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화창한 토요일 오전, 모니카버전 L양과 함께 <언러브드>를 봤다.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집스레 일관하며 사랑을 '선택'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낯설기도 했고, 또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영화였다.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같은 중생에겐 참으로 쉽지않은 질문들을 던져주었다.
그렇지만, 나카무라 도오루같은 근사한 눈매의 멋진 남자가 자꾸 들이댄다면.........ㅎㅎㅎ
02. L양과 점심을 먹으면서 여전히 한달에 두어차례씩은 꼭 보게되는 '선' 이야기가 나왔다.
난 지난달은 조용히 넘어갔으나 L양은 어김없이 한차례 출동.
비오는 주말, 정장을 차려입고 만날 장소로 나갔더니 너무 편한 차림으로 나와주신 맞선남.
목 늘어난 니트에 청바지를 살짝 접어입고 나오셨단다. 우우웅
물론 입성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해선 안되지만, 이건 '선'이잖아! 맞선 자리에 청바지라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꾸 철없는 멘트만 날리는 것도 맘에 안들어서 얼른 정리하고 나왔단다.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비는 오고, 어쨌든 이번에도 맞선은 영 아니고, 오만가지 우울한 생각을 하며 터벅터벅 카페를 걸어나오는데....
자기 앞으로 검은 세단이 다가와 창문을 내리더란다.
(L양이) 걸어나오는 모습이 너무 단아해서 이야기를 거는 것이니 자기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고...
차 안에 있던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그렇게 수작을 걸더란다. L양은 별 미친놈 다보겠네, 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정중히 예를 표하며(거기대고 욕을 할 순 없으니까) 자기는 갈길이 바뻐 가봐야한다며 돌아섰단다.
우울함 곱하기 우울함 10000배. 왜 나이든 아저씨에게만 어필이 되느냐고, 그녀가 울부짖는다.
다 참하게 생긴 탓이야, 라고 위로를 해주었지만, 선볼때마다 우린 매번 무슨 난리인지....ㅠ.ㅠ
03. 월요일 아침 회의시간.
각자 업무보고를 하는데 B양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눈이 너무 부어있다. 엄청나게 울고 나온 티가 역력하다.
점심시간에 밥 먹으면서 살짝 물어봤다.
B양이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게 되셨는데....그것때문에 어제 하루종일 어머니랑 심하게 다투었다는 것. 문제는 B양의 남자친구(청개구리를 몰고 다니는 그 왕 친절남 말이다)가 B양보다 12살이나 연상이라는 것이다. 띠동갑.
딸만 셋인 집안의 막내딸인 B양. 그녀의 어머니 입장에선 눈에 넣어도 안아픈 금지옥엽 막내딸이 "중늙은이(그녀의 어머니가 그렇게 표현하셨단다)"와 사귀는 것에 기함을 할 노릇. 둘이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만나는 사이라는 것을 아시면 아마 몸져 누우실지도 모른다. 에효에효...
다 자식 잘되라는 뜻에서 그러시는 부모님 맘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B만 바라보면서 긴 세월을 기다리고 기다려온 남친의 사랑도 가슴깊이 새겨져있고, 난공불락 현실을 넘어가기 위한 험난한 여정이 빤히 눈에 보이고.... B의 사랑과 결혼, 부디 모두에게 해피엔딩이 되었으면....
04. 지난 4월... 하이드님이 보리스 에이프만 공연 패키지를 급하게 내놓았을 즈음...
난 그 때 2주 연속 맞선을 봤다. 허구헌날 이렇게 말도 안되는 대면식을 가져야한다는 것 때문에 당시 한반도를 뒤덮고있던 황사처럼 몸과마음이 아주아주 까칠해져있었다. 기분이 그야말로 구깃구깃.
저멀리 워커힐까지 가서 봤던 어느 일요일 오후는 정말 최악이었다.
그리고... 워커힐에서 선을 보고난뒤 3일 지난 화요일 저녁, 회식을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소개받기로 했다는 금시초문의 이야기.
나는 또 누군가를 만나 선을 보기로 되어있던 것.
그 주엔 100여 페이지정도 되는 매거진 기획안을 잡느라 계속 바빠서 도통 부모님과 얼굴 마주할 시간도 없었고(결국 그 기획안 공중분해됐다 ㅡ.ㅡ 으이구.),
월요일날은 두 분이 잠시 여행을 가시는 바람에 내게 이야기할 틈이 없으셨다.
그래도 그렇지, 그 전화를 받는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결국 고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일단락되었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오갈 때마다 숨이 막히는 나도,
조바심에 동분서주하시는 부모님도,
다 안스럽고 마음이 안좋았다.
결국, 패닉상태에다 히스테릭해져가는 나 자신에 대한 처방으로 하이드님이 내놓은 보리스 에이프만이라는 카드에 얼른 손을 들었다.
두어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그런 일 때문이었나, 하고 스스로 머쓱해한다.
계기야 어찌됐든 최고의 공연을 봤으니 뭐 좋지만...