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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Declaration)』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12.
“전 세계의 빚진 사람들, 미디어 된 사람들, 보안된 사람들, 대의된 사람들이여,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라!”
전지구적 ‘세계화’를 ‘제국’이라고 규정하고, 자본 · 군사 · 정치적 네트워크를 해체하는 핵심 세력을 ‘다중’이라고 명명했던 이탈리아 좌파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펴낸 또 하나의 역작이 바로 『선언(Declaration)』이다. 그는 평생의 학문적 동지 마이클 하트와 함께 ‘아우토노미아(자율성, 자주성)’를 바탕으로 지배 권력에 대항하는 안티 세력을 전지구적으로 연결하는 ‘다중(Multitude)' 개념을 설정한다. 다중은 인민(people), 대중(mass), 노동계급 등이 다양하게 조직되어 행동하는 전지구적 연결이다.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전위(前衛)에서 온몸으로 투쟁하는 실천적 지식인, 네그리와 하트는 2011년 전 지구적 연쇄봉기를 주도면밀하게 탐색하며 편지, 기고, 인터뷰 등의 다양한 이론적인 방식으로 봉기에 적극적으로 개입 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최근에 탄생한 책 『선언』은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 1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되었다. 시위의 기운이 사라진 이후에 세상의 변화와 의식의 진화는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고민할 수 있는 책이다. 봉기의 끝은 또 다른 봉기로 이어지고, 좌절한 시위는 세상의 기운을 바꾼다. 시위는 - 한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 매번 틈새를 뚫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변주의 여정이다.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틀어가기 위해 힘을 더하는 모든 이들이 일독해야 하는 책이다.
『배흘림기둥의 고백- 옛건축의 창조와 진화』서현 지음, 효형 출판, 2012. 09.
십여 년 전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고 나서, 한동안 사찰의 배흘림기둥에 눈이 가던 시절이 있었다. 워낙 태생이 문자적 인간인지라, 나에게 배흘림 기둥은 심미적 안정감도 보다도 그 단어 자체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왔다. 글자에 알맞은 모양새를 갖춘 ‘배흘림 기둥’, 그리고 또 한번 배흘림기둥에 눈길이 머물게 만드는 서현의 『배흘림기둥의 고백- 옛건축의 창조와 진화』.
고(故) 정기용 선생님을 알게 된 이후, 자꾸 건축과 건축가에게 마음이 가던 차였다. 또한 아마추어를 위한 교양서들을 들추며, 여행을 꿈꾸는 시간들이었다. 서현의 『배흘림기둥의 고백- 옛건축의 창조와 진화』는 - 건축에 대한 애정은 가득하나, 무지로 똘똘 뭉친 나와 같은 - 초보자를 위해서 더없이 훌륭한 책이다.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로 세상을 이름을 소개했던 이 책은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서 이름을 바꾸고, 반복 설명도 서슴치 않는 ‘자상함’으로 성형하여 다시 독자와 마주한다.
저자가 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책을 고쳐 썼는지를 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숲의 나무가 환생하여 전통건축의 구조체가 된다. 이 책은 전통 건축의 각 부재들에게 던져진 과녁과 이들이 거쳐 가야 했던 과정을 설명한다. 건축사는 부재들을 뜯어고쳐가며 새로 조합해나간 진화과정의 서술이다. 매 순간 창조의 아이디어가 필요하였으니 그것은 창조와 진화가 교직되는 과정이었다.” 나무가 제 모습을 바꾸어 전통가옥으로 환생하고 진화하듯이, 서현의 책 역시 환생에서 진화 과정을 거친 샘이다. 건축이 “인간 의지의 물리적 표현”이라면, 이 책은 전통 건축을 사랑하고자 하는 소박한 독자의 바람으로 잉태했다. 철저한 합리성의 계산에서 건축물을 생산해야 하는 건축가의 언어가 시어를 읽듯, 철학서를 읽듯, 행간에서 숨을 고르게 만든다. 가을은 사물이 우리에게 걸어오는 무수한 말들에 귀 기울일 시간이다.
『건축, 그 바깥에서- 잠재 공간과 현실 공간에 대한 에세이』엘리자베스 그로스 지음, 강소영 외 옮김, 그린비, 2012. 09.
