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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ㅣ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평점 :
죄의식을 넘어 선 수치심과 만나다
『노동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2012. 6. 부케
얼마 전 삶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사람들의 기사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들었다. 배달사원의 승강기 이용 금지와 관련한 것이었다. “반드시 계단을 이용해서 배달해야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 강남 대형 아파트의 각 동마다 붙었다고 한다. 주민 이용의 불편도 있고, 승강기 이용이 공용 전기세의 부담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데, 그들의 경제력을 고려한다면, 전기세보다는 엘리베이터를 자유롭게 이용하지 못하는 불편함이 물론 컸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품격 상 - 한 공간에서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인간 종의 마주침이 불편했을 수도 있을 터이니 - 막아야 할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기막힌 일은 십년 이상, 하루 열 시간 강남에서 배달사원으로 일 했다는 어느 익명의 인터뷰이(interviewee)가 말하는 생활상이었다. 이렇게 기사화되기 전에도 주민들의 눈치가 보여서 되도록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앞으로 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하소연했다. 동료 중에서 무릎 성한 사람이 없는데, 그 중에서도 자신은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이주일에 한번 무릎에서 피를 뽑는 그녀의 삶이 괜찮다면, 그 외의 배달사원이 겪고 있을 통증의 강도는 짐작키 쉽지 않다. 새벽에 일하기 때문에 주부들이 선호하는 일, 투 잡(two job)을 할 수 있어서 이 일을 선택한다는 그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치통 한번이면, 독감 한번이면 쉽게 무너지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관념으로서의 고상한 삶의 실체다. 그 위태한 삶에서 자신만만하게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는 뻔뻔함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 담론이 그대로 읽히는 에피소드다.
김일란 홍지유 감독의 <두개의 문>은 우리에게 더 바짝 다가온다. 생존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위법행위가 ‘진압’의 대상이 아니고, ‘섬멸’의 대상이 되었다. 2009년 1월 발생한 용산 사태는 꿈의 도시 서울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라는 미명 아래, 합법적(?) 폭력이 어디까지 가능한지의 기준을 만든 희대의 사건이 되었다. 사건을 진두지휘한 경찰청장은 국회의원 후보로 세상에 나왔고, 당시 대법원 판결을 한 주심판사는 대법원장이 되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불관용 정권을 끝없이 관용한 시민의 불감증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명박 정부를 선택한 우리시대의 모든 사람이 감당하고 가야 할 죄 몫이 있고, 그 자리에 있었던 경찰, 특공부대, 용역, 철거민의 지울 수 없는 심리적 외상이 있으며, 여섯 분의 가슴 아픈 희생이 있었다. 직접적인 가해자들이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4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상영 시간 동안의 어둠이 나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는 외피가 되어 주었는데, 영화관 밖의 햇빛 탓에 세상은 너무도 역설적이었다.
남의 집을 짓느라 자기 집을 짓지 못했다는 공공건축가 ‘고(故) 정기용 건축가님’의 특강 녹화 본을 다시 보았다. 다큐 <말하는 건축가>가 다 보여주지 못해서 답답했던 건축가의 진의를 다시 배우는 기쁨이 있었다. 일민 미술관 전시회에서도 마주할 수 없는 공공건축에 대한 그의 신념은 그가 지은 - 자식과 같은 - 건축물들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 공간은 사람과 사람이 넘나들고, 사적 공간의 개별성과 자연의 조화를 함께 끌어안는 공공 삶에 대한 희구였다. 정읍, 순천의 어린이 도서관, 김제 지평선중고등학교, 무주의 공공건축물을 간간히 거닐며, 이 시대를, 이 땅을 거쳐 간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오래오래 간직할 것이다. 누군가는 자본축적을 위해서 건물을 상품으로 만들고, 누군가는 삶을 안받침 할 수 있는 예술로써 공공의 터전을 창조한다. 누구도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성벽처럼 쌓은 높은 담벼락과 거대한 철문 하나로 세상과 단절한 졸부들의 사적 공간이 아니라, 옆집과 내 집 담벼락 위에 널빤지를 얹고 파를 심은 화분을 함께 나누어 쓸 수 있는 소박한 삶의 공간인 주택의 가치를 소중하게 담아내야 한다. 여기에는 각 계급의 사회·문화·경제 자본이 만들어낸 아비투스를 사이에 둔 상징투쟁이 있겠으나, 그것이 누구의 승리가 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서사가 길었던 것은 내가 이미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모든 한국인은 이 책에 공감하거나, 최소한 이해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 바버라가 이야기하는 십년 전 미국 3D업종의 실태는 고스란히 현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누구의 추천이 없더라도 - 책상머리 글쓰기를 거부하고, 삶 전체를 이동시켜 온몸으로 경험하는 체험형 글쓰기로 유명한 - 열정적인 저널리스트이며 사회운동가인 저자의 전작을 읽었던 독자라면, 망설임 없이 부키에서 출판한 『노동의 배신』을 선택할 것이다. 적어도 독서와 독후감이 우리의 온 몸을 휘감고 있는 며칠 동안, ‘워킹 푸어’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우리의 안락하고 안정된 삶의 실체와 직면하게 될 것이다.
