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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김은주 지음 / 봄알람 / 2017년 9월
평점 :
읽는 즉시 이해 가능하게 쓴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책이다.
이들은 타자와 소수자의 문제를 철학적 문제로 성찰하고, 타자를 동일성의 범주로 판단해버리지 않고, "즉시 이해 가능하지 않은" 겸손한 지평에서 타자와 맞닿았다. 말을 길어 올려 새로운 사유를 끌어낸 그들로부터 알게 된 것은, 동일자로 호명되어온 인간이 실은 이방인이며, 타자라는 사실이다. - P13
해러웨이는 소위 ‘객관적 지식‘의 전제가 죽은 백인 유럽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음을 폭로하면서,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개념은 모든 사람(그룹)의 비전이 그 사람(그룹)의 시시각각 변하는 정체성에 의해서 구성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상황적 지식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참인 것이 아닌,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의 한계 인식을 포함하는 지식이다.
모든 지식은 부분적이며 상황적이다. 오히려 인식의 객관성은 자기 지식의 부분성과 상황성을 성찰적으로 비판하는 데서 연원한다. 이 지식 모델에서 해러웨이는 자연의 실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며, 좋은 과학과 나쁜 과학은 구별할 수 있고, 이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자연현상의 물질적 분석과 이를 둘러싼 문화적 분석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客觀이란, 지나가는 손님(客)의 시각일 뿐이다. 따옴표 안에 있는. - P108
상황적 지식이란 겸손한 목격자의 지식이다.
‘목격‘이란 보는 것이고, 증언하는 것이며,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보고 기술한 바를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보고 기술한 바에 심적으로 상처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격은, 목격하는 사람들의 구축된, 그래서 결코 완전하지 못한 신뢰성에 의존하는, 집합적이고 제한적인 실천이다. 목격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하는 존재들이고, 틀리기 쉬우며, 무의식적인, 부정적인 욕구들과 두려움들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 pp. 245-246]
겸손한 목격자는 자신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과학기술에 자신의 세계가 기입되어 있다는 전제를 이해한다. "겸손한 목격자는 상황적 지식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겸손한 목격자는 자신의 영향력, 권력 한계를 인식한다. - P109
이 때 겸손은 자기소모적인 낮춤이나 무능력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은 오히려 하나의 특정한 재주인데, 그것은 자신이 처한 위치와 목격상황이 그 자체로 어떤 유산이자 복합적 구성물임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위치성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겸손한 목격자의 상황적 지식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대문자 지식이 아니며, 역사를 초월하거나 역사 밖에 있는 진리가 아니다. 상황적 지식은 역사적이며 태어남과 죽음의 조건하에 있다. 상황적 지식은 틀릴 수 있다는 것, 조건에 기반한 해석이란 발생하고 예약되고 우발적이며 어쩌면 속임수에 빠지기도 쉬운 참여방식임을 이해하고 뛰어드는 것이다.
속지도 속이지도 않았다. 지나갔고, 다르게 해석되고, 다르게 기억되고, 다르게 잊혀진다...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 P109
사이보그를 통해서 해러웨이는 질문한다. 정말 ‘여성‘이라 자연스럽게 묶일 그러한 본질과 범주가 존재하는가? 실상 젠더, 인종, 계급 같은 단일한 정체성은 가부장제, 식민 자본주의의 모순된 사회 현실들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된 성취다. 이때 ‘우리‘로 묶은 이는 누구이고, 그 ‘우리‘에 속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 ‘단일한 우리‘라는 묶음으로써 이득을 누리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라고 불리는 강력한 정치적 신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여성) 정체성들을 이용했는가?
이 점에서 사이보그들은 백인 (여성)의 단일한 정체성과 무관하다. 사이보그에게 묶음이 있다면 이주노동자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 아웃사이더라는 사실일 것이다. 사이보그 개념은 본질적 정체성과 이를 구획 짓는 경계에 대해 묻는 개념이다.
김은주는 사이보그 선언이 사회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해러웨이의 blasphemy라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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