 데 참여할 의무가, 아직 명쾌하게 규정되지는 않았어도 확실히 있다는 점을 나의 몸으로 느낀다. 나 같은 사람들은 함께 사는 개들을 통해 토착민의 주권, 목축 경제 및 생태적 생존, 육류 산업 복합체의 급진적 개혁, 인종 정의, 전쟁과 이주의 귀결, 기술문화의 제도와 맞닿게 된다. 헬렌 베란의 표현을 빌리면 "함께 잘 지내는 것(getting on together)"이 필요하다. "순종"인 카엔과 "잡종"인 롤런드, 그리고 내가 우리 서로를 만질 때, 우리는 우리를 있게 해준 개들 및 사람들과 연결된 관계를 우리의 육신 속에 체현한다. - P236

나와 땅을 함께 쓰는 이웃인 수전 코딜의 감각적인 그레이트 피레니즈인 윌렘을 쓰다듬을 때, 나는 애견 전시회 및 다국적 목축 경제뿐 아니라 새로운 서식지로 이주된 캐나다 회색 늑대, 경제적 가치가 높아진(??, upscale) 슬로바키아 곰, 국제 복원 생태학을 만지게 된다. 우리에게는 온전한 개(the whole dog) 못지않게 온전한 역사적 유산이 필요하다. 이 모두가 결국 온전한 반려종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다른 일도 아니겠지만, 이와 같은 온전한 존재들(wholes)은 부분적 연결로 구성된 비유클리드적 매듭이다. 그러한 유산에 대해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그 안에 거주함으로써, 우리는 놀이가 선사하는 창조적 은총을 희망해볼 수 있다. - P236

이들이 즐기는 성적 유희는 생식으로 연결되는 이성애적 짝짓기 행동과는 무관하다. ... 여기서 우리는 순수한 다형적 도착성을 발견한다. ... 내게는 에로스처럼 보인다. 아가페는 분명 아니다. ... 카옌과 윌렘이 발산하는 젊음과 생기는, 정숙을 유도한다는 생식샘 절제술은 물론, 이성애가 재생산을 위한 것이라는 헤게모니를 우스운 것으로 만든다. ... 하지만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존재론적 안무다.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물려받은 몸과 마음의 역사로부터 빠져나와 발명해내고, 그들을 그들로 만들어주는 육체적인 동사로 다시 만들어낸, 생명력 가득한(vital) 놀이다. 이 게임을 발명한 것은 그들이다. 그리고 이 게임은 그들을 새로 만든다. 다시 한번, 메타플라즘. 우리는 이 중요한 말이 지닌 생물학적 맛을 언제나 다시 음미한다. 이 말은 필멸의 자연문화 속에 육신으로 만들어져 있다. - P238

인류세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해 생겨나고 있는 것은, 상황 속에서 복합적인 역사를 통해 구성된 행위의 그물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모습과는 다를 수 있고, 달랐을 수 있죠. 하지만 사람들은 말이 갖는 힘 때문에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종이 정말로 인간 본성에 맞춰 이런 일을 한다고 믿습니다. 이건 경험적으로 사실이 아니죠. - P293

저더러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자본세(Capitalocene)를 고르겠네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형상화하는 단어죠. ... 자본세에 대한 대응은 살과 피 안에, 특정 상황에, 복잡한 역사들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체계적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

자본주의는 단순히 종의 행위가 아닙니다. ... 자본주의는 절대 하나의 사물이 아닙니다. 뭣보다도, 배우 복잡한 역사적 체계의 현상이죠. 시공간적으로 역사가 매우 다양하고 균일하지 않아요. 18세기 중엽과 증기기관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요. 플랜테이션 체계가 확실히 더 근본적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요 - P294

이 문제를 농경의 발명, 심지어는 플라이스토세 Pleistocene의 수렵인, 아니면 지구상 현생 인류 Homo Sapiens sapiens의 출현, 그런 것들과 동등하게 다루는 심층생태론자를 한편에 두고, 인간을 화석연료를 사용하며 내연기관을 쓰는 존재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다른 편에 두고, 인류세가 무엇인지 논쟁을 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마르크스주의 정치생태학자인 제이슨 무어가 좋은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지구형성 요인으로서 자본주의의 복잡성은 15세기의 인도양 연안 무역 지대를 살펴보지 않으면 생각하기 시작할 수조차 없어요. 무역 지대와 부의 축적 지대, 플랜테이션 농법의 발명, 동식물과 미생물, 사람들의 이동, 그리고 16세기 강 연안의 삼림 파괴 같은 세계형성 과정들 말입니다. 인류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바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분법적 시간 개념으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첫 문장조차 꺼낼 수가 없어요. - P295

무역 지대와 부의 축적 지대, 플랜테이션 농법의 발명, 동식물과 미생물, 사람들의 이동, 그리고 16세기 강 연안의 삼림 파괴 같은 세계형성 과정들 말입니다. 인류세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바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분법적 시간 개념으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첫 문장조차 꺼낼 수가 없어요. 지난 200년간에 관해 이야기하든가, 아니면, 아시잖아요, 종의 탄생 시기에 대해 말을 하든가. 그 다음 차례는 심층생태론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화석연료 경제만 걱정하는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는 일이 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시공간의 복잡성이 잘못 설정되니까요. 이 점에서는 자본세의 개념이 낫습니다. - P296