이것은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건축 밖의 공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다.
엘리자베스 그로스는 육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을 개척한 철학자다. 몸을 사유하던 그녀는 육체의 지평을 확장하여 ‘공간’을 다각도로 탐색한다. 이 책을 건축으로 접근했다면, 베르그송의 철학부터 다시 공부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인체 공학을 알고 난 다음에 몸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듯이, 현대 철학을 섭렵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실체를 가진 건축을 인간과 접합하는 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으리라. 몸이 그러하듯, 공간 또한 내부와 외현의 접점에서 존재를 드러낸다. 밖은 또 하나의 공간으로 건축의 한 몸을 이룬다. 건물의 안팎이 이분법을 해체하고 하나가 되듯, 건축과 철학 또한 이질성을 극복하고 하나의 의미와 은유로 읽어낼 수 있다.
경계 넘기에서 만날 수 있는 풍요로움이 가득한 책이다. 옮긴이가 경계 넘기의 달인들이다. “기존 분과학문의 경계를 가로 지르고 넘나들며 학문 간의 유기적 상호소통을 지향하는 탈 경계 인문학 연구단”이다. 이 연구단은 각각의 전혀 다른 전공을 가진 9명의 연구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2009년부터 탈 경계 인문학의 테두리 안에 ‘공간’ 범주를 도입하는 작업이 갖는 의미와 가능성을 연구”하고 있다.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 박명진 엮음, 문학과지성사, 2012. 09
텍스트는 권력과 만나 담론을 생산한다. 담론을 생산하는 중심에 미디어가 있다. 미디어의 담론 생산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프레임을 밝혀낼 수 있다.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은 미디어 담론 전문가들이 우리 사회의 핵심 담론을 분석한 책이 다. 역설적으로 저자들 또한 ‘두꺼운 언어와 얇은 언어“라는 프레임으로 우리 사회의 사회·문화 현상을 분석한다. 두꺼운 언어는 전통적 미디어 담론이고, 얇은 언어는 디지털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일반 대중이다. 지성인의 언어는 점점 두꺼워지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중의 언어는 점점 더 얇아진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렇게 두껍고 얇은 언어로 명확하게 이분화되지 않겠지만, 사태를 선명하게 분석할 수 있는 틀은 될 수 있다.
이 책이 가지는 두 가지 매력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신드롬’을 일으켰던 사건을 분석하기 때문에 흥미롭다. 케이팝 열광, 미네르바 사건, 남북한 문제를 분석하다보면,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효과와 12월 대선까지도 담론으로 분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미셸 푸코 이후 미디어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담론 분석 방법을 익힐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가 될 것이다. 미디어가 어떻게 의제를 선정하고, 담론을 형성하여 권력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스스로 분석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장준하 평전』김삼웅 지음, 시대의 창, 2012. 09
2009년 출판된 『장준하 평전』 개정판이 나왔다. 지난 8월 장마로 인한 산사태에 고(故) 장준하 선생님의 무덤이 파헤쳐졌다고 한다. 선생님의 장남 장호권은 그동안 진실 규명을 위해서 이미 진토가 되었을지 모를 부친을 세상 밖으로 내놓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세상은 이성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기운이 존재한다. 장준하 선생님은 백골의 몸으로 진실을 밝히고자 스스로 무덤을 파헤치고 나선 듯하다.
장준하 선생님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와 따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광복군으로 독립을 위하여 투쟁했고, 해방 후에는 김구 선생님과 함께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 헌신했으며,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투쟁하셨다.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하기 위하여 진실을 알리고 담론을 생산했던 잡지 ‘사상계’는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투쟁의 구심점이 되었다.
벌써 30여년이 흘렀지만, - 타살이라는 확신을 가지고도 - 선생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사로 남아있다. 더 늦지 않게 진실이 규명되기를 바라는 맘으로 선생님의 평전을 다시 읽는다. 개정판으로 새롭게 독자와 만나게 된 선생님의 평전을 젊은 벗들이 읽게 되고, 세상을 움직이는 정의가 무엇인지 재고(再考)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