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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유형지에서 외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슬로터다이크는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4장에서 이 책에 실린 카프카의 세 단편들 – 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최초의 고민, 단식 수도자 –을 다룬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무슨 책을 읽어도 카프카는 나온다. 난 왜 카프카를 이제야 읽나 후회할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읽었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제라도 읽는 것이 맞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도 편하다. 그래도 15년만 일찍 카프카 읽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1917)
유럽인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빨간 페터가 자신이 원숭이였던 시절을 학술원에 보고한 글이다. 아프리카 골드코스트(가나)에서 총 두 발을 맞고 포획된 원숭이가 좁은 우리에 실려 배를 타고 유럽으로 실려오던 중에 순차적으로 배우게 된 인간 흉내 – 악수, 침뱉기, 파이프 담배, 코르크를 따서 브랜디를 마시고 병 던져 버리기 –의 학습과정을 회상한다. 그의 인간모방 학습은 오직 우리로부터의 출구(the way out of the cage)를 찾기 위함이었는데, 이 출구는 탈출도 아니고 자유도 아니다. 탈출은 자살행위로 여겨졌고, 인간이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로 여기며 동경하는 자유를 그는 이미 느꼈지만 원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유는 유럽에 도착한 후 그가 있던 서커스단에서 공중그네를 타던 곡예사 인간들이 추구했던 것이다(212-213). 그리 적대적이지 않은 선원들을 관찰하면서 내적인 안정을 얻게 된 빨간 페터는 살려면 출구를 찾아내야 했고, 그 출구를 사람 흉내에서 찾았다. 그는 결국 사람들이 가르치지 않은 사람의 말까지 함으로써 우리에서 나오게 된다. 그 이후 그는 노력 끝에 새로운 창살에 불과한 동물원이 아니라 곡마단(서커스단)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으로부터 도망쳐 밖으로 뛰어나갔다”(219). 많은 선생들이 그를 가르쳤고, 피나는 노력 끝에 빨간 페터는 “유럽인 평균 교양 수준에 도달한다.” 이는 자유를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단지 출구였을 뿐이다. 그는 이제 밤에는 공연을 하고, 매니저를 대동하며, 숙소에 오면 훈련 중인 여자 침팬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가 바란 것은 오직 지식을 넓히는 일이었고, 그 목표에 도달했다.
최초의 고민 (1922)
공중곡예사는 언제나 서커스장 천장에 매달려 완전한 기술을 획득할 목적으로 끊임없이 수련한다. 순회공연은 그에게 고역이고, 흥행주는 이런 그를 경주용 자동차에 태워 초고속으로 이동시키거나, 기차 한 칸을 통째로 그에게 배정하여 그 칸에 서커스장처럼 그물을 쳐준다. 기차 안에서 곡예사는 흥행주에게 눈물을 흘리며 부탁한다. 앞으로는 그네 두 개를 써야 하겠다고. 흥행주는 그러마고 약속을 하고 전보를 보내 그네를 하나 더 만들기로 하고 곡예사를 진정시킨다.
단식 수도자 (1923)
단식공연이 잘 나갔을 때, 단식 수도자는 온 마을의 관심을 받았다. 감시자가 혹시 그가 무언가를 먹지 않나 불철주야 감시했으며, 단식이 끝나면 관중들의 경탄 속에서 귀부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수련을 마쳐야 했다. 수도자는 단식을 계속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40일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단식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 못 마땅했지만 단식은 늘 40일만에 환호 속에 끝났다.
시간이 흘러 단식공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식어버렸지만, 다른 일을 찾을 수 없었던 단식 수도자는 흥행주와 헤어져 곡마단에 고용되어 공연 지속을 도모한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당최 단식 공연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가 있는 우리는 단지 “마구간으로 가는 통로의 방해물” 신세로 전락한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수도자는 혼자만의 단식을 40일을 훌쩍 넘겨 진행하면서 자신만의 기록을 계속 갱신하다 밝견된다. 그를 발견한 감독이 그에게 왜 다른 일을 못하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단식을 하는 이유는 단지 맛있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긴 그는 "치워졌으며", 그 우리에는 표범이 새로 들어온다. 표범에게는 계속 먹이가 주어졌고, 사람들은 그 우리에 몰려들었다.
아스케시스: 자기에 대한 작업
슬로터다이크는 위의 세 단편들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밧줄을 타다 떨어져 죽은 곡예사 이야기와 연결시킨다. 슬로터다이크는 릴케처럼 카프카도 니체의 관점을 내재화하였다고 본다. 곡예사가 타던 밧줄과 카프카 단편의 주인공들의 삶은 모두 내재성에서 초월성으로의 이행을 형상화한 것이라며, 곡예주의(acrobatism)에 초점을 맞춘다. 세 단편에 대한 슬로터다이크의 해석은 일반적 독자의 시각보다 약간 더 심오하다.
그는 <학술원 보고>에서는 빨간 페터의 자발적 스토아주의에 초점을 맞춘다. <최초의 고민>의 공중곡예사는 세속세계와 단절하고자 하는 종교적 은둔의 패러디로 보면서, ‘예술가와 시민’이라는 이중적 삶이 초래하는 긴장을 예술가의 삶에 집중함으로써 해소/회피하고자 하는 곡예사는 늘 그 수준을 높이려는 향상에 대한 압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처세에 능한 예술가는 진정한 예술인이 아니며, 이것이 일상이 되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는 사라진다. 이 점은 <단식 수도자>에서도 관찰되는데, 이들의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완수할 수 있는 것으로 상상한다. 슬로터다이크는 단식은 고전적 자기수련에서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자기수련 그 자체로서 능동적인 결핍 체험인데, 음식의 결핍은 보다 고귀한 것, 곧 신이나 깨달음에 대해 갈망하는 자들이 극복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냥 지나쳤지만 슬로터다이크는 반전을 지적하는데, 단식술사가 단식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지 입맛(taste) 때문였다는 것이다. 그는 맛있는 것이 없었고, 따라서 먹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에 굶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헐... 맥빠진다. 그런데 슬로터다이크는 이 영양섭취 거절을 “나를 만지지 말라”(요한, 20: 17)보다 더 심오한 “내 안에 넣지 말라(don’t enter me)” 또는 “나를 꽉 채우지 말라(don’t stuff me full)”로 해석한다. 단식공연의 인기 소멸은 이제 부족한 것이 없는 시대의 도래에서 기원하며, 이는 신의 죽음과 동의어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카프카의 세 단편들을 신의 죽음 이후에 행해지는 “참수당한 자기수련(beheaded asceticism)”의 모습으로 해석해낸다. 머리없는 토르소의 자기수련. 토르소를 보는 자는 토르소의 우월한 근육질 몸이 자신의 열등한 지방질 몸을 보고 있음을 느낀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뒤바뀐다. 토르소를 보던 자는 이제 토르소가 보는 자, 토르소의 시선을 느끼는 자로 바뀐다. 그는 위에서 하는 명령을 느끼게 되고, 이 수직적 긴장이 『차라투스트라』의 외줄타기 곡예사와 카프카의 세 단편의 주인공들로 하여금 출구와 향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했다는 것이다.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수직적 명령였다는 것이다. 우월한 것이 열등한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과 그 명령을 내재화하여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 이것이 아스케시스의 멘탈리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