그리고 자본세는 동물, 식물, 인간 - 그리고 미생물(왜냐면, 보세요, 자본의 역사와 관련해서 발효와 질병은 근본적이고 중요합니다. 발효 문제를 빼고 2차 대전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 들 중 어떤 집단이, 어쨌든 자본세에서의 행위자들은 최소한으로 말해도, 상황 속에 있는 식물, 동물, 인간, 미생물,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의 안팎을 가로지르는 다중적 층위의 기술들인 거죠. 아주 어설프게나마 자본세에 대해 생각을 해보면 인류세와는 아주 다른 배역들이 나오게 됩니다. - P296

유진 스토머와 파울 크뤼천은 탈색된 산호초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다가 암석, 물, 대기에 인간 활동에서 비롯된, 인간이 야기한 과정이 새겨진 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다음 차례로 지구물리학자들이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서 지층 형성과 관련된 값들이 새로운 지질시대를 명명하기에 충분한 수치인지 전문적이고 엄밀한 기준에 맞춰 판단합니다. 인류세는 백악기와 고제삼기를 가르는 K-Pg 경계(스콧 길버트)와 같은 경계 사건인가, 아니면 하나의 지질시대인가, 아니면 더 큰 지질학사적 범주인가?

우리가 나눠야 하는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빈대 잡다가 초가 삼간 태우지는 않을 겁니다. (So I don‘t want to toss out the baby with the bathwater, you know;) - P299

저는 인류세라는 용어가 본래 의도보다 너무 많은 걸 함축하기 때문에 차라리 그 말을 쓰지 않는 편이 나았으리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용어를 그렇게 정한 마당에, 2016년에 조사위원회가 보고서를 내면 지질학자들이 인류세를 공식 용어로 채택했으면 좋겠네요. 주요 현안에서 시급성을 더 잘 짚어낼 뿐 아니라 이 담론적 물질성 안에서 작동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자본세가 강한 담론적 물질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실제로 연구하는 기관이 없지요. 미국에서는 자본주의를 언급할 수조차 없어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반역 행위로 받아들여지죠. 정말로, 웬만한 곳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에요! - P299

크리터는 생태계다.

지구상의 어떤 크리터들도 그 외부에 있지 않고, 크리터들은 그 자체가 생태계인 걸로 이해되고 있어요. 다른 것이 아닌, 특정 생태계의 건강을 증진하겠다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생태계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동료/반려자들이 여기 있어야 하고 누구는 있어서는 안 되는가? ...
핵심은 생명정치에 관한 한, 생태계 배치라는 이 문제가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생명 게임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끝. 다른 게임은 없어요. 개체 더하기 환경이 아니죠.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고 역사적으로 역동적인 접촉 지대로 이루어진 생태계의 그물들만 존재합니다. ... 저는 가끔 이런 내작용적(intra-active)이고 회절하는(diffractive) 복잡성을 지질-생태-진화-발생-역사-기술-심리적 공제작 (GeoEcoEvoDevoHistoTechnoPsycho sympoiesis)이라고 부르죠! 이 계열은 자체적으로 펼쳐졌다 다시 접혀듭니다. - P307

DH: 나는 진흙으로 되어 있고, 그 진흙다움은 진행형입니다 (I am of the mud, the muddiness is ongoing). 세계되기(worlding), 공제작(sympoiesis) ...
CW: 진창(the muddling) ...
DH: 정말로, 저는 진창이에요. 그리고 진창 속에 있죠. 그래서 "진창 속에서 계속 되는대로 해나가기 (muddling along)"는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거예요. 이렇게 우리가 기호학적 육신성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우로보로스, 곧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안에 있는 어떤 순간(계기, moment) 같은 거예요. 이 말은 요한의 "육신이 된 말씀"에 있는 신학적인 냄새 때문에 그 말을 피해서 대신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기호학적 육신성, 이 "물질적 기호학", 기호학적 물질, 그것의 분리불가능성을 일컫는 것이죠. - P345

우로보로스를 포함해 촉수를 뻗은 존재들로 가득한 진흙 속에서, 아니면 진창 속에서, 뱀은 언제나 자기 꼬리를 삼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완성의 형상으로 여겨질 수 있지요. ... 뱀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전체론(holism)의 형상으로 쓸 수가 없어요. 하지만 물질적 기호, 육체적 기호 작용이 부정의 방식과 만나는 특별한 형상으로 간주할 수 있죠. 우로보로스적인 성질과 같은 것이 있는데요, 나사에서 촬영한 지구 전체 사진이든, 살아 있는 지구에 관해 러브록이 주장한 가이아 가설의 변형(라투르가 설득력 있게 논의한 것처럼 잘못된 해석이죠)이든, 지구 전체의 형상을 그릴 수 없다는 걸 염두에 두게 되죠. 지구 전체는 어떤 형태로든 없어요. 더 오랜 전통을 따라도 마찬가지고, 우주 시대에 좀더 가까운 방식이어도 마찬가지고요.
CW: 그래서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거군요. - P346