통증이 지배하는 세계
50대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워킹 푸어의 삶을 연구하기 위해서 그들의 동료가 된다. 식당 종업원, 요양원 · 호텔의 청소부, 청소 용역회사의 직원, 월마트 직원까지 몸소 체험하며 혹독한 트레이닝을 밟는다. B학점의 노동과 F 학점의 일상으로 평가받는 그 세계는 병든 신체의 통증이 지배한다. 쉴 새 없이 음식을 나르고, 다른 사람이 사용한 변기의 오물을 닦아내며, 다음 노동을 위해서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 식사의 유일한 목적이다.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그 노동을 향한 감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에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배우지 않고 터득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모든 직종에는 그들만의 고유 법칙(노모스)이 존재한다. 지나치게 많이 아는 것을 피하고, 자신의 능력을 모두 보여줘서도 안되며, 내일을 위한 에너지를 반드시 비축해야 한다. 신속하게 일하지만, 동료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육체노동자들이 가져야 할 미덕이다. 그들은 혼자 벌어서 혼자 쓰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의 강도 센 노동을 얼마 후에는 멈출 수 있다는 희망 없이 부양가족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산다.
사라진 사람들
쉬지 않고 일하는데도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면, 분명 사회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긍정의 마인드를 요구하는 것은 노예가 되라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70년대 박정희 독재 정권의 저임금 · 저곡가 정책과 유사한 정책이 지속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덜 받는 의료비와 식비, 열심히 일해도 감당할 수 없는 집세의 불일치 속에서 가난을 자기 탓하며 살아간다. 집값의 민감함을 임금이 따라잡지 못한다.
경제적인 소외는 문화의 소외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빈민들의 문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대중문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재벌들의 권력 다툼, 중산층의 사랑과 이혼이 드라마를 장악했고, 예능·오락 프로그램의 패널들이 보여주는 철없는 순진함은 너무 일찍 생존의 책임자로서 어른이 되어버린 그들의 품성과 동떨어져 있다. 화면에 비춰진 중상층의 라이프스타일을 보면서, 불행을 자학 탓으로 가져갈 저소득 임금노동자의 자학 모드는 당연한 일이다. 연봉 몇 억을 버는 사람들, 억만장자인 운동선수들, CF 한편으로 저임금 노동자가 십년 이상 일해야 버는 돈을 받는 사람들, 특별히 일하지 않고 부동산을 되파는 것으로 재벌이 되어 가는 사람들을 대중문화 속에서 익숙하게 본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신의 객관적 삶의 조건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부자 되기’가 삶의 미덕인 천민자본주의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진통제 없이 일을 할 수 없는 지속적인 고된 노동, 유니폼은 죄수복(135쪽)에 가깝고, 긴 근무 시간과 매 작업에 전력투구해야 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다 보니 시야가 좁아진(76쪽)그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보이지 않는다.
왜 악순환은 계속되는가?
이 책의 압권은 저자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위킹 푸어의 삶을 분석한 마지막 4장 “왜 악순환이 계속 되는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할수록 더욱 가난해지고, 더 나은 일이 있음에도 새로운 일을 찾지 못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나 또한 도시 빈민들을 보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골에 내려가면, 현재의 노동으로 더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데도, 비싼 집값을 치르면서 수도권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것은 삶의 ‘관성’을 이해하지 못한 자기중심적 사고의 결과다. 모든 인간은 삶의 터전을 옮길 때 강도 높은 마찰을 경험하고,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사람은 기동력이 떨어진다. 정보 또한 권력이기 때문에 워킹 푸어가 취할 수 있는 조언 또한 새로운 선택을 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물론 근대의 인간은 과학, 정신 병리학, 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발명된 합리적 · 이성적 존재로서 동물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러한 특성 속에서 인간은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관계 지향 속에서 살아간다. 지배 담론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갈등을 최소화 하려는 관성 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세계가 유지된다. 지배 권력은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직접적인 억압 없이도 - 스스로를 통제하는 미시 권력의 지배를 받는 - 수동적 객체를 무수히 만들어 낼 수 있다.
책을 읽는 내내 - 실체인지, 주관인지 모르겠으나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 현재의 삶이 그 사람의 인성에서 만들어졌다는 듯이 착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중산층 특유의 시각을 가진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삶을 시작하는 존재 기반이 달랐다는 것을 무시하거나, 진실 바라보기를 외면하는 이율배반적인 중산층으로의 나와 대면하게 되었다. 워킹 푸어 보다 훨씬 더 사회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고, 상류층보다 도덕적으로 금욕적인 삶이 가능하며, 이유 없이 억울하게 해고될 가능성이 조금은 적은 중산층의 이중성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내 삶이 위험해질까봐 암묵적으로 침묵하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가지고, 바버라가 쓴 『추락의 두려움 : 중산층의 두 얼굴』을 조만간 읽어야겠다.
『노동의 배신』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내가 조금은 달라졌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존재 기반이 흔들렸다. 내 내면을 살짝 금이 가게 한 도끼질을 당한 느낌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착취는 아니다. 노력 이상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희생한 대가다. 특권과 희생 주체의 서로 다른 연결 고리를 읽게 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말한다.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한참 모자라다. 우리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임금을 못 받으며 수고한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다.”(296쪽) 어떤 인간도 내가 한 노동에 비해서 훨씬 적은 보상이 주어지는 노예적 삶을 한없이 수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기 몫을 요구하는 날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도래할 것이다. 최소 수혜자가 자기 몫을 요구하는 날, 분명 지배 권력은 그동안의 복리까지 충분히 지불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