행위자-네트워크의 질문들과 관련해서는 둘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정말 많죠. 음, 기호학이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너무 환원적(reductive)이에요. ...
퍼스 전통의 기호학이죠. 사실 그 측면에서 브뤼노와 이자벨은 프래그머티즘의 유산에서 수렴합니다. 제 생각에 브뤼노는 상황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현재의 조합에서 생각하는 데 중요한 자원들 일부에 대해 저항감을 보였던 것 같아요. 푸코가 그 중 하나고, 맑스가 또 그렇죠. 페미니즘 전통 전체도 그렇지만 이제 변하는 모습이 보여요. 브뤼노는 페미니즘 사유는 훨씬 더 많이 인식하게 되었고 궁금해하지만, 그 성과물을 자신의 주장이나 형상화에 활용하는 건 아주 힘들어 했던 것 같아요. 이제 페미니즘 글들은 훨씬 더 많이 인용하지만, 막 실제로 사용하기 시작한 정도예요. 그런데 왜 그럴까요? 저는 그 사연 전체를 알지는 못해요. - P360

저는 브뤼노를 매우 가까운 친구이자 대화 상대로 생각합니다. 한때 브뤼노는 "부엌 싱크대 증후군"이라고 부른 것 때문에 저한테 몹시 화가 났어요. 제가 갖고 싶은 걸 모조리 다 집어넣어버리고 말았거든요! 하지만 브뤼노는 훨씬 신중하게 생각하죠! 저보다 진창에는 덜 빠져 있는 것 같네요. - P361

나의 툴루세는 필멸의 구성체가 서로에 대해, 서로와 함께 위태로운 관계에 있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회절하는 그물망의 그 모든 시간성, 특수성, 물질성으로 된 무수한 촉수들이 발산하는, 땅의, 지속적 힘의 카이노스(-세, -cene)입니다. 카이노스는 섬유질이 두텁게 뭉친 "현재"의 시간성으로, 고대의 것이며 아니기도 합니다. 크툴루세는 있었고, 지금 있으며, 다가올 현재입니다. 크툴루세는 끝없이 회절되는 시공간입니다. 이런 힘들은 모두 테라에서 솟아오릅니다. 이 힘들은 파괴적/생성적이며 쉽게 다룰 수 없습니다. 힘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매우 무서운 힘일지도 모릅니다. 그 재출현은 섬뜩한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건이 속한 장르는 희망이 아니고 도전적인 응답-능력, 책임일지도 모릅니다. 대지의 힘은 도발을 일삼는 어리석은 자들을 죽일 것입니다.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 어리석은 자들의 영령은 끝을 모르는 파괴의 촉수에 갇힐 것입니다. - P363

지하에서 생성하고 파괴하는 이 힘들은 (라투르와 스텐저스의) 가이아의 킨입니다. 이 힘들은 어머니가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고 죽을 운명인 메두사, 뱀과 같은 고르곤입니다. 그들은 위를 올려다보는 자들, 스스로를 인류라 부르는 사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는 자들은 방문하는 법,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법, 고통을 주지 않고 호기심을 추구하는 법을 전혀 모릅니다. 인류세에서 지하의 존재자들은 바다, 육지, 대기, 물에서 산업, 초이동, 자본화를 추구한 이들의 오만함이 야기한 이중의 죽음을 가속화하거나 그 과정에 가담할 수 있습니다. 인류세에, 촉수가 달린 이는 핵이며 탄소 섬유입니다. - P364

지하의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과 잡다하게 뒤섞인 채 더불어-되기를 해가는 인간 거주자들을 아우르며 땅에 속하는 모든 이들에게 스며들 수 있습니다. ... 이 모든 존재는 살고 죽습니다. .... 툴루세는 "홀로세"였고, 홀로세이며, 그 재출현 - 지속 - 으로 가득찬 것일 수 있습니다. 홀로세는 야생적이고, ... 언제나 진화하는 생명체들에게는 늘 풍족합니다. 위험하고 뒤죽박죽인 툴루세는 우리의 고향 세계, 테라의 시간성입니다. - P365

회복, 부분적 연결, 재출현에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는 모두 촉수의 뒤얽힘 속에서 모든 것을 우리 식으로 재단하고 묶으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촉수는 감각기관입니다. 촉수에는 침이 박혀 있습니다. 촉수는 세계를 맛봅니다. 인간 거주자들은 촉수의 생물군계(holobiome) 안에서 그것을 이루고, 인류가 연소시키고 추출하는 시간은 한때 균류의 물질성 및 시간성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연대하던 숲과 농장 그리고 산호초가 있던 곳에 놓인 단작 플랜테이션 지대 및 점균의 판과도 같습니다.

인류세는 짧을 것입니다. 인류세는 시대라기보다는 K-Pg경계(백악기-고제3기의 경계)와 같은 경계 사건입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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